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덤 (4)
아이젠 백작에게 문케를 인계한 며칠 뒤, 헨리는 그제야 다시 비발디 타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빠!”
“아이고 우리 공주님, 엄마 말 잘 듣고 있었어?”
저택으로 돌아오자 두 사람을 가장 먼저 반겨 준 것은 다름 아닌 니아였다.
헤글러는 그런 니아를 번쩍 안아 들면서 함박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에 반 박자 늦게 등장한 텐이 말했다.
“어라, 반 경은 어디 가시고 두 분만 오셨습니까?”
“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두 분이 살게라로 떠났다는 말을 들으시자마자 반 경께서도 곧바로 살게라로 떠났는데…… 혹시 못 만나신 겁니까?”
자초지종을 들은 헨리는 그제야 반과 길이 엇갈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게라로 갔다면 번트에게 대충 이야기는 듣고 오겠군. 뭐, 언젠간 밝히려던 사실이었으니까 직접 듣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조금 비효율적인 방식이긴 했어도 이미 엎질러진 물. 헨리는 그냥 비발디 타운에서 반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동안 별일 없었지?”
“저희야 늘 한결같습죠. 그나저나 헨리 경이야말로 말씀하셨던 것보다 시간이 좀 더 걸리신 것 같습니다?”
“사정이 조금 있었어. 아 참, 그리고 이제부터 살게라에 보급품을 납품하는 일은 우리 천만황금에서 맡아 진행할까 해.”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페인트 상단이 중간에서 엄청 해 먹고 있더라고. 그래서 앞으로는 그냥 우리가 맡기로 했어.”
“예에? 그럼 그놈들은 어쩌고요? 맡을 땐 맡더라도 일단 제국 기관에 신고부터 해야…….”
“괜찮아, 이미 죽었거든.”
“예?”
“중간에 산적들을 만났어. 그래서 상단주는 물론이고 같이 간 용병들도 싹 다 죽었어.”
“두 분은 살아남으시고요?”
“응. 그래도 걱정하진 마, 원래 전해 주려던 보급품은 제대로 전해 줬으니까.”
상단주도 죽고 같이 간 용병단도 죽었다. 하지만 보급품은 모두 전해 줬다고 하니 무어라 할 말은 없었다.
그런데 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텐이 말했다.
“근데 말입니다, 헨리 경. 그 의뢰…… 제국기관에서 상단을 선별해서 맡긴 의뢰인데 헨리 경 마음대로 보급 상단을 바꿔도 되는 겁니까?”
“당연히 안 되지. 그래서 일단은 상단부터 꾸린 뒤에 자격을 따내볼까 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욘 없어. 어차피 언젠간 상단 하나쯤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상단……을요?”
“응. 그렇다고 해서 마차나 직원들을 따로 뽑을 필요는 없어. 어차피 살게라에 대한 의뢰는 헤글러가 맡아서 해 줄 거니까.”
“네? 제가 말입니까?”
뜬금없는 임무 배정에 헤글러가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아공간 주머니를 구해 줄 테니까 그냥 주기적으로 승마술 연습한다고 생각해. 너 아니면 맡길 사람도 없는 걸.”
‘나 말고는 맡길 사람이 없다고?’
다소 뜬금없긴 했지만 헤글러는 헨리의 마지막 말만 귀에 남았다. 그래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답했다.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됐네. 그럼 오늘은 충분히 쉬도록 해. 헤글러도 먼 길 다녀오느라 고생 많았으니까.”
“용병 길드에는 제가 다녀올까요?”
“아니, 용병 길드는 내가 다녀올게. 넌 상인 협회로 가서 천만황금 소속의 ‘밀리언 상단’을 새로 등록해 줘.”
어차피 반이 돌아올 때까지 다른 일을 진행할 수도 없었다.
헨리는 그 틈에 천만황금 산하 조직인 밀리언 상단을 개설하고 아공간 주머니 같은 필요한 물품들을 구비해 놓기로 했다.
헨리는 다른 잡다한 일을 처리하기 전에 가장 먼저 용병 길드부터 들르기로 했다.
“그럼 쉬고들 있어.”
* * *
헨리는 용병 길드에 도착하자마자 보통의 접수처가 아닌 지부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
“들어오세요.”
