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살게라 (6)
추방민들의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지만 두려움은 어려 있었다.
문케는 자리에 없었지만 문케와 함께하던 직원들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는 살기를 가득 담아 직원들을 노려보았다.
움찔.
문케를 돕던 다섯 명의 직원들이 쉬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찔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증스러운 놈들…….”
짧지만 섬뜩한 말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 모두, 앞서 문케가 어떻게 되었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헨리가 고개를 돌려 병사에게 말했다.
“계속 여기 계실 겁니까?”
“예……? 그, 그럼요?”
“번트 소장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 여기는 저에게 맡기시고 검문소에서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그…… 알겠습니다…….”
나태하긴 했어도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병사는 한 번 더 추방민들의 머릿수를 헤아려 본 뒤 천천히 추방촌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병사가 사라지자 헨리가 직원들에게 차갑게 명령했다.
“옮겨.”
“예, 옙!”
잔뜩 겁먹은 직원들이 서둘러 마차에 실린 보급품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에 추방민들 또한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상단 직원을 도우려 했다.
그러자 헤글러가 그들을 막아서며 친절하게 말했다.
“그냥 계셔도 됩니다. 일은 저놈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요.”
“하, 하지만…….”
“괜찮습니다. 아무 일도 없을 테니 저를 믿어 주세요.”
헤글러는 불안해하는 추방민들을 끝까지 다독여 주었다.
직원들은 헨리의 노여움을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서둘러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철심 옆의 개구멍에 보급 물자들을 모두 꺼내 놓았을 때였다.
“헤글러.”
“예, 단장님.”
“저놈들의 외투를 빼앗고 눈과 손을 묶어 눈밭에 던져 둬.”
“예, 알겠습니다.”
“네, 네? 저, 저, 잠시만요!”
직원들의 쓸모는 여기까지였다.
헨리는 개인적인 볼일이 끝날 때까지 저들에게 ‘혹독한 추위’라는 형벌을 내렸다.
외투를 빼앗긴 직원들은 눈과 손과 손이 묶인 채로 눈이 허리까지 쌓인 곳으로 던져졌다.
이윽고 추방민들 앞에 선 헨리가 말했다.
“여러분.”
헨리의 말에 추방민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헨리가 직원들을 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아직까지도 헨리를 문케의 대리인쯤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헨리는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제 이름은 헨리 모리스라고 합니다.”
“……!”
누구 하나 소리 내지 않았지만 모두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언급되자 동공이 확장되었다.
“익숙한 이름이라 다들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제법 많이 듣는 이야기 중에 하나니까요.”
헨리의 독백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현재 여러분이 머릿속에 떠올리고 계시는 그분이 바로 저의 마법 스승님이시기도 합니다.”
잠깐의 정적.
놀란 것은 추방민들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가장 놀란 사람은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헤글러였다.
“제 이름이 스승님과 같은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분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는 현재, 돌아가신 스승님의 뜻을 잇기 위해 이곳 살게라로 온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을 뵙기 위해서요.”
좌중은 여전히 침묵했다.
중앙귀족과 대립하던 개국공신들이 모두 죽은 지도 벌써 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사이 개국공신들과 친분이 있던 자들은 모두 좌천을 당하거나 암암리에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식솔이었던 자신들은 헨리의 죽음을 담보로 겨우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그들은 죽는 것만 못한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매일이 고통스러웠다.
부족한 식량과 살을 에는 추위, 따뜻한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는 이곳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지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더 빨리 여러분을 찾아뵀어야 했는데 능력이 부족하여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차마 본인을 본인이라고 밝힐 수가 없는 처지였기에, 헨리는 이렇게나마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다시 이어지는 침묵…….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흑.”
“흐흑, 흑…….”
살아남은 추방민들 중에서 누군가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울음은 모두에게로 확산되었다.
어떤 이는 자리에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어떤 이는 허탈함에 웃고 울기를 반복했다.
“정말로…… 정말, 대공님의 제자분이십니까?”
추방민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헨리에게 다시 한 번 조심스레 그 사실을 확인했다.
남자는 죽은 동료들 중 신궁이라고 불렸던 자의 가족이었다.
이에 헨리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정말입니다. 이제야 찾아뵙게 되어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라도 저희를 찾아 주셔서 정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살게라로 추방된 직후, 그들이 정말로 힘들어했던 것은 의식주에 대한 불편함 따위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힘들어했던 것은, 더 이상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다는 괴로움 때문이었다.
희망이 없다는 것은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수많은 식솔들이 얼어 죽거나 아사했지만, 살아갈 희망이 없어 자살을 택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죽어 가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남아 있는 이들의 괴로움 또한 곱절이 되었다.
하루하루가 생지옥이었던 그들은 죽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자살은 생각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인간이란, 몸뚱아리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데 목숨만큼은 질긴 존재들이었다.
오랫동안 시름시름 앓아도 고통을 견딜 수는 있되 쉽게 죽지는 못한다는 뜻이었다.
현재 살게라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런 모든 슬픔을 겪으며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헨리는 오랫동안 고개를 숙인 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좌중의 눈빛은 변해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희미해져 가던 눈동자가 이제는 작은 불씨를 틔운 것처럼 천천히 생기를 더해 갔다.
마치 희망이 생긴 사람들처럼 말이다.
* * *
소드 마스터 히람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눈앞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끝끝내 이를 악물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반드시…… 반드시 꼭, 알려야만 한다……!’
바이퍼 기사단 제5부대의 부대장을 맡고 있는 히람은 1년 전 단장인 살모라로부터 밀명을 받았다.
그것은 살게라로 향하는 보급 상단을 습격해 보급 물자를 빼돌리라는 것.
히람은 단장이 왜 이런 명령을 내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살모라가 내린 명령이었기에 군말 없이 임무를 수행했다.
