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엘라곤 (1)
헨리는 어설픈 도움은 차라리 안 해 주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헨리는 제국 건설 초기 때의 기억을 되살려 살게라에 최고의 쉼터를 지어 주고 싶었다.
헨리가 물이 있을 만한 곳의 위치를 묻자 말리던 이를 대신해 다른 사람이 대답해 주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거대한 호수가 하나 나타나긴 합니다. 그런데 웬만하면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호수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라기보단, 얼음을 깰 수가 없었던 거지요. 여기 있는 저희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추방민들이 도전해 보았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얼음이 그렇게 두껍습니까?”
“아뇨, 오히려 얼음은 매우 얇아 보였습니다.”
“예?”
“그래서 더 환장할 노릇이라는 겁니다. 호수 위의 얼음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얇은데 도무지 깨질 생각이 없으니…… 가 보면 알게 되실 겁니다.”
그래서 이곳의 추방민들은 코앞에 호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 따위를 녹여 먹으며 목숨을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그림의 떡인 셈이었다.
다른 추방민들 또한 모두가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건 그냥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지만, 먼저 와서 살던 추방민들이 그러더군요. 그 호수에는 얼음의 정령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얼음의 정령?’
일반인들에겐 전설처럼 들릴지도 몰라도, 정말로 얼음의 정령의 소행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갈 만한 현상이었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다녀와 보겠습니다.”
“살게라는 처음일 텐데 길잡이라도 한 명 데리고 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정도로 큰 호수라면 굳이 길잡이가 없어도 혼자서 충분히 찾아갈 수 있습니다. 날이 춥습니다, 그러니 안에서 기다리시지요.”
딱!
헨리가 대답과 함께 손가락을 튀기자 바닥에서 대리석으로 된 식탁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이윽고 길고 거대하며 매끈한 모습의 식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 몰라 음식을 좀 챙겨 왔습니다. 제가 호수에 다녀올 동안 간단히 요기라도 하고 계시지요.”
그러면서 헨리는 체스트에 담아 온 각종 요리들을 식탁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살게라에 오기까지 헤글러와 충분한 식사를 즐겼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요리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헨리는 기다리는 동안 요기라도 시킬 겸 남은 요리 전부를 꺼내 추방민들에게 대접했다.
“우와……!”
“밥? 밥이라고?”
“흐흐흑, 이게 얼마만의 요리냐!”
요리는 금방 식탁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이건…….”
마침내 마지막 요리를 꺼내 놓은 헨리는 이어서 감자나 고구마, 훈제 햄 같은 저장 식품들을 비롯한 각종 생필품들을 한쪽 구석에 쏟아 내기 시작했다.
와르르!
생각보다 양이 많았기에, 헨리는 가방을 거꾸로 뒤집어 챙겨 온 것들을 본격적으로 쏟아 냈다.
“다, 단장님! 잠시만요!”
이에 헤글러가 옆에 바짝 붙어 쏟아져 나오는 물건들을 정신없이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챙겨 온 물건 전부를 꺼내 놓은 직후.
“헤글러, 뒷정리를 부탁하마.”
“……알겠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식료품과 생필품.
헤글러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그러겠다고 답했다.
* * *
저택을 벗어나 일정 범위를 지나자 다시금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휘오오오!
더불어 강풍까지 세차게 불어닥치니 그야말로 눈의 폭풍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숨기고 있던 마법을 당당하게 밝힌 시점부터, 이까짓 눈보라쯤은 헨리에게 있어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외투를 입지 않아도 따뜻했고, 설피를 신지 않아도 바닥에 발이 빠지지 않았다. 마법이란 이렇게 편리한 것이었다.
저벅저벅.
헨리는 호수까지 걸어가는 내내 호수와 대저택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만약 자신이 얼어붙은 호수를 녹이게 된다면 호수의 물을 대저택까지 끌어 오는 물길을 파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호수에 도착했을 때였다.
‘확실히 크긴 크네.’
호수는 기대 이상으로 컸다.