길드의 최고 책임자답게 지부장은 업무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가로이 소설책이나 읽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지부장은 읽고 있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으로만 손님을 맞이했다.
이에 헨리가 가까이에 있는 의자를 발로 차 지부장의 책상을 맞추었다.
콰직!
날아간 의자는 책상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이에 지부장은 놀란 토끼눈을 하고서 그제야 헨리를 쳐다보았다.
“누, 누구십니까?”
아무리 용병 길드의 지부장이라고는 하나 그는 진짜 용병출신이 아닌 평생을 주판이나 튕기던 한낱 공무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헨리는 지부장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이번에는 의자를 들어 지부장의 머리맡에 던져 보였다.
콰지직!
“히, 히이익!”
헨리는 자신의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가 겁에 질려 숨도 쉬지 못하게끔 마음껏 살기를 풀어헤쳤다.
지부장의 얼굴에 백색의 공포가 가득했다. 핏물이 빠져 창백해진 지부장에게, 헨리가 다가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알고 있었지?”
“뭐, 뭐가 말입니까? 그, 그보다 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살게라로 보급품을 호송하는 페인트 상단 말이야.”
“페, 페인트 상단? 아, 아! 그, 그럼 당신이 혹시……?”
“내가 누군지는 알 거 없고. 너 알았어, 몰랐어?”
“뭐, 뭘 말입니까, 대체!”
다짜고짜 다그치는 헨리의 물음에 지부장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에 헨리는 다시 한 번 의자를 들어 올렸다.
“자, 잠깐만요! 다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의자 좀 놓고 이야기 합시다! 네?”
필사적인 매달림. 그가 거의 기듯이 부탁을 하자 헨리는 그제야 의자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려놓은 의자에 걸터앉은 뒤 지부장과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페인트 상단이 물자호송을 나갈 때마다 호위를 맡은 용병단이 세 번에 두 번 정도는 무조건 궤멸해서 돌아왔다. 그런데도 상단주는 멀쩡하고 여전히 같은 의뢰를 진행했다. 그것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말이야.”
헨리의 살기는 이제 거의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 정도 살기라면 맹수조차 겁을 집어먹고 도망칠 정도였다.
이윽고 헨리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넌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지?”
“죄, 죄송합니다! 딱히 별말이 없기에 그냥 괜찮은 줄로만 알고……!”
상단의 민낯이 벗겨지자 지부장은 그제야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아래로 처박아 보였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공무원이란 놈이 감히……!’
헨리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뒤룩뒤룩 살이 찐 지부장을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일이 서너 번만 일어나도 지부장이 직접 의심을 갖고 페인트 상단에 대한 감사를 실시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놈은 귀찮다는 핑계로 이 일을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윗선의 강압이 있었다면 진작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발뺌했겠지. 그러니 이번 일은 순전히 지부장의 잘못이 맞다.’
사람은 궁지에 몰렸을 때, 보통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잘못부터 들추어 낸다. 특히 지부장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면 그러한 성격이 더더욱 심했다.
하지만 지부장이 그러한 핑계를 대지 않았다는 건 이번 일은 순전히 지부장의 근무 태만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에 헨리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지부장.”
“예, 예!”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직접 상부에 보고해서 네놈 목을 잘라 버릴 테니 그리 알아라.”
“무, 물론입니다! 당연하죠! 당연하고말고요!”
“그리고.”
“예, 예! 말씀만 하십시오!”
“페인트 상단은 궤멸했다. 의뢰는 성공적으로 끝마쳤으나 상단과 하운드 용병단이 궤멸했으니 새로운 상단이 이 일을 맡아야만 한다. 그러니 앞으로는 천만황금 소속의 밀리언 상단이 이 일을 맡도록 한다.”
“예, 예? 하, 하지만…… 기관에서 의뢰를 위탁시키는 건 저희가 아니라 상인 협회 쪽 일인데…….”
“그래서? 못 하겠다고?”
“아, 아닙니다! 제가 마침 상인 협회장과도 친분이 있으니 알아서 처리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까지 저택으로 서류를 구비해서 보내라.”
“예, 예! 알겠습니다!”
