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102화 (102/522)

# 102

샤하트라 산맥 (4)

정복 전쟁 이후, 거의 몇십 년 만에 본 마법이었다.

그러니 제사장들이 놀라는 것 또한 당연지사.

아홉 명의 제사장 모두가 신처럼 강림한 칸을 벙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헤라리온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들 오랫동안 잘 참아 주었소.”

“저, 전하……!”

어떤 제사장이 그간의 설움이 북받쳐 왈칵 울음을 쏟아 냈다.

그것을 본 헤라리온이 얼른 탁자 밑으로 내려가 손수 그들을 다독여 주며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 * *

칸과 대제사장, 그리고 제국의 사신들이 한꺼번에 나타났으니 구구절절한 설명은 할 필요가 없었다.

제사장들에게 있어 칸과 대제사장은 절대적인 믿음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바깥에 베네딕의 병사들이 샤하를 포위하고 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벌써 며칠째 저러고 있는지, 성안에 있는 저희들만 피가 마를 지경입니다.”

“경계는 꾸준히 서고 있습니까?”

“예,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인 경계는 서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 들어서 경계 근무는 꼬박꼬박 시키고 있습니다.”

“특이 사항은요?”

“눈에 띄는 변화는 없지만 대략 사흘에 한 번꼴로 수도로 전령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사흘에 한 번이라……. 혹시 마지막 전령이 언제 출발하신지 아십니까?”

“어젯밤에 출발했다고 보고받았습니다.”

성을 함락시킬 마음은 없고 알아서 항복하기를 바라니 바깥에서 무한정 대치만 하고 있다.

게다가 샤하는 샤하트라에서도 가장 깊고 외진 곳.

바깥에서 경계만 잘 선다면 외부로부터의 도움은 얼마든지 사전에 차단할 수 있었다.

‘방심도 이런 방심이 없군.’

이 모든 것이 산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가질 수 있는 방심이었다.

계산을 마친 헨리가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말했다.

“잘됐네요.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계획을 읊어 보이는 헨리.

그의 계획을 듣던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았다.

“그게……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제 계획대로 한번 실행해 보시겠습니까?”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는 헨리. 이에 얼마간 고민하던 헤라리온이 긍정의 의사를 밝혔다.

“좋습니다. 만약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면 헨리 공이 제안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칸이 긍정했으므로 다른 제사장들 또한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 칸은 절대적인 존재였으므로.

* * *

“흐아아아암.”

수도를 공격하여 직접 왕권을 찬탈한 본대와는 달리 샤일라는 샤하를 포위하는 ‘포위대’로 배정받게 되었다.

포위대의 역할은 간단했다.

샤하 안에 고립된 제사장들이 알아서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외부에서 진을 치고 심리적, 물질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

효과는 뛰어났다.

벌써 며칠째 샤하를 둘러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약한 샤하민들은 저항의 시도조차 해 볼 생각도 못 하고 성안에만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샤일라, 슬슬 교대하지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하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샤하만 쳐다보고 있으니 시간 가는 것도 모를 만하지.”

“제사장 놈들, 이쯤 됐으면 슬슬 항복하고 알아서 길 것이지 뭘 믿고 저렇게까지 뻗대는 거야?”

“흐흐, 뻗댈 수 있을 때까지 뻗대 보라지. 어차피 이번 반란만 끝나며 이젠 ‘샤하’가 아니라 우리 ‘칼리프’ 민족들이 모두 제사장이 될 테니까.”

“크크, 불쌍한 녀석들. 그나저나 ……?”

“……?”

“……?”

온종일 경계 근무가 주 업무인 샤일라는 동료와 시답잖은 잡담이나 나누며 슬슬 근무 교대에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분명히 눈앞에선 입 모양이 뻐끔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샤일라는 동료의 말을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다.

‘이거 갑자기 왜 이래?’

그리고 그것은 비단 동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 또한 붕어처럼 입은 뻐끔거리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설마?’

오싹한 침묵.

그 순간, 샤일라의 팔뚝에 기분 나쁜 소름이 돋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근방 전체가, 아니 이 일대 전체가 소름 끼칠 정도로 조용해졌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마치 세상에 소리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샤일라는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사물의 모든 것, 이를테면 늘 들려오는 밤의 사막의 바람 소리 같은 것들조차 들리지 않자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려던 순간, 샤일라는 눈앞의 시야가 점점 더 아래로 꺼져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바닥이 꺼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들이 딛고 있는 모랫바닥이 마치 늪지대가 된 것처럼 천천히 자신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

모래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던 자신의 동료도, 코앞에 마련되어 있는 휴식용 테이블도, 침낭도, 보급품들도 모든 것이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왜! 왜! 다리가 왜 안 빠지는 거야!’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개미지옥처럼 빨려 들어가는 모래 늪을 빠져나올 순 없었다.

더불어 목소리까지 나오지 않는 상황.

그렇게 샤하를 둘러싸고 있던 베네딕의 포위군은 거짓말처럼 모두가 모래 속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끝인가?”

그리고 새카만 밤하늘 위에 떠 있는 한 명의 남자.

그는 천천히 모래 속으로 사장되어 가는 포위군을 보며 미처 사장시키지 못한 포위군이 없는지 꼼꼼히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됐네.’

베네딕과 관련된 놈들을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모두 모래 속에 파묻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헨리.

헨리는 칸과 제사장들에게 약속했던 대로 마법으로 포위군 전체를 제거했다.

그리고 오싹하기까지 할 정도로 그 압도적인 힘에,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칸과 제사장들은 차마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 * *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모드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베네딕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그가 품속에서 텔레포트 스크롤을 꺼내 부욱 찢어 보이자 번쩍이는 광명과 함께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건방진 놈 같으니.’

