# 107
양동작전 (5)
“그렇군…….”
혀를 내민 채 핏기가 빠진 리샤의 목을 본 베네딕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두운 낯짝. 그리고 일자로 찢어진 날카로운 눈빛.
베네딕은 조용히 전령의 목을 주워 들었다.
“그렇단 말이지.”
화르륵.
그때였다.
베네딕이 주워 든 전령의 목이 삽시간에 불타오르더니 이내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베네딕은 손바닥 위에 쌓인 약간의 재를 모래사장 위에 떨어뜨리며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화르르륵!
“……!”
그때였다.
베네딕이 덤덤한 말투로 재를 흩날려 보낸 순간, 그의 전신에 주황빛 불꽃이 휘감아 올랐다.
그러나 베네딕의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다.
“여흥은 여기까지다.”
천천히 뽑아 드는 두 개의 곡도.
베네딕이 쌍검을 뽑아 들자 베네딕의 몸에 붙어 있던 불꽃들이 쌍검으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화르륵!
더욱더 크게 불타오르는 불꽃.
그것을 본 반이 표정을 굳히며 짐짓 긴장하기 시작했다.
‘태양 검이라…….’
위대한 라의 권능들 중 하나인 태양 검.
태양 검은 라의 불꽃을 검날 위에 덧씌워 내는 종교적인 힘으로 세상 그 무엇이든지 태워 낸다는 끔찍한 악명을 가진 불꽃이기도 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과거, 실력으로 따지자면 분명히 반이 베네딕보다 한 수 위에 해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이 베네딕을 제압하지 못했던 까닭은 바로 저 태양 검에 있었다.
긴장하기 시작한 반은 검에 오러를 불어 넣으며 이제야 겨우 몸을 가누기 시작하는 테리온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님.”
“……그래.”
“태양 검을 뽑아 든 베네딕은 저조차도 감히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상대입니다. 그러니 백작님께선 오스카 백작님과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알겠네.”
손이 부러진 궁술사와 어깨가 부서진 창술사만큼 쓸모없는 존재도 없었다.
자신의 주제를 깨달은 테리온은 자존심일랑 집어던지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반의 몸을 감싸고 있던 오러가 더욱더 두꺼워졌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콰앙!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튕겨 나갔다.
두 개의 거대한 힘이 격돌했다.
힘이 격돌함과 동시에 고막을 찢을 만큼 거대한 폭음이 주변을 뒤덮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이 딛고 있던 모랫바닥의 알갱이들이 돌풍에 휩싸여 주변으로 흩뿌려졌다.
‘젠장, 역시……!’
젊은 외견으로 속일 수 있는 짤막한 방심은 이미 그 밑천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오롯이 진짜의 싸움뿐이었다.
반은 범의 송곳니처럼 자신을 향해 뻗힌 두 개의 곡도를 가까스로 막아 냈다.
엄청난 힘이었다.
베네딕이 태양 검을 뽑아 든 순간, 그는 라의 불꽃뿐만이 아니라 본연의 힘을 몇 배나 상승시켜 주는 ‘라의 축복’을 받은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에 베네딕이 여전히 짙은 냉소와 함께 말했다.
“가소롭구나.”
콰앙!
검을 휘두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맞붙은 검날 사이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런 미친……!’
거대한 폭발에 의해 반이 용수철처럼 멀찍이 튕겨 나갔다.
다행히 몸에 두른 오러 덕분에 화상을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상급 소드 마스터의 오러조차도 흔들릴 만큼 라의 불꽃은 정말이지 강력한 것이었다.
반은 몸에 붙은 라의 불꽃을 제거하기 위해 잠시간 오러를 해제했다가 다시금 오러를 둘렀다.
‘이래서 성가시다는 거였는데.’
마법 따위가 아니었다.
라가 직접 선택한, 사막에서 단 한 명뿐인 무신에게만 전해지는 라의 특별한 권능.
그 권능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이상, 반에게 있어 베네딕은 날개 돋은 범과도 같았다.
“벌써 지친 것이냐?”
상황은 완벽하게 역전되었다.
원 안에서 매섭게 몰아붙이던 이전과는 달리, 이제는 베네딕이 반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반은 베네딕의 공격을 막아 내기에 급급했다.
아무리 오러를 두텁게 씌워도 라의 불꽃이 자꾸만 반의 오러를 좀먹었기에 오러를 풀었다가 두르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콰앙!
쏟아지는 쌍검 세례에서 다시 한 번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반이 오러를 풀어낸 틈을 타 그 사이에 라의 불꽃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이런!’
황급히 흉갑을 벗어 내는 반.
가까스로 살갗에 불꽃이 옮겨붙는 것은 막을 순 있었으나 흉갑 자체는 결국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본 베네딕이 그제야 낮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도망치는 꼴이 꼭 생쥐 같구나.”
굴욕이었다.
그리고 억울했다.
전성기라고 불렸던 시절 때부터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육체와 검술을 단련해 왔건만 그런 수십 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은 베네딕을 압도, 아니 상대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저 분할 따름이었다.
‘혹시라도 기대했건만 역시 안되는 건 안되는 건가?’
한계를 알았으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되는 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면 결국 추해지는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이에 반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품속에서 스크롤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 스크롤은 헨리가 준 것이었다.
만약 베네딕과 맞서다가 힘의 부족함을 느낄 때쯤이면 이것을 사용하라고 했다.
“이번엔 또 무슨 잔재주를 부릴 생각이지?”
낯빛이 어두웠던 베네딕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이에 반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글쎄.”
