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두 번째는 확실하게 (6)
“으으읍!”
떨어지는 케일.
사지가 얼어붙어 주문을 맺지 못하고 입이 얼어붙어 주문을 외우지 못한다.
마법을 부리는 것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이 봉인된 케일은 아무런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아래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슈아아아!
중력의 법칙에 따라, 케일은 아래로 떨어질수록 가속도가 붙어 더욱더 빠른 속도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케일은 주마등을 보았다.
평생을 죽도록 노력해 오며 지금의 자리에까지 도달한, 피나는 노력으로 넘쳐 나는 노력투성이나 마찬가지였던 자신의 인생을 말이다.
눈물이 쏟아졌다.
동시에 바짓가랑이가 축축해지고, 머리맡에는 살게라의 부하들이 전시되어 있는 거대한 빙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빙산의 끝에는, 당장이라도 자신을 꿰뚫어 버릴 듯한 짐승의 송곳니를 닮은 얼음 기둥이 달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끝이구나……!’
케일은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음 기둥의 끝자락에 정수리가 닿기 직전!
“프리즘 빔.”
까드득! 까드득! 까드드득!
던져진 케일이 빙하에 부딪히기 직전, 헨리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냉동 광선을 발사해 케일을 빙산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녀석은 마탑의 일원, 넓게 보면 자신의 제자인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현명한 스승은 멍청한 제자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법이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벌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백 마디의 말보다는 한 번의 주마등이 주는 교훈이 케일을 깨닫게 하기엔 더욱 효율적이었으니까.
더불어 프리즘 빔은 상대를 초고속으로 냉동시키는 광선.
차후에 해동 과정만 잘 거쳐 낸다면 목숨 또한 건질 수 있다.
제자에 대한 체벌을 마친 헨리는, 이윽고 지상에서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는 열 명의 소드 마스터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막상 이렇게 보니 또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구먼.’
소드 마스터.
검의 길을 택한 이들이라면 죽기 전에는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검사들의 마지막 경지.
헨리는 여전히 아직 오러조차 발현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마력으로 오러를 대체해 왔는데 그럴 때마다 기사들이 가진 오러가 그렇게 탐이 날 수가 없었다.
물론 처음에 검을 잡은 이유는 맹독조차 소화해 낼 강력한 육체를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마물의 숲에서 베놈의 심장을 먹어 치우고 검술을 단련할 때마다, 헨리는 전생에서는 가져 보지 못했던 오러에 대한 욕망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전의 일등 마법사들의 둔한 움직임을 보고 다시 한 번 검을 잡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발밑에서 개미처럼 꿈틀거리는 소드 마스터들을 보고 있자니 헨리는 전생에서 느꼈던 기사들의 멍청함이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
‘그래…… 내가 기사들을 멍청한 놈들이라고 여겼던 이유. 그건 놈들이 죄다 비효율적으로 움직여서 그랬던 것이지.’
전쟁에서 결국 승리를 안겨다 주는 건 보병들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 상식을 깨부순 이가 바로 헨리였다.
헨리는 간만에 과거의 향수를 만끽하듯, 발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기사 놈들에게 마법사의 공포가 어떤 것인지 알려 주기로 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동안 검술을 연마하면서 쌓아 왔던 설움의 일부를, 지금 이 자리에서 말끔하게 해소하고자 했다.
슈우우우우…….
허공으로 떠오른 헨리는 고개를 들고 양팔을 벌려 보였다.
그러자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짙고 풍부한 마력들이 헨리의 전신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칠게 장벽을 몰아치던 기사들이 불길함을 감지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불길함.
뼛속 깊이 파고드는 찝찝함의 정체는 바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의 비명 소리였다.
쿠오오오오!
모여드는 마력에 의해 대기가 밀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여든 대기가 괴물의 울음소리처럼 괴이한 소리를 냈다.
“……도망쳐.”
“뭐?”
“도, 도망쳐야 해! 뭔가 촉이 안 좋아! 그러니까 지금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만 해!”
“대장님과 부대장님은? 그리고 마법사들까지 여기 두고 우리끼리만 도망치자고?”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분명히……!”
촉이 좋은 몇몇의 병사들의 입에서 불길함을 예지하는 경고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섣불리 도망칠 수 없었다.
