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두 번째는 확실하게 (4)
“이게 무슨……?”
살모라가 사라지자 친위대를 포함한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살모라였다.
그런 살모라를 손뼉 한 번으로 사라지게 해 보인다는 것은 좀처럼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표정을 짓는 이는 다름 아닌 케일이었다.
‘바, 방금 전에 그건 설마, 강제 이동……?’
강제 이동.
상대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지정된 위치로 상대를 강제로 이동시키는 고급 이동 마법들 중 하나.
강제 이동은 이동학파 내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마법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정확한 좌표의 계산과 더불어 이동시키는 대상을 안정화시켜야 하는 이동 마법의 특성상 강제로 무언가를 이동시킨다는 것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재 마도사 케일의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헨리가 손뼉을 치는 순간 살모라의 주위로 수많은 룬어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그것을 본 케일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조용히 제자들을 불러들였다.
“조심해라! 저놈, 보통내기가 아니다.”
“보통내기가 아니라니요? 설마 저놈이 마법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마탑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대체 누구지?”
어리둥절해하는 기사들과는 달리 자신을 경계하는 케일을 본 헨리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머저리들만 모인 줄 알았더니 제법 쓸 만한 녀석도 한 명 끼어 있었군그래.’
전대 마탑주였던 만큼 헨리는 케일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벼락의 케일.
동급의 마도사들 중에서도 뛰어난 성장세를 보였었지만 전형적인 파괴광 증세 때문에 몇 차례나 마탑의 기물을 부숴 먹은 적이 있는 놈이었다.
‘강제 이동을 눈치챈 건 저놈 하나뿐인 것 같으니, 옆에 있는 놈들은 아마도 제자쯤 되겠군.’
3서클을 2등 마법사, 4서클을 일등 마법사라고 부른다.
마도사는 보통 여러 명의 일등 마법사들을 제자로 두는 편이니, 헨리의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나머지 놈들 모두 일등 마법사일 것이 분명했다.
더불어 저들은 케일의 제자일 테니 분명히 바람 원소의 순수 원소학을 전공했을 것이고 스승을 따라 번개를 다룰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리고 대부분의 번개학 놈들은 케일처럼 파괴광 증세를 보이는 법이지.’
우르릉, 쾅쾅!
바람 원소를 순수 원소학으로 택한 마법사들은, 보통 이 소리에 담긴 강력한 파괴력의 매력에 빠져 번개 속성에 손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세 명의 제자들은 케일을 따라 파괴하는 것을 즐기는 난폭한 ‘번개쟁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헨리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번개라면 헨리 또한 일가견이 있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간만에 재미있는 싸움이 되겠어.’
마법사들의 열세를 파악한 헨리는 이윽고 남아 있는 다른 기사 놈들의 인상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헨리는 나열된 십수 개의 얼굴들 중 익숙한 낯짝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피프? 살모라가 첫 번째 제자를 데리고 왔군.’
기억력이 뛰어난 헨리는 황궁에 소속된 웬만한 인물들의 얼굴들은 모두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프의 얼굴은 그 기억 속에 저장된 수백 수천 개의 인물들 중 하나였다.
‘그렇다면 조심해야 할 건 피프와 케일, 저 두 놈 정도가 되겠군.’
헨리는 살모라에게 강제 이동을 시전한 직후, 그 짧은 시간 동안 적들의 수준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이윽고 허리춤에 찼던 칼을 뽑아 든 헨리가 말했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안 싸울 거야?”
헨리의 도발에, 대장이 사라졌다는 불안감은 잠시 뒤로 잊힐 수 있었다.
이에 살모라를 대신하여 부대의 지휘권을 쥐게 된 피프가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단장님은 반드시 살아 계신다. 그러니 우리는 단장님을 믿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낸다. 모두 알겠나!”
“예엣!”
저들은 일개 용병 무리가 뭉쳐진 오합지졸 따위가 아니었다.
저들은 여태껏 수많은 상황을 가정하며 훈련해 왔고 수십 수백 번의 실전을 통해 단련되어 온 제국의 자랑이자 정예 중의 정예들이었다.
