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97화 (97/522)

# 97

밀약 (2)

‘보나 마나 비람 그놈 짓이겠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쇼난군의 진영 안에 있던 헨리였다.

그런데 천막을 나서자마자 눈앞에 협곡이 생겨났다는 것은 환술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샤하트라 민족은 마법 대신 ‘환술’이라는 특별한 힘을 사용하는 민족이었으니까.

게다가 이처럼 방향이 하나뿐인 길목을 보여 준다는 것은 누군가를 초대할 때나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이에 헨리는 기꺼이 초대에 응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 왜 하필 나일까?’

궁금했다.

전생의 자신이었다면 칸과의 인연은 물론이고 대제사장인 비람과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현생의 자신은 아직 비람과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

그럼에도 비람이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는 하염없이 협곡 사이를 걸었다.

어차피 방향은 정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비람이 의도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환술이라니, 참 오랜만에 겪어 보는군.’

샤하트라 민족의 환술.

그 원리가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도 없었을 뿐더러 민족 특유의 고유한 능력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베일에 싸인 힘이었다.

그래서 헨리가 통일 전쟁을 벌일 무렵, 무신도 무신이었지만 이 제사장 놈들의 환술 때문에 또 다른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뭐, 나중엔 결국 파훼법을 찾아내긴 했지만 말이야.’

전쟁이 길어지면서 결국엔 환술의 파훼법을 찾아내긴 했다.

하지만 그쯤에 칸이 굴복하는 바람에 써먹어 보지는 못하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굳이 파훼술을 펼치지 않고 비람이 의도하는 대로 발걸음을 옮겨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걸은 지 얼마 뒤, 헨리는 협곡의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막다른 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휘오오오.

다시금 휘몰아치는 바람.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눈앞의 풍경들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술이 무너짐과 동시에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헤라리온 칸 3세였다.

헨리와 눈을 마주친 헤라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말했다.

“먼저 동의도 없이 이렇게 모셔 온 점에 대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비록 속국의 왕이기는 하였으나 그는 기본적으로 예의범절이 몸에 배어 있는 사내였다.

이에 헨리가 똑같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 덕분에 대제사장님의 환술을 구경할 수 있어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의 환술임을 알고 계셨습니까?”

“현재 이곳에는 마법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는 것은 필시 환술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침착하고 현명하신 분이시군요.”

“저를 아십니까?”

“저뿐만이 아닙니다. 이는 비람 대제사장도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비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헤라리온이 비람에게 동의를 구하자 어둠 속에서 사람의 인영이 그려지기 시작하며 비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빛으로 물든 길쭉한 수염과 같은 색의 장발을 뒤로 멀끔하게 넘긴 노신사.

그는 샤하트라 특유의 수트라를 입고 있었지만 제사장이라는 신분 때문에 보통의 것보다 좀 더 화려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대제사장, 비람이라고 합니다.”

“쇼난가의 가신, 헨리라고 합니다.”

비람의 등장에 헨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이윽고 헨리가 물었다.

“혹시 더 나타날 분이 계신다면 그냥 한꺼번에 나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하, 비람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놀라시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눈앞에 뻔히 보고 있는데도 속아 넘어간다는 게 환술이라더니, 역시 소문대로 대단한 힘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반응이 너무 담담하신 것 아닙니까?”

형식적인 인사들이 오고 갔다.

헤라리온은 과거에 보았던 것과는 달리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윽고 헤라리온이 말했다.

“헨리 공, 이미 이곳까지 모셔 온 마당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좀 우스운 모양새지만 혹시 조금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일개 가신 따위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 건진 모르겠지만 넘쳐 나는 것이 시간이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헨리 공께선 스스로를 너무 낮추시는군요.”

“사실을 나열했을 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때였다.

서로가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헨리는 순간, 미소 짓는 헤라리온의 어깨 너머로 거대한 눈동자와 같은 잔상을 보았다.