그들이 만약 하급 익스퍼트 유저였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피프의 시체와 기절한 일등 마법사들, 그리고 얼음 속에 갇힌 동료들의 시체와 행방불명된 살모라 단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을 앞에 두고 도망칠 수 없다는 황궁 기사로서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생각보다 꽤나 많은 것들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멍청한 놈들. 그래서 네놈들이 멍청하다는 것이다.’
헨리는 끝끝내 우물쭈물하는 놈들을 보며 ‘역시나’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의 몸에 밀집된 마력이 광명을 터뜨리는 그 순간, 헨리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내려라.”
쿠릉, 쿠르릉!
헨리가 주문의 마지막 한마디를 외친 그 순간.
새카맣던 밤하늘에 잿빛 먹구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득 메운 거대한 먹구름들.
쿠르릉!
모여든 먹구름들은 금방이라도 한바탕 쏟아 낼 것처럼 배 속에서 천둥번개들을 곱씹어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릉, 콰르릉!
꽈르릉!
파지지지지지짓!
폭포처럼 쏟아지는 거대한 뇌전!
바다처럼 몰려든 먹구름은 서너 번의 경고사격 끝에, 마침내 자연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벼락을 지상으로 떨어뜨렸다.
“모두 도망쳐!”
뇌전이 떨어지려던 찰나, 병사 한 명이 목청껏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옆자리의 동료에게 채 전해지기도 전에,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소드 마스터 전원은 떨어진 뇌전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 *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고웬 산맥의 바닥에 거대한 빗금이 그어졌다.
그리고 갈라진 빗금 사이로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한 가련한 숨소리가 헐떡이고 있었다.
“크윽…… 크으으윽……!”
숨소리의 정체는 살모라였다.
분명히 뿜어진 오러는 검날만큼이나 얇은 것이었는데 그것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순간 은하수만큼이나 넓어져 있었다.
넓지만 칼날만큼이나 날카로운 은하수.
살모라는 은하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검을 버리고 전신에 오러를 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힘의 차이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전신에 필사적으로 오러를 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살모라는 살갗이 찢기지 않았을 뿐 거인의 손바닥에 짓눌린 것처럼 전신의 뼈가 으스러져 있었다.
타닥!
허공에서 검을 휘둘렀던 반은, 이내 고양이처럼 지상에 착지해 보였다.
그런 다음 끝끝내 살아남은 살모라에게 다가가 조롱 섞인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십검답다고 해야 되나? 설마 그 공격을 맞고도 숨이 붙어 있을 줄이야.”
“네, 네노오옴……! 설마…… 설마, 반이었던…… 것이냐아……!”
반을 발견한 살모라가 있는 힘을 끌어모아 성대를 움직였다.
꺼져 가는 촛불.
현재 살모라에게 있어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이기도 했다.
이에 반이 무릎을 굽혀 살모라와의 시선을 좁혔다.
그리고 숨소리가 희미해져 가는 살모라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지막이 대꾸했다.
“그걸 이제야 알았나?”
“어떻게……! 어떻게 이런……!”
“왜? 이런 식으로 죽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억울하기라도 한 것이더냐?”
“네놈이 감히이이……! 커헉, 쿨럭! 쿨럭!”
촛불의 심지가 다 되어 가는 듯했다.
살모라가 누운 채로 핏물을 가득히 토해 냈다.
그러나 반은 여전히 조금의 동정심도 가지지 않은 채 차갑게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대공께서 돌아가신 이후 이런 날이 찾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지. 살모라, 네놈은 감히 나를 원망할 생각도 하지 마라. 네놈 손에 죽어 나간 수십 명의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네놈은 감히 나를 원망할 자격조차 없으니까. 아, 그리고 말이야…….”
반은 마지막 말을 내뱉기 전, 시원한 밤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그리고 한층 상쾌해진 기분으로 뒷말을 이어 나갔다.
“부끄럽지도 않나, 그 실력으로 제국 십검이라는 게?”
“바아아안!”
쑤컥!
치욕스러운 물음에, 살모라는 피를 토해 내며 반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반은 더 이상 살모라의 쇳소리가 듣기 싫은 나머지, 살모라의 목덜미에 칼날을 박아 넣었다.
푸슉! 울컥, 꾸르르르…….
목젖에 박아 넣었던 검을 뽑아 들자 살모라의 목구멍에서 핏물이 솟구치고 피거품이 일었다.
통쾌했다.
