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62화 (62/522)

# 62

살게라 (5)

“먼저 대화에 앞서, 봐 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헨리는 번트를 이끌고 문케가 갇혀 있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 안에는 기력이 쇠한 문케가 딱딱한 나무 바닥 위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헨리는 가만히 검지를 입술에 갖다 붙인 뒤 다른 마차의 문을 개방했다.

그 안에는 헨리가 쓰러뜨린 스무 명의 도적단원, 아니 바이퍼 기사단원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도적……?”

행색을 보건대 도적이 확실했다.

그러나 헨리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도적이 아닙니다.”

“그럼요?”

“도적으로 위장한 황궁 기사단입니다. 바이퍼 기사단이라고, 들어는 보셨겠죠?”

“예? 바이퍼 기사단이라면 그 살모라 단장이 이끄는……?”

“그렇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바이퍼 기사단이 어떤 기사단인데 이까짓 도적질 따위를 한단 말입니까?”

번트가 좀처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헨리는 아까 전에 병사에게 던져 주었던 두령의 팔을 내밀었다.

“이건 저놈들의 두령…… 아니, 소드 마스터였으니까 아마도 소대장쯤 되는 놈의 팔입니다.”

팔뚝 위에 그려져 있는 바이퍼 기사단의 선명한 심벌.

번트 또한 더블 스네이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저도 처음에는 믿기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검문소의 병사들이 그러더군요, 이번에는 도적 떼를 마주치지 않았냐고. 혹시 그동안 페인트 상단이 잦은 약탈에 시달리지 않았습니까?”

“……세 번 중에 한 번은 꼭 물자를 통째로 빼앗기곤 했습니다.”

“아마도 오늘이 그 한 번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증거로 문케는 보급품으로 가득 차야 할 마차를 일부러 텅텅 비워 놨더군요.”

증거와 증인, 그리고 내부자들이 굴비처럼 엮였다.

이 정도면 황궁에서도 부정하지 못할 확실한 증거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헨리가 직접 이들을 신고하려 하였으나, 검문소장이 번트인 것을 알고 계획을 좀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말인데, 소장님께 이놈들을 모두 넘겨드리겠습니다. 저야 한낱 용병에 불과하니 황궁에 이를 신고해도 믿어 주지 않겠지만 소장님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황궁 기사 출신의 번트라면 한낱 용병 따위의 말보다는 신뢰도가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번트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수고하셨습니다만,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소용이 없다니요?”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이들이 정말로 상단주와 합작하여 물자를 빼돌렸다고 한들, 이들의 신분이 바이퍼 기사단원이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세한 사정은 알려 드릴 수 없지만…… 바이퍼 기사단과 연관된 일이라면 분명히 배후에 더 큰 세력이 존재할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감히 대적조차 하지 못할 그런 존재가요.”

번트가 슬픈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헨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반문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바이퍼 기사단의 단장인 살모라는 오베르 후작에게 줄을 대고 있으니, 배후가 있다면 아마도 그건 오베르 후작이겠지요.”

“그,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저도 대충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그, 그만……!”

헨리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가려던 찰나, 번트가 헨리의 말을 중지시켰다.

“……그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런 것쯤이야 저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어차피 신고해 봤자 그 끝에 삼대가문이 있다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무기력한 목소리, 그리고 그 무기력함에 교육된 눈빛.

헨리는 그제야 자신이 번트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하긴…… 정치 보복으로 이곳까지 좌천당했으니 심정이 말이 아니겠지.’

올곧고 대쪽 같은 사람일수록 한번 그 신념이 무너지면 회복하기란 좀처럼 어려운 법이다.

번트가 그랬다. 그는 한평생 제국에 충성하는, 올곧고 정의로운 기사로 살아왔었으니까.

이어서 번트가 힘없는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의 황궁은 황족보다 삼대가문의 힘이 더 강한 실정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오베르 후작의 심기를 건드려 봤자 헨리 경만 다칠 것입니다. 그러니 분하고 억울하더라도 모른 척하십시오. 헨리 경은 아직 젊지 않습니까?”