원래대로라면 산맥에 둘러진 환술 결계 때문에 이동 스크롤조차 사용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모드레드의 경우엔 ‘라의 검’이라고 불리는 베네딕이 특수한 해금 장치를 그에게 주었기 때문에 이동 스크롤의 사용이 가능했다.

그가 모습을 감춘 뒤,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있던 베네딕이 나지막이 불만을 토로했다.

‘왕의 증표를 되찾을 때까지만이다. 증표가 내 손안에 들어오는 순간, 아서스 네놈과의 인연도 끝이다.’

꽤나 오랜 시간에 걸쳐 아서스 공작 측과 접촉해 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랜 숙원이었던 칸 왕조로부터 왕권을 찬탈하고 사막의 무신인 자신이 샤하트라의 진정한 통치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베네딕은 외부의 권력자인 아서스와 결탁하여 꽤나 오랫동안 이번 반란을 준비해 왔다.

그리고 반란은 성공했다.

왕의 증표를 되찾지는 못했으므로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지만 이를 대비하여 아서스와 결탁한 것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 결탁에 대한 대가가 공짜는 아니었다.

아서스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왕족들에게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힘인 ‘야누스의 권능’을 요구해 왔다.

죽음을 관장하는 야누스의 힘.

말은 하지 않았지만 베네딕은 아서스가 왜 야누스의 힘을 원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가 원하는 것을 넘겨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예상은 했지만 막상 직접 전해 듣게 되니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군.’

원탁에 혼자 남게 된 베네딕은 불끈 솟은 힘줄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분노를 다독였다.

이리될 것이란 건 진작에 예상하고 있었다.

헤라리온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백작놈들에게 왕가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협상이 결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전령을 보내지 않은 백작들의 건방짐에 화가 났다.

‘내 반드시 그놈들 전부 목을 쳐 보이겠다.’

베네딕은 그런 남자였다, 자신 이외에는 모두가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상을 가진.

그렇게 한참이나 화를 다독이던 베네딕이 말했다.

“슐라!”

“예, 전하.”

“병사들을 집결시켜라.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내가 직접 나서도록 하겠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베네딕은 이미 샤하트라의 새로운 왕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왕의 명령을 받든 슐라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베네딕의 전쟁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 * *

사흘 뒤.

북동쪽 샤하트라 협곡의 입구에는 정복 전쟁 이후, 유례없는 숫자의 군사들이 집결되었다.

이들의 정체는 세 백작가로 구성된 제국의 토벌군.

토벌군의 집결지는 며칠 전에 세워 두었던 임시 주둔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소문에는 추가로 천 명씩 모았다더니, 역시 편자를 넉넉히 확보해 두길 잘했군.’

얼핏 보아도 가문당 5천의 숫자가 넘는 대군이었다.

5천의 숫자는 제국의 정규군과 비교하자면 얼마 되지 않는 숫자였지만 사병들이라고 생각하면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대군이다.

‘테리온이 5천, 오스카가 5천, 그리고 쇼난군이 1천이라…….’

도합 1만이 넘는 숫자였다.

하지만 그에 비해 쇼난군은 고작해야 1천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아이젠이 약간의 초조함을 드러냈지만 그럴 때마다 헨리는 청산유수 같은 달변으로 그를 안심시키곤 했다.

본격적인 출정에 앞서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헨리는 먼저 준비해 온 마법 편자들을 보급해야 했으며, 수뇌부 회의를 거치기 전에 전체적인 계획들을 아이젠에게 충분히 교육시켜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본적인 준비들을 끝낸 헨리가 아이젠과 함께 총지휘관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척!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해진 막사에 얼굴을 내밀자, 아이젠을 기다리고 있던 각 군의 지휘관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젠을 맞이하였다.

“앉지.”

척!

수뇌부 회의에 모인 이들은 최소가 ‘천부장급’ 인사들이었다.

천 명의 병사들을 지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 천부장.

천부장 대부분이 제국군에서 은퇴한 노련한 기사이거나 용병계에서도 대접을 받는 S급 용병들이 대다수였다.

모두들 하나같이 중무장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위용이 넘치는 갑옷 위로는 갑옷만큼이나 연륜으로 가득한 얼굴들이 근엄한 표정들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아이젠의 뒤편에 서서, 그들의 얼굴을 쭉 훑어보던 헨리는 생각했다.

‘별 볼 일 없는 놈들 투성이로군.’

사병 중에서 천부장의 직함은 분명히 엄청난 위치이긴 했다. 각 군의 규모가 5천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제국군에서 천부장은 중간 지휘관 정도밖에 되지 않는 위치였다.

게다가 천부장 대다수가 급하게 섭외된 용병이거나 은퇴한 기사들이었다.

그러므로 저 중에서 백작들이 직접 제국군에서 스카우트해 온 이들은 고작해야 소수에 불과했다.

‘병사들 지휘용은 쓸 만하겠어.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물론 아무리 헨리 눈에는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한들 병사들을 지휘해야 할 저들의 역할은 막중했다.

게다가 이번 토벌이 성과를 관리해야 하는 경쟁 체계이긴 했지만 성과에 눈이 멀어 협동하지 않는다면 1만의 대군은 순식간에 전멸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직접적으로 병사들을 지휘해야 하는 일들은 저들에게 미뤄 두고 최대한 자신의 별동대를 활용하여 아이젠의 공적을 쌓아 올릴 생각이었다.

“그럼 지금부터 작전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헤라리온까지 참석한, 첫 번째 수뇌부 회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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