‘저건 대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의 잔상은 더욱 뚜렷해졌으며 그 모습은 마치 금으로 수놓인 거대한 눈동자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순간, 헨리는 그것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번쩍!

순간의 광명.

그러나 실제로 방 안에는 조금의 빛도 번쩍이지 않았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광명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좀 전에 보았던 금색의 눈동자는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좀 전엔 대체 뭐였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잠시간 눈을 감았던 헨리를 보며 헤라리온 또한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잠깐 동안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라의 눈동자’라고 불리는 태양신의 위대한 권능들 중 하나였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는 ‘라의 눈동자’.

아직은 완전히 그 힘을 깨우친 것은 아니었지만 헤라리온은 라의 눈동자를 통해 헨리의 내면에 깃든 거대한 영혼을 엿볼 수 있었다.

이어지는 잠깐의 침묵.

이에 먼저 입을 연 것은 헤라리온이었다.

“……모쪼록 이 자리에 헨리 공을 모시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적인 거래를 부탁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사적인 거래,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들어 보고 내키지 않으면 얼마든지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일단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이거, 어떤 거래를 제안하실지 몹시 궁금하군요.”

몹시 궁금했다.

세 백작이 토벌을 두고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특정 가문의 사람을 불러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쇼난가를 가장 신뢰하고 있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 전에 사실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실 말입니까?”

“저는 현재 아이젠 백작과 삼대가문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사실입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저 또한 알려진 사실들을 바탕으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오베르 후작이 추방당했다는 소식은 물론이고 과거에 아이젠 백작이 중앙귀족파였다는 사실까지도 말입니다.”

‘녀석, 제국 정세엔 관심 없는 척하더니 제법 공부를 좀 했군.’

국정 운영에도 빠듯해 보였던 이가 바로 헤라리온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제국 정세를 훤히 꿰고 있음과 동시에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참으로 대견할 따름이었다.

이에 헨리가 가면을 쓴 것처럼 조그마한 미소를 띠어 보이며 말했다.

“딱히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언급할 이야기들은 저와 비람 대제사장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비밀은 지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체 어떤 비밀이기에 이리도 뜸을 들이는 것일까?

이윽고 헤라리온의 입이 열렸다.

“이번 반란의 배후에 아서스 공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

“단순한 추측이 아닙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서스 공작 측 사람과 베네딕 칼리프가 몰래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꽤 오랫동안 인지해 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한번 베네딕이 몰래 사막을 벗어난 적이 있는데, 그가 돌아온 직후에 바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클레버를 통해 혼자서만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사실이, 헤라리온은 진작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칸이 알고 있을 정도라면 꽤 오랫동안 준비해 온 내란이었겠군.’

이에 헨리가 수축된 동공을 원래대로 되돌린 후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하필 저에게 이러한 사실을 말씀해 주시는 겁니까? 비록 과거의 일로 백작님과 삼대가문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는 하나, 권력 앞에서 영원한 적은 없는 법. 이번 토벌전을 계기로 백작님께서 대후작으로 승작하면 백작님 또한 삼대가문의 일원이 되실 텐데, 그때는 어쩌려고 이러한 말씀을 제게 하시는 겁니까?”

“일원이 되는 것뿐이지 동료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예?”

“솔직히 말해서 이번에 추방된 오베르 후작에 대한 일, 저는 이 모든 것이 다 헨리 공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이젠 백작의 능력에 대해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의 별명은 겉모습만 화려한 멍청이가 아닙니까? 그런 자가 전략가로 유명한 오베르를 고발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깁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요. 사교계에서 백작님은 이미 ‘잠룡’이라는 새로운 별명으로 불리고 계십니다. 말인즉슨, 백작님은 여태껏 칼을 갈고 계셨던 것입니다.”

“헨리 공.”

“예, 전하.”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평생토록 곁에 두지 않던 가신을, 그것도 고작해야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를 넘긴 어린 청년을 가신으로 둘 만큼 쇼난가가 작은 가문도 아니고요.”