진심이 담긴 씁쓸한 충고였다.

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했다.

권력의 축이 바뀌지 않는 이상, 오베르 후작의 잘못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정 분하시다면 페인트 상단 자체를 실족사 처리해 드릴 순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아 두십시오. 당장의 분노로 페인트 상단을 제거한다고 한들, 오베르 후작은 다른 장기짝을 구하면 된다는 것을요.”

뿌리를 뽑을 수 없으니 애초에 건드리지도 말라는 이야기였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컨대…… 힘이 부족하다는 얘기군요?”

“뭐…… 따지고 보면 말이 그렇게 되겠군요.”

“맞는 말입니다. 소 잡는데 닭 잡는 칼을 쓰면 오히려 소뿔에 치일 테니까요. 그럼 우리도 그에 맞는 칼을 쓰는 게 어떻겠습니까?”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상대는 한낱 소 따위가 아닙니다.”

번트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소장님께서 못 하시겠다면 아이젠 백작은 어떻겠습니까?”

“아이젠…… 백작요?”

현재의 삼대가문은 헨리가 대공이던 시절, 6개의 대가문 중 ‘중앙귀족’이라 불렸던 후작 가문 하나와 백작 가문 셋으로 이루어진 세력이었다.

하지만 헨리와 같은 ‘개국공신’ 세력이었던 공작과 후작이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나자, 공석이 된 공작직과 후작직을 중앙귀족파의 대가문들이 자연스럽게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곧 ‘삼대가문’이라는 절대 권력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중앙귀족파의 유일한 후작이었던 가문이 공작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남은 세 백작가는 두 자리뿐인 후작직을 놓고 다투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이번 기회를 빌려 후작가를 3개로 늘리자는 의견도 나왔었다.

하지만 남은 개국공신 쪽 사람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여 그 의견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세 백작가 중 두 가문만이 후작의 자리를 차지했고, 남은 백작가 하나는 승작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권력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 바로 현재의 아이젠 백작이었다.

“아이젠 백작은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뒷방 늙은이 신세인 데다가 그때 이후로 후작들과 사이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사촌이 땅을 샀는데 배가 안 아플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좋은 미끼를 던져 주면 아이젠 백작이 당연히 우리를 대신하여 소를 잡아 주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상대는 오베르 후작가입니다. 이미 권력 싸움에서 한번 밀려난 아이젠 백작가가 큰 도움이니 되겠습니까?”

“그건 우리들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부분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황궁에 알리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쓸 것이냐는 겁니다.”

헨리나 번트가 이를 신고할 경우, 최악의 상황엔 바이퍼 기사단의 보복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궁 기사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아이젠 백작이 이를 걸고넘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헨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상황이었다.

“저쪽이 흙탕물이 되든 말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합시다.”

“아…….”

헨리의 지혜로움에 번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는 그런 방법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닙니다. 소장님께선 워낙에 올곧은 분이시니 이런 식의 분탕 작전을 떠올리지 못하신 겁니다.”

“저를…… 아십니까?”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병사들에게 귀감이 되는 아주 훌륭한 기사분이시라고요.”

헨리의 칭찬에 번트는 과거의 영광이 떠올랐던지,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무튼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문케와 기사들의 시체는 여기에 놓고 가겠지만 상단 직원들은 잠시만 좀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노동력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렇습니다.”

“당연히 가능합니다. 편하게 부리고 돌려주십시오.”

직원들은 비록 상단주에게 고용된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헨리는 문케를 대신하여 살게라 입장 허가를 받아 낼 수 있었다.

통과가 허가된 다음, 헨리 일행은 안내를 맡아 줄 병사와 함께 슬란 협곡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 * *

슬란 협곡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무렵, 본격적인 살게라의 추위가 시작되었다.

“후우…….”