그리고 추방민들이 말한 대로 호수 표면을 덮고 있는 얼음장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이 한없이 얇고 투명했다.
헨리는 조심스럽게 꽁꽁 언 호수 위로 올라가 보았다.
‘음.’
얼음 위를 밟고 올라서자 헨리의 발아래로 호수 속에 사는 물고기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수질은 확실하군.’
이렇게나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으니 따로 수질 검사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윽고 헨리는 발바닥에 마력을 싣기 시작했다. 그리고 실은 마력을 파괴력으로 치환시킨 다음, 있는 힘껏 얼음 바닥을 내리쳤다.
쾅!
돌바닥도 갈라놓을 만큼 어마어마한 파괴력이었다.
하지만 호수 위의 얼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헨리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더더욱 맑고 투명한 모습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확실히 추방민들이 고생할 만하네. 하지만…….’
화르륵!
생각과 함께 허공에 손을 젓자 눈앞에 불길이 치솟는 거대한 바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5서클의 파이어 스톤이었다.
헨리는 그것을 공중으로 띄웠다.
한없이 높게, 그리고 마침내 파이어 스톤이 점처럼 보일 때쯤 헨리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다음 바위에 걸어 두었던 플라이 마법을 캔슬시켰다.
마지막으로…….
“헤이스트.”
슈우우웅!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는 파이어 스톤에 가속 마법인 헤이스트를 시전했다.
엄청난 낙하 속도. 그리고.
콰아아앙!
흡사 소운석이 떨어진 듯, 엄청난 굉음과 함께 호수 전체가 진동했다.
“역시.”
떨어진 파이어 스톤은 얼음 표면을 깨부수고 몸체의 절반 정도가 끼워져 있었다.
나름대로 파괴력이 강한 마법을 시전하였는데도 피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걸 보니 확실히 얼음이 단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찌 됐든 철옹성 같은 얼음을 파괴하는 것에 성공했다.
딱!
헨리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튀기자 호수에 끼여 있던 파이어 스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바위가 끼여 있던 흔적으로 거대한 얼음 구멍이 만들어져 있었다.
헨리는 호수 물을 확인하기 위해 얼음 구멍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물을 퍼내기 위해 왼쪽 손을 구멍 속으로 뻗었을 때였다.
덜덜덜덜.
“음?”
마법으로 분명히 추위를 차단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의 왼쪽 팔뚝이 오한에 걸린 것처럼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왜 이래?’
자의가 아니었다.
마치 다른 무언가에 의해 팔이 저절로 떨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순간 헨리의 머릿속에, 자신의 왼쪽 팔뚝 안에 엘리라곤의 알을 심어 두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동시에 추방민들이 말해 주었던 얼음 정령에 대한 전설이 떠올랐다.
최상위급 물의 정령인 엘리라곤의 알과, 호수에 얽혀 있는 얼음 정령의 전설.
둘 다 물 속성이라는 것 이외에는 마땅한 접점을 찾지 못했지만, 그래도 헨리의 촉이 왠지 모를 연관성을 강렬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쩌저적!
“음?”
떨리는 팔뚝에 의해 구멍 속으로 미처 손을 넣지 못하고 있던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박살 났던 구멍이 다시금 얼어붙기 시작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현상이었다.
마치 호수 물이 헨리의 손을 거부하기라도 하듯, 얼음 표면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하게 제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동시에 왼쪽 팔뚝의 떨림 또한 멈추었다.
‘그렇단 말이지?’
덕분에 더욱 강력한 확신이 생겼다.
헨리는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오른손을 하늘로 뻗었다.
“파이어 스톤.”
쿠구구구구!
흥밋거리를 찾았으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강력한 확신을 얻은 헨리는 이번에는 1개가 아니라 무려 20개에 달하는 소운석들을 만들어 냈다.
막대한 양의 마력이 소모되었다.
하지만 마력은 언젠간 다시 채워지는 것.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호수를 파괴함에 있어 마력을 아끼지 않았다.
부웅!
