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살게라 (4)
마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전, 헨리는 손에 쥔 두령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우선.’
좌아악!
헨리는 먼저 두령의 팔에 둘린 옷가지부터 찢어 냈다.
만약 헨리의 예상이 맞는다면 이놈들은 신체 어딘가에 자신들의 소속을 나타내는 문신 1~2개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팔뚝의 어느 한 지점에서 헨리의 시선이 멈추었다.
‘역시.’
두 마리의 줄무늬 뱀이 서로의 몸을 휘감은 채 하늘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통칭 ‘더블 스네이크’의 표식.
황궁 기사단들 중 제국 십검 중에 열 번째 검인 ‘십검의 살모라’가 단장으로 있는 바이퍼 기사단의 고유 심벌이었다.
‘일을 맡겼다는 제국 기관이 설마 제국군이었을 줄이야.’
헨리는 그제야 이번 보급품 운송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의 끝에는 오베르 그놈이 있겠군.’
절대 존엄인 황족을 제외하면, 제국의 권력 구조는 국정 운영에 참여하는 공작 가문 하나, 후작 가문 둘 그리고 세 백작 가문이 모인 6개의 ‘대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가문은 단순히 규모가 크다고 해서 주어지는 이름이 아니었다.
제국의 발전에 얼마나 많이 이바지했는가를 비롯해 황제의 판단하에 임명되는, 귀족 가문 중에서도 최고 귀족들을 상징하는 자리였다.
물론 헨리 같은 대마법사를 비롯한 교황이나 각 분야의 그랜드 마스터는 각자 ‘대공’이라는 호칭을 가지고서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오베르는 그 대가문의 하나이자 현 2개의 후작 가문들 중 크림슨 가문의 가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비열한 놈.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개같이 행동하는 건 여전하구나.’
더불어 6개의 대가문 중 공작 가문과 후작 가문 둘에는 ‘삼대가문’이라는 별호가 주어지는데, 그들은 현재 제국에서 황가의 힘과 필적할 만큼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모든 권력에는 ‘절대’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없었다.
‘내가 다 부숴 버릴 테니까.’
심벌을 확인한 헨리는 이윽고 손바닥 위에 불을 지폈다.
그런 다음 피가 뚝뚝 흐르는 팔 끝의 환부에 대고 살갗을 지지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화염으로 지혈을 마친 헨리는 두령의 팔을 전리품처럼 들고서 마차로 복귀했다.
그러자 후방에서 딱딱하게 표정이 굳어 있던 문케가 황급히 감격에 벅차오르는 표정을 연기하며 헨리를 맞이하였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단장님 덕분에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헨리는 그런 문케의 얼굴에 다짜고짜 주먹부터 내질렀다.
뻐억!
굉장한 소리와 함께 문케의 얼굴이 돌아갔다.
털썩.
광대뼈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떠는 문케.
이에 헤글러를 포함한 모두가 당황하였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차가워진 분위기…… 그 냉랭한 공기 속에서 헨리가 첫 질문을 건넸다.
“너 누구야?”
“가,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묻는다. 너 누구야?”
“대,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헉!”
헨리는 이미 한차례, 쓰러진 문케에게 자비를 주었다. 하지만 멍청하게도 문케는 그것이 자비인 줄도 모르고 제 발로 걷어차고 말았다.
뻐억! 뻐억! 뻐억!
쓰러진 거짓말쟁이에게 주먹을 들 자비는 없다. 헨리는 웅크린 문케의 몸을 계속해서 걷어찼다.
그러자.
“그, 그만! 다, 다 말씀드릴게요! 그, 그, 그러니까 이제 제발 그만……!”
상상도 못 할 고통에 문케는 결국 헨리의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헨리의 자비는 처음에 건넸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미 늦었어.”
콰직!
헨리는 살려 달라며 애원하는 문케의 손을 발바닥으로 짓뭉갰다.
“끄아아악!”
마력은 싣지 않았다. 굳이 마력을 싣지 않아도 거짓말쟁이의 버릇을 고쳐 주기엔 충분했기 때문이다.
구타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한참 뒤, 문케의 허리가 제대로 펴지지도 못할 무렵이 되어서야 헨리는 다리를 놀리는 것을 멈추었다.
“으흐흐흑…….”