조그맣던 눈송이는 어느새 함박눈이 되어 있었고 눈은 협곡을 벗어날 때쯤엔 발목까지 차오를 만큼 쌓여 있었다.

온 세상이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살게라는 겉보기엔 정말로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하지만 두꺼운 외투를 걸쳤음에도 불구하고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추위는 그야말로 대륙 최악의 천연 지옥임을 자부했다.

‘이런 데로 보냈단 말이지?’

한참 뒤, 마부석에 앉아 있던 병사가 말했다.

“여기입니다.”

병사가 안내한 곳은 추방민들이 모여 산다는 추방촌이라는 작은 부락이었다.

그러나 추방촌에서는 등대처럼 우뚝 솟아 있는 철심 하나를 제외하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기가 정말로 추방촌입니까?”

“일단은 추방촌이 맞습니다.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 모여 산다는 것이 좀 다른 점이긴 하지만요.”

병사는 대답과 함께 품에서 조그마한 손 망치 하나를 꺼냈다.

그런 다음 추방촌 중심에 우뚝 솟은 철심으로 다가가 있는 힘껏 망치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깡! 깡! 깡!

추위에 언 철심은 내부가 비어 있었던지 꽤나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이에 헨리가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추방민들을 부르는 겁니다. 이곳 살게라는 날씨가 너무 추워서 땅굴이 아니면 살아남기가 힘들거든요. 이 철심은 땅굴과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연락책입니다.”

지하와 연결된 철심을 두드리면 그 울림이 땅굴 속에 있는 추방민들에게 전달된다.

다소 특이한 구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그 실상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 추방민들의 가련한 흔적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철심을 두드리길 수차례.

얼마 뒤, 철심 옆에 쌓인 눈 더미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에 병사는 망치질을 멈추고 맨손으로 눈 더미를 치우기 시작했다.

바닥까지 눈을 치우자 밑바닥에 감추어져 있던 조그마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끼이이익.

추위에 꽁꽁 언 나무 문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지상으로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자 감추어져 있던 개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그 조그마한 개구멍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사람들이 쏟아져 나올수록 헨리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아는 얼굴들이었다.

전생에 몇 번이나 인사를 주고받고 함께 밥을 먹었으며 지인들로부터 소개를 받은 이들까지.

익숙한 얼굴들이 늘어 갈수록 목구멍에 자갈이라도 낀 듯했다.

추방민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나타날 때마다 헨리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짙어졌다.

‘후…….’

그리고 마침내 모든 추방민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무렵이었다.

‘그 많던 이들이 고작…….’

척 보아도 십수 명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 십수 명조차도 모두들 피골이 상접하고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

헨리가 병사에게 물었다.

“이들이…… 전부입니까?”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 딱 열다섯 명이네요. 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추방민들은 열다섯 명이 전부입니다.”

“후…….”

“왜 그러십니까?”

“아닙니다, 아무것도.”

쉰 명이 넘었던 동료들의 식솔들은 이제 겨우 열다섯 명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헨리는 더더욱 동료들을 볼 낯이 없어지는 듯했다.

그때, 잠자코 추방민들을 지켜보고 있던 헤글러가 병사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근데 다들 왜 저렇게 군기가 들어 있는 겁니까?”

‘군기?’

헤글러의 말에 헨리는 그제야 추방민들을 다시 살펴볼 수 있었다.

누구 하나 2열횡대로 모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추방민들은 자연스럽게 오와 열을 맞추어 줄을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병사가 말했다.

“글쎄요. 저희는 추방민들의 생존 여부와 남은 머릿수만 관리하는 입장이라서요. 이곳에 출입하는 건 보급을 맡은 페인트 상단뿐입니다.”

‘또 그놈 짓이었군.’

병사의 말에, 헨리는 자연스럽게 이것이 문케의 작품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문케는 이곳에 들를 때마다 보급품을 무기 삼아 추방민들에게 각종 횡포를 부려 왔기 때문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조리에, 헨리는 다시 한 번 뒷목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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