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덤 (1)
안면을 익히고 문케를 인계하였으니 뒷일은 이제 이 일은 오롯이 아이젠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떠나기엔 묘하게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더 이용할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떠나기엔 아쉽지.’
공동의 적이 생겼다고 해서 어제의 적이 영원한 아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은 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동맹일 뿐.
언젠가는 아이젠의 목 또한 오베르와 함께 단두대에 올려야 할 원수의 수급들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아이젠은 방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칼자루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보상마저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삼았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역시 안 되겠어, 클레버.”
-예, 주인님?
“아까 전에 들렀던 보물창고 기억해?”
-금은보화가 가득 쌓인 그곳 말이죠?
“응, 위치 기억하지?”
-물론이죠!
“가서 쓸어 와.”
-네, 알겠습니다!
헨리는 클레버에게 과시용 보물창고를 쓸어 올 것을 명령했다.
어차피 과시용으로 만든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 전체를 턴다고 한들 강물에서 물 한 바가지 떠내는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창고에 있는 보물 전체를 도둑맞음으로써 그곳을 관리하는 베디칸이 문책을 받거나 다른 시종 전체가 아이젠의 의심을 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헨리가 원하는 것이었다. 자그마한 소동으로 인해 아이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
현재의 아이젠이라면 재산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보다, 철옹성 같은 자신의 저택을 한낱 도둑놈에게 희롱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참 뒤 희멀건 안개로 둔갑했던 클레버가 한 지점에 모이면서 고양이의 형상을 빚어냈다.
-냥!
“일은?”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싹 다 긁어 왔습니다!
“잘했다. 이건 심부름값.”
-이, 이건!
헨리는 영리한 고양이에게 심부름값으로 싱싱한 오이 하나를 던져 주었다.
그리고 클레버가 정신없이 오이를 탐닉하는 사이, 헨리는 체스트를 개방해 클레버가 훔쳐 온 보물들을 확인했다.
짤그락.
“확실하네.”
얼추 헤아려 봐도 몇만 골드는 족히 되어 보였다.
헨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미련 없이 비발디 타운으로 떠날 수 있었다.
* * *
피로 회복제로 여독을 푼 반은 최상급 소드 마스터다운 체력을 앞세워 예정보다 빨리 슬란 협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내뱉은 숨이 허공에서 새하얗게 부서졌다. 이제 이 협곡만 지나면 추방민들이 모여 사는 살게라에 발을 들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다른 샛길로 빠지지 않고 상인들이 이용하는 큰길을 따라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헨리와 마주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길을 잘못 들었나?’
의아함에 조금만 더 앞으로 가 보자는 생각으로 앞서 나가길 벌써 여러 번. 반은 결국 슬란 협곡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헨리를 만나지 못했다.
결국 반은 슬란 협곡의 검문소 사람들에게 헨리의 행방을 물어보기로 했다.
* * *
병사는 선 채로 졸고 있었다. 얼마 전에 보급 상단이 다녀갔으니 한동안은 방문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방에 말을 탄 사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에 잠이 확 달아난 병사는 황급히 앞으로 뛰쳐나와 창을 내세우며 말했다.
“정지, 정지. 이곳은 일반인들에겐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곳이다.”
병사가 자신을 막아 세우자 반은 그제야 말에서 내린 다음 신분 패를 내밀었다.
‘금패?’
반의 신분 패를 본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국의 신분 패는 평민들에겐 동패를, 준남작부터 백작까지는 은패를, 후작부터 공작, 혹은 황궁의 사람일 경우엔 금패를, 마지막으로 대가문이나 대공, 혹은 그랜드 마스터들에겐 백금패를 신분 패로 지급했다.
그런데 반이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금패.
병사는 신분 패의 빛깔을 발견하자마자 그제야 허리를 꼿꼿이 세워 보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죄,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높으신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야, 뭐 해? 가서 소장님 모셔 와!”