피프의 격려에, 병사들의 불안감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단결된 사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이윽고 피프가 말했다.
“진격하라!”
“와아아!”
헨리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파앙!
뭉쳐진 대기의 압력이 폭발하듯, 강제 이동에 의해 납치된 살모라는 순식간에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뒤늦게 마법에 방어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지만 애석하게도 헨리의 이동 마법에겐 효과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그 순간, 살모라의 사각지대를 노린 대검 한 자루가 화살처럼 그에게 쏘아졌다.
챙캉!
일부러 보란 듯이 던져진 대검을, 살모라는 가볍게 쳐 냈다.
그리고 대검이 뻗어진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난생처음 보는 종류의 미남자가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살모라.”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흐흐, 이건 이것대로 꽤나 즐겁구먼.”
“뭐라고?”
“가타부타 말이 많구나. 부하들의 시체를 찾으러 왔으면 재깍재깍 검이나 휘두를 것이지, 대체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냐?”
마치 자신을 훤히 안다는 듯이 말하는 미남자에게, 살모라는 더러운 기분이 듦과 동시에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아는 놈이라고? 나는 저놈을 처음 보는데?’
몇 번이나 기억을 되새겨 보았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 저런 미남자는 없었다.
이에 반이 허허 웃으며 말했다.
“혼란스러운 모양이로군. 네가 만약 나를 쓰러뜨린다면 내가 누구인지 알려 주도록 하마.”
“그 말…… 금방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선전포고를 교환한 뒤, 반은 이내 곧 미소를 거두고 삭여 두었던 분노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십검의 살모라.
현재의 제국 십검은 모두 ‘친중앙귀족파’들로 채워진 상태.
그들은 모두 개국공신들이 처형장에 오를 때마다 공신들의 처형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솔선수범하여 개국공신들을 잡아들였던 놈들이기도 했다.
특히 살모라는 오베르 후작의 마음에 들기 위해 십검들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인물, 다시 말해 죽여 마땅한 놈들 중 하나였다.
이윽고 검을 뽑아 든 반이 오른손으로 검을 쥐어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속에 삭여 둔 분노로부터 엄청난 양의 살기를 모조리 개방시켜 낼 수 있었다.
휘오오오!
살기를 개방시켰을 뿐인데 그의 주변으로 서슬 퍼런 바람이 부는 듯했다.
살모라는 전신에 돋아난 소름과 함께 등줄기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큭! 무슨 놈의 살기가 이리……!’
엄청날 살기였다. 자신의 기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대체 누구지? 이 정도 살기를 가진 인물이라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눈앞의 미남자는 척 보기에도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인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기백을 월등하게 앞서는 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정도 실력자를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겁을 먹었다거나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모조리 제거할 뿐.
이에 살모라는 압도되는 기백을 억누르기 위해 오른쪽 발을 들어 바닥에 강하게 굴려 보였다.
쾅!
단단한 산맥의 바닥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발끝에서부터 푸른색 오러가 살모라의 전신을 덮쳤다.
화르륵!
제국 십검. 제국에서 열 번째로 강한 검사라는 뜻에서 내려진 호칭.
제국에서 살모라가 가지는 위치는 한없이 높은 곳에 있었다.
불꽃처럼 전신에 피어오른 오러는 이내 곧 폭발하듯이 자신의 몸집을 불려 냈다.
그러나 거대해진 오러는 다시금 잠잠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곧 매끈한 풀 플레이트 아머가 되어 살모라의 전신을 뒤덮었다.
이어서 살모라는 뽑아 든 검날에도 오러를 씌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검날에 씌우는 오러는 정갈하게 내려앉은 갑옷 위의 것과는 달리, 불꽃처럼 타오르는 날것의 형상을 그대로 두었다.
‘오랜만에 보는구먼.’
불꽃처럼 타오르는 검기는 얼핏 보면 단순한 불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사실 하나의 동물을 모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뱀.