그 누구도 헨리가 왜 저런 행동을 보이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중에서 헨리의 무력이 가장 강했기 때문에 보고서도 못 본 척을 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불똥은 자신에게로 튈 테니까.
‘더러운 놈들.’
헨리가 이렇게까지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까닭은 간단했다.
오베르 후작의 끄나풀인 이놈들 때문에 서른 명에 달하는 애꿎은 용병들이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용병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차 행하는 처벌은 아니었다. 비록 못 배워 먹어서 좀 상스럽긴 했어도, 그들 또한 엄연한 제국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케를 비롯한 도적단 놈들 또한 위에서 시켜서 한 일이었을 테니 이들에게 근본적인 책임을 물을 순 없다.
하지만 오베르 후작이 원한 것은 추방민에게 지원되는 보급품의 단절이었지 용병들의 죽음 따위가 아니었다.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이 있었다면 굳이 용병들을 죽이지 않고도 능히 일 처리를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고작 목격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 그동안 죽인 용병들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목을 쳐도 시원찮다.’
하지만 헨리는 문케를 죽이지 않았다.
의외로 죽음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있어 가장 간단한 구원이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문케가 남은 생을 사는 동안, 끝없는 고통 속에서 속죄의 삶을 살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그동안 죽은 용병들의 넋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후…….”
헨리는 길게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런 다음 허리춤의 검을 뽑아 차례대로 세워진 마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걱!
헨리는 첫 번째 마차의 잠금장치를 제거했다.
첫 번째 마차부터 세 번째 마차까지는 추방민들에게 줄 식량이 들어 있는 곳이었다.
“하?”
그러나 첫 번째 마차를 개방한 순간 헨리는 실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각종 저장 식품을 비롯한 감자나 고구마 따위가 들어 있어야 할 마차 안에는 술 몇 상자와 담배, 그리고 썩은 감자 한 포대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세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헨리는 생필품을 싣고 있는 다른 마차까지 모두 확인하였으나 제대로 된 물품은 마차 한 대 분량도 되지 않는 상태였다.
상단 직원들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여기서 죽일 작정이었군.’
쫓아낸 추방민들에게 최소한의 생필품을 지급해 주라고 한 것은 아마도 죽은 헨리를 두려워한 황제의 마지막 양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베르 후작은 민간 업자와 황궁 기사단까지 끌어들여 추방민들을 서서히 말려 죽여 갔다.
번거롭고 복잡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일을 저지른 까닭은, 개국공신들의 완전한 멸문과 개인적인 분풀이를 위함이었다.
‘이만큼 받았으면 충분하다. 그러니 이제 나도 받은 만큼 되돌려 줘야겠지.’
이 정도면 과분할 만큼 많은 것들을 받은 듯했다. 그러니 이제는 헨리가 되돌려 줄 차례였다.
“저……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잠자코 눈치를 보고 있던 헤글러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헤글러.”
“예, 단장님.”
“이번 의뢰는 도적과 상단주가 서로 내통하여 벌인 자작극이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당장 비발디 타운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래도 아직 마차 한 대 정도의 보급품이 남아 있으니 우리는 살게라로 간다.”
지금 당장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되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비록 마차 한 대 분량의 보급품밖에 남지 않았지만 살게라에는 이마저도 없어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추방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개자식이!”
뻐억!
얼마 뒤, 뒤늦게 사정을 알게 된 빌레이가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죽어 가는 문케에게 주먹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헤글러가 말했다.
“말려야 되지 않을까요?”
“놔둬.”
비록 상스럽고 천박한 놈이긴 해도, 그에겐 문케를 체벌할 권리가 있었다.
문케와 도적들 때문에 한평생을 꿈꿔 왔던 자신의 용병단이 단 한순간에 궤멸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가자.”
빌레이의 충분한 분풀이가 끝난 후, 헨리는 마차 한 대를 감옥으로 지정하여 피떡이 된 문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상단은 다시 살게라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대문이라 불리는 협곡을 지나 상단은 곧 살게라 지방의 출입문인 슬란 협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슬란 협곡과 가까워질수록 날은 더욱 추워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싸라기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새하얀 입김은 허공에서 부서졌다.
상단은 이윽고 협곡 입구에 설치된 검문소에 도착했다.
덜컥덜컥.