센스가 제법 좋은 병사였다. 병사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병사에게 번트의 호출을 요청했으며, 이윽고 안쪽에서부터 술냄새를 풍기는 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또? 누가 왔기에 이렇게 호들갑을…… 어?”
번트는 여전히 근무 중에 마시는 술을 끊지 못했다. 번트는 해롱거리는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와 말 앞에 선 반과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번트 경?”
“반 경?”
뜻밖의 만남.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자마자 동시에 알은체를 해 보였다. 이에 병사가 조용히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보였다.
“반 경이 아니십니까?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먼저 깍듯이 인사를 해 보인 쪽은 다름 아닌 번트였다.
황궁에서 근무하던 시절, 서열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반이 몇 수는 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이 번트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은 번트를 괜찮게 생각하고 있는 편이었다. 번트의 청렴하고 모범적인 인품은 황궁 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였기 때문이다.
거리가 가까워진 두 사람은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쪽은 다름 아닌 반이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반 경께서도 얼굴이 반쪽이 되셨습니다.”
씁쓸한 웃음과 가벼운 악수. 두 사람은 잠깐의 침묵 속에서 상대방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이에 번트가 제안했다.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말씀은 고맙지만 지금은 좀 무리일 것 같습니다. 급하게 찾는 사람이 있거든요.”
“살게라에서 말입니까?”
“혹시 요 근래에 페인트 상단이 오지 않았습니까?”
“정기 보급선이니 당연히 왔다가 가기는 했습니다만?”
“실은 그 상단의 의뢰를 맡은 용병들 중 한 명에게 볼일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용병? 혹시 헨리 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헨리를 아십니까?”
“당연히 알다마다요. 근데 두 분은 어떤 사이이기에 이 먼 살게라까지 와서 헨리 경을 찾으시는 겁니까?”
“이거…… 자세한 사정까진 말씀드릴 순 없지만 지금은 일단 헨리가 운영하는 용병단의 부단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부단장이요? 이야, 어쩐지 범상치 않은 인물 같더라니. 그렇다면 더더욱 안에서 이야기를 나눠야겠군요. 헨리 경에 대해서라면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자,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뜻밖의 만남과 뜻밖의 사연.
번트는 기쁜 마음으로 반을 검문소 안으로 들였고, 반 또한 별다른 의심 없이 그의 제안에 응했다.
이윽고 번트가 말했다.
“반 경, 혹시 술 좋아하십니까?”
* * *
대륙이 통일되고 전쟁이 종식되면서 제국은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하지만 하나의 제국으로 대륙이 통일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륙 곳곳에는 ‘군대’가 필요했다.
그래서 제국은 좀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인재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검술 아카데미를 비롯한 각종 아카데미들이 제국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많은 제국민들이 ‘살기 위해서’가 아닌 ‘꿈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제국은 더없는 힘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매년 쏟아져 나오는 인재들 덕분에 힘의 기준은 상향 평준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향 평준화가 가속됨에 따라 진정한 힘의 차이는 병장기를 잘 다뤄 내는 병장기의 숙련도가 아닌, 인간 내면에 잠재된 힘을 다루는 ‘오러’를 기준으로 당락을 결정짓게 되었다.
바이퍼 기사단 제3 부대장, 카니에.
그는 우수한 실력으로 검술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전장의 삼대 사선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아 두 가지 이상의 병장기를 다룰 수 있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가 되었다.
게다가 그의 오러를 다루는 능력은 일찍부터 그 재능이 발현되어 남들보다 월등한 속도로 성장세를 이루었다.
그 덕분에 카니에는 아직 이십 대의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황궁 기사단 중 하나인 바이퍼 기사단의 제3 부대장직을 역임할 수 있었다.
똑똑.
“들어와.”
방에 들어선 카니에가 짧게 목례를 해 보인 뒤 살모라 앞에 섰다.
모든 황궁 기사단은 최대 5개의 예하 부대를 둘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단장들은 세 번째 부대장부터 각별한 애정을 쏟으며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정성을 다하여 가르친다.