한없이 나풀거리는 살모라의 검기는 마치 뱀이 몸을 흔들듯이 검날에 들러붙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이에 반이 말했다.
“고작해야 뱀 새끼 주제에, 똥폼은…….”
츠즈즈즛.
살모라의 재주를 지켜보던 반은 이제 슬슬 자신의 검날에도 오러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반의 칼날에 덧씌워진 오러가 자꾸만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창 자루를 연상케 할 만큼 검신이 길어졌을 때, 반은 그제야 오러를 정립시키며 매끈한 칼날의 형상을 띠어 보였다.
창처럼 길어진 칼날. 반의 준비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너라.”
준비를 마친 반이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손가락을 까딱거리듯이 검날을 흔들어 보였다.
그 건방진 행동에, 푸른 구렁이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네놈을 시작으로 쇼난 가문 전체를 찢어발겨 주지.”
정체를 알 수 없으니 분노의 칼날은 결국 아이젠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살모라는 바닥을 박차고 순식간에 앞으로 뛰쳐나가 전방을 향해 크게 검을 휘둘렀다.
슈캉!
날카롭게 그이는 곡선.
그러나 검의 궤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다.”
목소리가 들린 곳은 위쪽이었다.
반은 이미 허공으로 뛰어오른 뒤 하늘에서 살모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흡사 구렁이를 사냥하는 매의 눈빛.
반의 검이 살모라의 머리를 향해 내질렸다.
카앙!
2개의 검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뱉으며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살갗을 찢으려는 매와 그것을 저지하려는 뱀.
검을 맞부딪힘으로써 반은 실로 오래간만에 살모라의 힘을 느껴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일합이 이루어지는 동안, 반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내비치고 말았다.
‘녹슬었구나!’
이에 반은 검날에 체중을 실어 한 번 더 살모라의 검을 강하게 짓눌렀다.
격돌하는 2개의 오러.
그러나 힘겨루기는 길어지지 않았다.
반은 팔뚝의 무지막지한 근력을 이용하여 맞부딪힌 검을 무게중심 삼아 공중으로 크게 도약해 냈다.
슈우우욱!
마치 묘기를 부리는 듯한 몸동작.
그러나 같은 묘기를 부리더라도 반이 부리게 되면 그것은 진기가 되고, 기술이 된다.
반은 폭발하한 근력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은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만큼 높은 곳으로 치솟아 올랐다.
비상하는 매.
몇 미터나 되는 높이를 올라간 반은 이윽고 자신을 쳐다보는 구렁이와 두 눈을 마주쳤다.
“기사가 수련을 게을리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느껴라!”
이윽고 반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머리보다 훨씬 더 높게 치켜들었다.
해는 이미 저물었고 고웬 산맥의 하늘에는 새카만 밤이 드리웠다.
반은 치켜든 검날 위로 절제해 두었던 오러를 빠른 속도로 주입하기 시작했다.
츄주주주죽!
창만큼이나 길어졌던 검신은 그 끝을 모르고 더욱 빠른 속도로 몸체를 늘려 가기 시작했다.
마치 손오공의 여의봉이 늘어나듯, 푸른색 오러 줄기는 끊임없이 길어졌고, 마침내 하나의 수평선이 되어 고웬 산맥의 밤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내고 있었다.
밤하늘을 이등분하는 한없이 길고 아름다운 능선.
이윽고 수평선이 완성되자 허공에 머물렀던 반의 몸체가 지상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리 위로 치켜든 검을, 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지상을 향해 그어 냈다.
부우우웅!
마치 레이저가 지나가듯, 푸른 수평선은 그렇게 휘둘렸다.
그리고 푸른 수평선이 지상으로 떨어지려던 찰나, 살모라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 이 기술은……!”
흡사 은하수가 떨어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었던 제국에 단 하나뿐인 비기.
이 기술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했다.
“은하수 내리……기!”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거대하고 푸른 은하수를 보며 살모라는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은하수 내리기를 사용하는 제국 유일의 검사, ‘반’의 존재를 말이다.
번쩍!
고웬 산맥 위로 푸른 은하수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