마차가 서자 검문소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느긋하게 걸어 나오며 알은체를 해 보였다.
“수고들 하십니다. 어라, 문케 상단주님은요?”
“뒤에 있습니다. 그보다 검문소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소장님은 지금 거하게 한잔하시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 시간에 말입니까?”
“예, 뭐.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근데 실례지만 누구시죠?”
“이번 보급품 호송 의뢰를 맡은 용병입니다.”
“아, 그러셨구나. 그럼 모르실 수도 있겠다. 여긴 원래 이래요. 어차피 페인트 상단 말고는 오는 사람이 없는 곳이라……. 그나저나 이번에는 도적 떼랑 마주치지 않았나 봐요?”
병사는 근무 태만 같은 최악의 부조리가 익숙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이에 헨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짧게 대꾸했다.
“방금 전에 전멸시키고 오는 길입니다.”
헨리는 대답과 함께 두령의 잘린 팔을 병사 앞에 던졌다.
“이, 이, 이게 뭐야!”
덕분에 반쯤 감겨 있던 병사의 졸린 눈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휘둥그레 변했다.
헨리가 차갑게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가서 검문소장 불러오세요.”
경어로 말했지만 완연한 명령조였다.
하지만 병사는 감히 그 명령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헨리의 살벌한 눈빛에 그만 압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병사가 사라지고 한참 뒤, 검문소 안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곧 검문소의 안쪽 문이 열렸다.
“에이, 씨…… 히끅, 대체 누군데……? 페인트 상단이면, 히끅! 문케잖아…….”
소장의 목소리에는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는 제복도 제대로 차려입지 않은 채 추위를 막기 위한 털옷들만 둘둘 말아 입은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헨리는 겨우 진정시켰던 분노가 다시금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런데 검문소장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헨리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번트?’
수문장 번트. 살이 좀 찌고 수염이 길긴 했지만 헨리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는 수문장 번트가 분명했다.
‘저놈이 여기서 왜 나와?’
소드 마스터 번트.
그의 별명은 ‘방패 수문장’으로, 농성에 특출 난 재능을 보여 병사들이 지어 준 것이었다.
또한 그는 뛰어난 검술과 더불어 확실한 일 처리와 청렴한 공직 생활로, 헨리가 직접 훈장까지 달아 주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랬던 번트가 지금, 업무 시간 중에 제복도 차려입지 않고 술에 잔뜩 취한 얼굴을 하고서 검문소 밖으로 기어 나오다니.
그 순간, 헨리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설마 좌천을?’
살게라를 관리하는 검문소장.
황궁에서 근무하던 화려한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하찮은 보직이었다.
한때 꽤나 잘나갔던 그가 이런 처지로 전락해 버린 이유는 간단했다.
수문장 번트는 과거 헨리가 몸담고 있던 개국공신 쪽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번트뿐만이 아니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헨리는 분노가 아니라 미안한 마음이 가득해졌다.
전생의 자신이 조금만 더 현명하게 대처했더라면 현재의 번트가 이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히끅…… 뭡니까?”
술이 떡이 된 번트가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헨리 앞에 섰다.
못 본 사이에 번트의 얼굴은 꽤나 많이 늙어 있었다.
이에 헨리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번트의 손을 붙잡았다.
“히끅! 지금 뭐 하는……!”
그 순간, 헨리의 마력이 맞잡은 손을 타고 번트에게로 전해졌다.
시전된 마법은 숙취와 취기를 제거하는 간단한 생활 마법이었다.
잠시 후, 헨리가 조용히 손을 거두자 벌겋게 달아올랐던 번트의 얼굴색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 갑자기 술이 확 깨는군.”
성공이었다. 이에 헨리가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번 페인트 상단의 호위를 맡은 밀리언 용병단의 단장, 헨리 모리스라고 합니다.”
“……꽤 그리운 이름을 가졌군요. 반갑습니다, 검문소장 번트라고 합니다.”
헨리의 소개에 번트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졌다.
그리고 그것은 헨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가고,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번트가 서둘러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나저나 문케 상단주님은 어쩌시고 헨리 경께서 저를 응대하시는 겁니까?”
“그것 때문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제가 대신 나서게 되었습니다.”
씁쓸했던 재회가 끝나고, 헨리의 말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