소운석들이 빠른 속도로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점보다 더 작은 형태가 되었을 무렵, 헨리는 뻗었던 손을 아래로 그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헤이스트.”
콰과과과광!
헨리는 멀찍이 떨어져서 호수 전체를 박살 내는 운석의 행렬을 보았다.
흡사 세계가 멸망하듯 전신이 불타오르는 바위들이 거대한 재앙의 해일이 되어 천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충격에, 호수는 얼음 위에 쌓인 눈발을 먼지 삼아 자욱한 안개를 만들어 냈다.
덜덜덜덜.
잠시 후 안개가 걷힌 뒤, 처참하게 박살 난 호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의 왼팔이 거칠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됐네.’
호수는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더불어 호수 주변에는 파괴의 여파로 튕겨 나온 물고기들이 차가운 눈밭에서 운명을 달리하고 있었다.
타닥.
허공으로 물러나 있던 헨리가 다시 바닥으로 착지했다.
호수와 가까워질수록 떨림은 더더욱 심해져만 갔다.
쩌저저적…….
박살 난 호수는 다시금 빠른 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수 전체를 박살 냈으니 복구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헨리는 그 틈에 얼른 호수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퉁.
발을 구르자 마력이 연기처럼 솟아 헨리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시전된 마법은 수중 호흡과 전신 방수 같은, 잠수에 꼭 필요한 생활 마법들이었다.
이윽고 헨리는 호수 표면이 다시 얼음으로 덮이기 전에 서둘러 물속으로 들어가 몸을 담갔다.
쩌저저적!
헨리가 호수 속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수의 표면은 다시 굳건한 철옹성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 * *
부르륵. 부르르륵!
날숨을 뱉을 때마다 기포가 위로 올라갔다.
호수 내부는 대낮처럼 밝았다. 맑고 투명한 얼음 표면 덕분에 햇빛이 그대로 투과되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마법으로 몸을 점점 더 무겁게 하여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꽤 깊은 호수였다.
‘라이트.’
파아아앗!
아래로 내려갈수록 주변이 어두워지자 헨리는 마법을 이용해 주위를 밝혔다.
그리고 마침내 호수 밑바닥에 도달했을 무렵이었다.
덜덜덜덜덜…….
호수 바닥에 발이 닿자 왼팔의 진동은 지상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거칠어졌다.
헨리는 요동치는 팔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고, 왼팔의 떨림을 지도 삼아 떨림이 더 강해지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헨리의 라이트에 관심을 보이는 물고기들이 여럿 모여들었다가 사라지기를 수십 번.
한참 동안이나 호수 바닥을 헤집고 다니던 중 헨리는 특정 지점에서 재미난 광경을 목격했다.
‘서리?’
그것은 바로 헨리의 왼쪽 팔뚝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기한 현상이었다. 물로 가득한 호수 속에서 서리라니.
더불어 서리가 끼기 시작하자 요동치던 팔의 떨림 또한 거짓말처럼 진정되었다.
‘이 근방인 모양이로군.’
신기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팔뚝 가득 서리가 꼈음에도 불구하고 차갑거나 뻣뻣해지는 등 동상 특유의 증상들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헨리의 왼쪽 팔뚝이 거미줄에 칭칭 감긴 것처럼 새하얗게 뭉쳐졌을 때였다.
휘오오오오……!
더 이상 서리가 끼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헨리는 갑작스레 왼쪽 팔뚝으로 체내의 마력이 집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음?’
엄청난 흡입력이었다.
체내에 축적된 마나는 물론이고 왼쪽 팔뚝을 기점으로 주변의 호수 물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크윽……!”
왼쪽 팔뚝은 모래 지옥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동시에 한 번도 느껴지지 않았던 엄청난 고통이 시작되었다.
금방이라도 팔뚝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소용돌이가 강해질수록, 팔뚝 안에 넣어 두었던 알의 몸부림 또한 점점 더 강해져 갔다.
‘빼야 한다!’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헨리는 본능적으로 팔뚝 안에 넣어 둔 알을 밖으로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퍼어엉!
헨리의 팔뚝이 폭발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