임무 자체는 간단했다.
어차피 보급을 맡은 상단주 또한 밀명과 관련된 내부자이니, 적당한 연기와 더불어 동행한 용병들만 처리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임무도 여느 때와 같이 느긋하게 처리하기로 했다.
예상대로였다. 한 번의 접점으로 서른 명에 달하는 하운드 용병단은 거의 궤멸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하운드 용병단의 단장을 죽이려던 찰나.
이변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무슨……!’
갑자기 날아온 대검에 아끼던 부하의 목이 그 자리에서 달아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남은 부하들이 말과 함께 넘어지면서 순식간에 운명을 달리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도 황당한 죽음에, 히람은 그제야 칼을 뽑아 들고 분노했다.
그러나 헨리와 검을 맞부딪친 순간, 그제야 히람은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히 조금의 오러도 느껴지지 않는 애송이라 여겼건만 놈이 소드 마스터인 자신과 대등하게 검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밀리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턴 육안으로 그놈의 움직임을 쫓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 말도 안 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거리에 히람은 끝없이 분노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렸을 땐 자신은 이미 팔 한 쪽을 내줌과 동시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도망치고 있었다.
“허억…… 허억…….”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전신의 오러를 터뜨려 가며 도마뱀처럼 도망친 히람이었다.
팔이 잘린 순간부터 이미 임무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불어 검사로서의 인생 또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엔, 녀석에게 당한 수모가 너무나도 치욕적이었다.
그래서 히람은 이를 악물었다.
이를 악물고 잘린 어깨를 질끈 동여매고서, 어떻게든 이 사실을 살모라에게 전해 주기 위해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히람은 가까운 제국군 주둔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준비를 마친 헨리는 땅바닥에서 손을 뗐다.
헨리가 손을 뗀 바닥은 지하에 땅굴이 형성되어 있는 추방촌의 지상이었다.
헤글러를 포함한 추방민 전체가 신기한 눈으로 헨리의 행동을 주시했다.
이곳에는 현재 무릎까지 쌓여 있던 눈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헨리가 마법으로 눈을 모두 녹여 없앴기 때문이다.
이제는 추방촌 위로 눈도 내리지 않았다.
헨리가 기후를 바꾼 것이 아니었다. 단지 추방촌에 한해서만큼은 눈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마법으로 무형의 장벽을 쳐 놓은 것이었다.
손을 뗀 바닥에는 복잡하고 수많은 룬어들이 별자리처럼 모여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준비를 마친 헨리는 이윽고 손을 모은 뒤 주문을 시전했다.
“……이 땅에 위대한 건축가의 축복이 깃들게 하소서. 라이징 그랜드 맨션!”
우우웅!
마법이 시전되자 헨리는 강줄기만큼의 마나가 체내에서 빠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엄청난 마력 값이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이윽고 빼곡하게 들어찬 마법진이 헨리의 부름에 응답한 순간, 엄청난 장경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
라이징 그랜드 맨션.
헨리가 개발한 최상위급 생활 마법의 일종으로, 주변 환경을 이용하되 그에 어울리는,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대저택을 만들어 내는 건축 마법의 일종이었다.
헨리가 이 마법을 개발한 까닭은 간단했다.
제국을 건설할 당시에 제국민들의 노동력을 조금이라도 아끼고자 하는 마음에서 개발에 착수한 마법이었다.
헨리는 대량의 마력이 급격하게 소모된 탓에 심한 어지러움과 현기증을 느꼈다.
덕분에 6서클로 증진하는 데 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겠지만, 헨리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대저택을 짓는 마법이니만큼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하지만 모두들 마법이 작동되는 신기한 과정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엄청난 장경이었다.
흙이 알아서 모여 기둥도 되고, 지붕도 되었다.
게다가 기술자가 새겨 넣은 것 같은 아름다운 무늬들은 물론이고, 헨리의 지식을 기반으로 한 각종 편의 시설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내, 살게라에 어울리는 대저택이 막 완성된 순간이었다.
“단장님. 이거…… 우리가 사는 곳보다 훨씬 더 거대한 집이 지어진 것 같습니다만?”
“부러우면 여기서 살든가.”
“아, 아뇨. 저는 청소하기 편한 작은 집이 좋습니다.”
애 아빠다운 현실적인 바람이었다.
헨리는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집 안을 항상 따뜻하게 해 주거나 청결을 한결같이 유지시켜 주는 등의 각종 생활 마법들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한참 뒤, 드디어 마법 부여를 끝낸 헨리는 그제야 자리에 앉아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만하면 됐겠지.’
헨리가 이렇듯 크게 무리해 가면서까지 이들에게 좋은 집을 지어 주는 이유는 간단했다.
적어도 황제를 벌하기 전까진 이들은 살게라를 벗어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어설프게 이들을 구출했다간 오히려 황궁에서 진상 추적에 나설 테니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살게라에서 빼내 오고 싶었다.
하지만 멀쩡한 추방민들을 빼내 오기엔 그 과정이 너무 복잡했고 위험 요소도 많았다.
그래서 헨리는 살게라의 폐쇄성을 이용하여 오히려 살게라를 살기 좋은 은신처로 만들기로 했다.
“우, 우와…….”
“이, 이렇게까지 따뜻하다니…….”
“세상에…… 대체 얼마나 넓은 거야?”
모두들 한때는 부귀영화를 누리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살았으니,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할 것이다.
이어서 헨리가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호수나 강이 있습니까?”
“있기는 한데 전부 다 꽁꽁 얼었습니다. 그런데 호수나 강은 왜 찾으시는 겁니까?”
“따뜻한 집을 만들었으니 이제는 안정적으로 식수를 공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딥니까, 그곳이?”
헨리의 창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