이른바, 제3 부대장부터가 단장의 진짜 수제자인 셈이었다.
그런 면에서 미루어 보았을 때 카니에는 똑똑한 막내 제자 노릇을 확실하게 해내는 남자였다.
“카니에.”
“예, 단장님.”
“잠시 살게라에 좀 다녀와 줘야겠다.”
“살게라라면…… 그 북방의 살게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리고 이번 임무는 극비리에 진행하는 임무이니만큼 결코 출정 사실이 누설되어선 안 된다.”
극비리에 진행하는 임무. 이에 카니에 또한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알겠습니다.”
카니에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살모라는 그제야 임무의 내용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너에게 3부대 전체를 배정해 주겠다. 그러니 가서 살게라에 발을 붙이고 있는 모든 것들을 지우고 와라.”
“모든 것이라면 추방민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말 그대로 모든 것이다. 아마 살게라로 들어가기 위해선 입구에 설치된 제국군 검문소가 있을 것이다. 그놈들까지 모두 죽이고 검문소까지 모두 불태워라.”
“……알겠습니다.”
추방민이라면 몰라도 같은 제국군까지 몰살시키라는 말에 카니에는 의아함이 들었다.
하지만 의아함이 들었다고 해서 감히 그 이유를 물어볼 만큼 카니에는 멍청한 놈이 아니었다.
이윽고 카니에는 스무 명에 달하는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곧장 살게라로 출정을 떠났다.
“이랴!”
목표는 살게라의 완전한 섬멸.
살게라에 갇혀 있는 추방민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관리하는 제국군들까지 흔적도 없이 지우는 것이 이번 작전의 목적이었다.
카니에는 단장이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살게라에 대한 일을 아는 자는 단장인 살모라와 임무를 수행했던 히람, 그리고 히람의 부하였던 5부대원들밖에 모르는 ‘극비 임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같은 제국군을 죽이라는 군법에 어긋나는 명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니에는 조금도 살모라를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이는 제국에서 열 번째로 강한 기사이자 자신이 평생 모셔야 할 스승, ‘살모라’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승과 상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카니에의 기사도였다.
그렇기에 살모라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심도 있을 리가 없었다.
카니에는 은밀하게 명령을 받은 만큼 신분이 노출될 만한 흔적들을 모두 지우고 살게라로 떠났다.
기한은 촉박했다. 하지만 이미 명령을 받은 이상 자신의 스승을 실망시켜 드릴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카니에는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무리한 강행군을 펼쳤다.
그리고 마침내 예정했던 기간보다 이틀이나 앞당겨 살게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수도에서 살게라에 오기까지 안장과 엉덩이가 너무 많이 부딪혀 엉덩이 가죽이 남아나지가 않았다.
카니에와 부하들은 그 지독했던 여정의 스트레스를 이제부터 무자비한 학살로 해소시킬 생각이었다.
이윽고 독기에 찬 카니에가 말했다.
“땔감이 저리 많으니 오늘 밤은 따뜻하게 잘 수 있겠구나.”
스캉!
카니에의 명령에 눈빛에 독기가 가득 담긴 부하들이 저마다 허리춤에 찬 분노의 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롭게 잘 벼려진 검이었다.
이윽고 모두는 검날에 오러를 맺어 보였다.
츠즈즈즛!
시간대는 마침 저녁이었다.
그리고 슬란 협곡의 검문소는 병사가 적고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에 식사 시간이 되면 모두가 경계 근무를 서지 않고 식사 준비에 투입되었다.
카니에는 경계를 보는 병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미간을 잔뜩 찌푸려 보였다.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돼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받지 못하는 법!’
정보에 따르면 슬란 협곡의 검문소장은 수문장이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소장으로 있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경계가 허술하다니, 카니에의 가슴속에서 더더욱 분노가 불타올랐다.
“죽여라.”
이윽고 카니에의 입에서 분노에 찬 진격 명령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