허를 찔리고 말았다.

헤라리온은 몇 가지의 사실들을 근거로 헨리의 말문을 멋지게 틀어막은 것이다.

이에 헨리는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할 만큼의 외통수에 몰리자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몇 개의 사실만으로 여기까지 추론해 내다니, 그래도 호랑이 새끼라는 건가.’

과연 무적이라고 불리던 무신 헤라볼라의 핏줄이었다.

헨리는 웃으면서 자신의 의표를 찌른 헤라리온에게서 헤라볼라의 잔상이 보이는 듯했다.

‘더 이상의 둘러대기는 무의미하겠군.’

상대의 수준을 알았으니 그에 합당한 수준을 제공하는 것 또한 예의였다.

이에 헨리가 실소를 웃음으로 바꾸며 말했다.

“이거…… 더 이상 둘러댔다간 제 낯짝만 화끈해지겠군요. 대단하십니다, 전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헨리 공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젠 속 시원히 터놓고 여쭤볼 수 있겠군요. 전하, 저에게 제안하고 싶으신 거래가 무엇입니까?”

더 이상 감출 것이 없으니 속 시원하게 패를 까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헤라리온이 말했다.

“대화가 빨라서 좋군요. 저는 이번 토벌을 계기로 제 사람과 아닌 사람을 완전히 구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동안은 정에 이끌려 확실하게 대처하지 못했지만 이미 왕궁은 전복되었고, 왕권은 금방이라도 찬탈당하게 생겼습니다.”

“반역자들에 대한 확실한 제거를 요구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어차피 토벌에 성공하고 나면 왕궁에는 피바람이 불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토벌에 성공하고 난 직후, 속국이라는 형식적인 관계를 떠나 쇼난가와 직접적으로 손잡고 싶습니다.”

“황제 폐하 몰래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흐음…….”

단순히 연을 맺자는 말처럼 들렸으나 이는 듣기에 따라 반역을 도모하자는 언사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헨리는 그가 무슨 이유에서 손잡자고 하는지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서스의 몰락이라…….’

헤라리온의 목적은 배후로 군림하고 있는 아서스 공작에 대한 복수였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동료를 얻은 기분이었다.

‘똑똑한 녀석 같으니.’

무서운 통찰력이었다.

이것은 헤라리온이 헨리의 진짜 정체를 알았기에 이러한 제안을 내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번 사건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그저 아이젠의 앙금이라는 조그마한 미끼를 이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못 본 사이에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군. 이젠 과거의 앙금도 이용할 줄 알 뿐만 아니라 상대의 진짜 힘을 꿰뚫는 통찰력까지 갖추었어.’

헨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환생한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를 칭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헨리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위로 솟았다.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아서스를 제거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헤라리온 같은 능력 있는 남자와 동맹을 맺어 둔다면 반드시 먼 훗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헨리가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지 않은 채 대답을 늘어놓았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가 맺어졌다는 것은 오직 저 혼자만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헨리 공의 마음을 얻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전하, 이것은 부탁이 아닌 거래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물론입니다. 저의 제안을 받아 주신 만큼 저 또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혹,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원하는 것은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을 전하께서 들어주실 수 있을지 고민이군요.”

“라의 이름 앞에 맹세하겠습니다. 어떠한 부탁이든지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젠이 보기 좋은 허수아비라는 사실이 탄로 났으니 이제는 욕심을 감추지 않아도 되었다.

특히 그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이 걸린 거래라면 더더욱 말이다.

“라의 아드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였으니 그보다 더욱 확실한 약속도 없겠군요. 좋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그러셨듯이 저 또한 지금부터 말씀드릴 이야기는 반드시 여기에 있는 세 사람만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라의 이름 앞에 맹세하였으니 마음 놓고 말씀하시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원하는 것은 바로…….”

헨리는 곧 원하는 것을 말했다.

그러자 여태껏 침착한 모습을 보였던 헤라리온의 미간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곁에서 함께 듣고 있던 비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