사실은 반도 이 스크롤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저 베네딕과의 힘 싸움에서 부족함을 느끼면 사용하라고 전달받았을 뿐.
이에 반이 스크롤을 찢어 냈다.
부욱!
그러자.
우우웅.
찢어진 스크롤은 금방 가루가 되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옅은 공명음과 함께 허공에서 자그마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허공에서 단단하게 고정되는 마법진.
이윽고 마법진에서 조그마한 장신구 하나가 튕겨 나왔다.
‘음?’
바닥에 떨어진 장신구를 본 반은 조심스레 그것을 주워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네딕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걸 어떻게!”
“……?”
“제기랄!”
쿵!
욕지거리와 함께 불꽃을 사그라트리는 베네딕.
이윽고 그는 땅바닥에 강하게 발을 굴렀다.
휘오오오오!
그때였다.
그가 발 구름한 직후, 귓전을 때릴 만큼 거대한 돌풍이 사방에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휘오오오오오!
시간이 지날수록 바람은 돌풍에서 회오리가 되었고, 그 회오리는 곧 거대한 모래 폭풍이 되어 일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런!’
지천에 널린 모래들이 베네딕의 모래 폭풍에 휘말리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반은 어떻게든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가린 팔 틈으로 전방을 보려고 했다.
파앗!
그러나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모래 폭풍이 사라지고 말았다. 마치 신기루가 사라지듯이.
‘사라져?’
그리고 모래 폭풍이 사라짐과 동시에 베네딕 또한 종적을 감추었다.
‘도망친 건가?’
폭풍이 사라지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그리고 그 밑에 당연히 있어야 할 베네딕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것 때문에?’
마법진을 통해 튀어나온 장신구.
베네딕은 이것을 보자마자 안색을 구기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헨리 녀석, 대체 나한테 뭘 준 거야?”
이것이 뭔지는 몰랐다. 하지만 어찌 됐든 베네딕이 도망쳤으니 고비는 면한 셈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부우우우!
전장의 저편에서 아군의 뿔피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함락에 성공한 모양이로군.”
토벌군의 피해가 막심하다고 해도 뒤늦게 샤하군이 합심하였으니 어느 정도 예정된 승리이긴 했다.
“이쪽은 대충 끝난 것 같고…… 술탄 쪽은 마무리가 되었으려나?”
겨우 임무를 마친 반이 흐르는 땀을 훔치며 토벌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반과 헤글러, 그리고 비람을 산맥의 너머로 데려다준 헨리는 그제야 모든 채비를 끝마친 후, 쇼난군을 출정시켰다.
두두두두!
1만에 달하는 정규군에 비해 1천밖에 되지 않는 쇼난군은 헨리의 비호를 받아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술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술탄에 인접했을 무렵, 헨리는 인내심을 가지고 베네딕의 등장을 기다렸지만 베네딕은 끝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예상대로 베네딕은 1만의 정규군을 쫓아 칼리프로 향한 것이 분명했다.
이에 베네딕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것을 확신한 헨리는 천천히 술탄 성 앞으로 쇼난군을 진격시켰다.
부우우우!
쇼난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술탄 성은 적군의 경보를 울리는 뿔피리를 불어 젖혔다.
경계 태세를 갖추는 술탄군.
이에 헨리가 말했다.
“케일 님.”
“예, 헨리 공.”
헨리의 부름에, 사막의 볕을 피하기 위해 깊숙이 뒤집어쓰고 있던 수트라를 벗으며 케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케일의 뒤를 따라 그의 제자들 또한 수트라를 벗으며 말에서 내렸다.
“케일 님, 그럼 말씀드렸던 대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를 꽉 깨물며 힘겹게 대답하는 케일.
원래대로라면 이번 토벌에서 백작들은 제국군의 도움을 절대로 받아선 안 됐다.
하지만 케일의 경우엔 달랐다.
케일은 쇼난군이 먼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아이젠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물론 그에 따른 허가는 마탑을 통해 이미 정식적으로 절차를 밟은 상태였다.
‘저 치사한 자식!’
환경이 험할수록 이동하기를 꺼리는 족속이 바로 마법사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일이 발 벗고 쇼난군을 지원한 까닭은 케일의 심장에 박힌 나르웜 때문이었다.
‘난 한동안 샤하트라 토벌 건 때문에 너를 신경 써 줄 수가 없다. 그러니 제때 마력을 공급받고 싶다면 알아서 나를 찾아와라.’
직접적으로 명령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너무나도 확실한 것이었다.
그래서 케일은 사막 탐사 같은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이번 토벌전에 쇼난군을 지원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마력을 공급받은 케일이 제자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시작하자.”
하늘 위로 손을 뻗는 마법사들.
이윽고 케일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연성되기 시작했다.
쿠르릉.
벼락의 케일.
그리고 그의 아이들.
그들이 합심하여 주문을 맺자, 가뭄으로 유명한 샤하트라의 하늘에 먹구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벼락?”
“벼락이라니?”
마른하늘에 생겨난 뇌운.
그리고 동요하는 술탄의 사람들.
마법과 벼락. 두 가지 모두 샤하트라의 국민들에겐 낯설고 생소한 것들이었다.
그것을 본 헤라리온이 헨리에게 말했다.
“역시 막상 직접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군요.”
“원래 전쟁이란 게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전쟁이 끝난다고 한들, 전하를 배신한 사람들은 반드시 벌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많이 단단해졌다고 한들 역시 사람의 기본적인 천성은 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윽고 주문이 완성된 순간이었다.
“……쳐라.”
꽈르르릉!
케일의 명령어가 발동된 순간, 술탄 성 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벼락들이 내려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