역시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다. 손쉽게 물자 보급 의뢰를 인계받은 헨리는 이윽고 아공간 주머니를 구하기 위해 도시의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히람은 살모라의 조언에 따라 마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탑은 황궁 옆에 위치해 있었는데 인생의 대부분을 제국군에서 보내온 터라 마탑의 방문은 그 또한 이번이 처음이었다.
‘꿀꺽.’
마법사를 몇 번 본 적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나 많은 마법사들이 거주하는 곳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히람은 낯선 환경 때문인지 조금 긴장하기 시작했다.
‘듣기로는 마법사들은 순 이상한 놈들 천지라던데…….’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지식인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너무 많은 것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은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들이 많다거나 괴짜들이 많다는 말들이 소문처럼 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겁먹을 순 없었다.
자신은 자랑스러운 바이퍼 기사단의 제5부대장이었으며 살모라 단장에게 직접 선택받은 남자였으니까.
이윽고 긴 성벽을 지나, 히람은 마탑으로 들어가기 위한 입구인 마탑 위병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도착한 위병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사람의 인기척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했다. 히람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끝에 성문 중앙에 위치한 짤막한 돌기둥과 그 위에 놓인 책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책?’
황궁 기사단원인 만큼 히람 또한 글을 읽을 줄 알았다.
히람은 책자의 제목을 살펴보았다.
-면회자의 이름을 적어 주세요.
간단한 요구 조건.
표지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게다가 옆에는 펜 한 자루도 준비되어 있었기에 히람은 살모라에게 들었던 이름을 책자 안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드라칸 로티크.
글을 읽고 쓸 줄은 알았지만 펜보다는 검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글씨체는 남에게 보여 주기 부끄러울 만큼 악필이었다.
하지만 ‘면회 명부’ 정도로 보이는 그 책자는 용케도 히람의 글씨체를 알아보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내기 시작했다.
우우웅!
책자의 이름은 ‘콜리스트’.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내부 사정을 감추기 위해, 마탑에서 개발한 사생활 보호용 아티팩트들 중 하나였다.
히람의 글자를 먹은 콜리스트가 이윽고 방문자가 요구하는 인물에게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위병소 옆쪽에 난 성벽에 조그마한 ‘포털’ 하나가 생성되었다.
“오…….”
위병도 없이 고작해야 책자 하나로 면회를 신청할 수 있다는 사실에 히람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윽고 사람 크기만 한 포털 속에서 큰 키만큼이나 긴 흑발을 가진, 창백한 피부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이름은 ‘드라칸 로티크’. 그가 바로 살모라가 추천한 비장의 마법사였다.
드라칸은 창백한 피부만큼이나 몹시 차가운 인상을 가진 사내였다.
포털에서 걸어 나온 그는 이윽고 히람을 얼마간 내려다본 끝에 작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목소리는 마치 텅 빈 인형이 말하는 것처럼 왠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졌다.
그 공허함이 왠지 모르게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히람은 단장이 소개해 준 마법사인 만큼 최대한 예를 차려서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바이퍼 기사단의 제5부대장을 맡고 있는 히람이라고 합니다.”
히람은 대답과 동시에 한 짝뿐인 왼팔을 뻗어 악수를 요청했다.
이에 드라칸은 히람의 손을 빤히 쳐다보더니 거의 손을 얹듯이 잡아 보인 후 다시 손을 뒤로 빼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히람은 그에 아랑곳없이 꿋꿋이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단장님께서 말씀하시길, 혹시 드라칸 경이시라면 얼마 전에 잘린 제 팔을 치료해 주실지도 모른다고 해서 이곳, 마탑까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살모라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저희 단장님과는 꽤 막역한 사이이신가 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초면에 용건부터 말씀드려서 좀 죄송합니다만 드라칸 경이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제 팔, 치료가 가능하시겠습니까?”
팔의 치료는 그 어떤 일보다 히람에게 가장 우선시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히람은 다소 뻔뻔한 줄 알면서도 잘린 오른쪽 어깨를 내밀어 보였다.
그러자 그것을 본 드라칸이 양쪽 입꼬리를 귀밑까지 길게 찢어 보이며 웃어 보였다.
“물론입니다.”
왠지 모르게 섬뜩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내비치는 드라칸의 말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윽고 드라칸이 말했다.
“팔을 봐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드라칸의 안내에, 히람은 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