그동안 이를 악물고 어금니가 부러져라 인내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속이 문드러져 가면서도 참고 참아 왔던 말들을 드디어 속 시원하게 게워 낼 수가 있었다.
이윽고 검을 뽑아 든 반은,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허공에 검을 휘휘 저어 핏물을 털어 냈다.
“후우…… 이제 겨우 한 명째인가?”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더불어 지난 몇 년 동안 오늘만큼 통쾌하고 속이 시원했던 날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겨우 한 명이라는 사실에 반의 마음은 조금 착잡해졌다.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낸 반은 헨리가 당부했던 대로 죽은 살모라의 발목을 붙잡고 헨리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원섭섭한 미소와 함께.
* * *
“끝났냐?”
“아, 형님 오셨어요?”
기어이 반은 살모라의 시체를 질질 끌고서 헨리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윽고 반이 끌고 온 시체를 헨리가 힐끗 살펴본 후 말했다.
“어후,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아예 곤죽을 만들어 놓으셨네요?”
“그러는 너는? 그 많던 기사 놈들은 다 어디 가고 이런 시커먼 놈 하나만 남아 있어?”
“간만에 실력 좀 발휘해 봤습니다.”
“너 사실대로 말해 봐. 너 솔직히 3서클 아니지? 아무리 봐도 수상한데?”
“하하, 제 능력이야 뭐, 워낙에 비범하잖습니까? 그보다 저길 좀 보시겠습니까?”
진짜 실력을 캐묻는 반의 물음에 헨리는 황급히 얼음 기둥 끝에 붙어 있는 케일을 가리켜 보였다.
이에 반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쟨 누군데 저러고 있냐?”
“벼락의 케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5서클의 마도사입니다.”
“마도사라고? 그렇게 대단한 놈이 왜 저러고 있어?”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더 비범하다고? 아무튼 저놈을 포함해서 마법사 네 명을 생포했습니다.”
“생포는 왜 해? 이번 일에는 목격자가 있으면 안 된다면서?”
“그건 지금부터 보시면 압니다.”
이윽고 헨리는 기절한 세 명의 제자를 한데 모은 뒤 손가락을 튕겨 보였다.
딱!
우지직.
파사삭!
그러자 케일이 얼어 있던 얼음 기둥의 허리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이내 헨리의 눈앞으로 떨어져 땅에 꽂혔다.
딱!
이에 헨리가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겨 보이자 꽁꽁 얼어 있던 얼음이 순식간에 녹으면서 케일을 물에 빠진 생쥐처럼 만들어 냈다.
“허어어억!”
고속으로 해동된 케일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유에 의해 급격히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마침내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진정을 되찾게 되자 그제야 헨리가 말을 건넸다.
“정신이 좀 드냐?”
“너, 너는!”
마치 귀신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는 케일.
그러나 케일은 끝까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헨리의 너머로 목젖에 바람구멍이 난 살모라의 시체가 어렴풋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다 끝났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십검의 살모라가 죽었다.
또한 그를 포함한 십수 명의 기사들이 전멸한 것뿐만이 아니라, 마도사인 자신조차 마법 한 번 사용해 보지 못하고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이에 케일은 순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헨리는 현명하게 대처하는 자신의 제자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이에 헨리가 말했다.
“벼락의 케일이라고 했던가?”
“예, 예! 그렇습니다!”
“보다시피 살모라와 피프, 그리고 나머지 기사 놈들 전부가 죽음을 맞이했다.”
사실의 열거는 때때로 그 어떤 협박들보다 가장 강력한 협박이 되기도 했다.
헨리는 다시 한 번 케일에게 현실을 인지시켜 준 후 그의 욕망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살고 싶으냐?”
“살고 싶습니다. 부디,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죽음 앞에선 그 어떤 자존심도 내세울 수 없다. 특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마등을 겪고 온 케일에겐 더더욱 말이다.
이에 케일의 진심을 확인한 헨리가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말했다.
“좋다. 대신 조건이 있다.”
“어떤 조건이든, 무엇이든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생존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이는 케일.
헨리는 그런 케일에게 자신의 피가 묻은 단검 한 자루를 던져 준 후 기절한 제자 놈들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죽여라.”
“예……?”
“네 손으로 너의 제자들을 죽여라. 그렇게 하면 너의 목숨만은 살려 주도록 하겠다.”
케일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