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살게라 (1)
이튿날.
헨리는 하즈를 도와 앙켈만을 운영해 나갈 전문 운영 팀과 반이 떠날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금방 다녀오도록 하지.”
협약서를 품에 넣은 반이 운영 팀과 함께 도시를 떠났다.
이로써 반과의 약속은 모두 지킨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반이 협약서를 들고 도시를 떠남으로써, 드디어 새로운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구색 또한 맞추어졌다.
반을 배웅하던 텐이 이윽고 헨리에게 물었다.
“헨리 경, 이제 다음 계획은 뭡니까?”
“다음 계획이라니, 너무 의욕적인 거 아냐?”
“후후, 하루라도 빨리 대륙 제패를 하시려면 일분일초도 아까운 법입니다.”
채무자에서 미래의 황금왕이 된 이후로 텐은 부쩍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살게라에 잠깐 다녀올까 해.”
“살게라라면…… 그 북방의 살게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거기서 찾을 사람이 좀 있거든.”
“엥, 제가 알기로 살게라는 추방자들이나 갈 수 있는 곳일 텐데…… 그건 그렇고, 헨리 경은 대체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 있기는 한 겁니까?”
텐은 대답과 함께 ‘나이도 어린 놈이 무슨 발이 이렇게 넓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추방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란 건 잘 알지. 게다가 살게라에 입장하기 위해선 유일한 길목인 ‘슬란 협곡’을 지나야 하는 것도 알고 있고.”
“그렇죠. 슬란 협곡 입구에는 제국군이 검문소를 설치하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무슨 수로 살게라에 가시겠다는 겁니까?”
“당연히 이거 아니겠어?”
헨리는 대답과 함께 검지와 엄지를 붙여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보였다.
“뇌물 말입니까?”
“근무지가 척박할수록 군기도 느슨한 법이거든. 아, 물론 내가 나온 부대는 제외야.”
“허허, 자기가 나온 부대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고 하는 게 제국군이라더니, 헨리 경이 딱 그 짝이로군요.”
“그건 정말로 고생을 못 해 본 놈들이나 그렇게 말하는 거고.”
헨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자기가 나온 부대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에 텐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에~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헨리 경. 굳이 뇌물을 먹이지 않고 합법적으로 살게라에 출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렇다면 혹시 모르니 용병 길드를 찾아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용병 길드는 왜?”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살게라로 출입할 수 있는 의뢰가 존재할지도요. 예를 들자면 상단 호위 같은 의뢰 말입니다.”
제법 괜찮은 의견이었다. 그리고 헨리 또한 텐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거 괜찮네. 어차피 용병단 등록 때문에 한 번쯤은 용병 길드에 들르려던 참이었으니까.”
“저와 함께 가시죠. 제가 또 용병 길드에 연줄이 좀 있습니다.”
“그래?”
* * *
용병 길드 비발디 타운 지부.
용병 길드는 기본적으로 제국에서 운영하는 국가기관이었다.
매년 새롭게 만들어지는 용병단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의뢰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제국에서 직접 운영에 나선 것이었다.
‘내가 만들었지만 참 잘 만들었어.’
그리고 용병 길드를 제국에서 관리하자는 의견을 낸 사람이 바로 헨리였다.
헨리와 텐은 용병 길드에 도착하자마자 밀리언 용병단의 등록을 위한 서류부터 작성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이윽고 서류 작성을 완료하자 텐이 헨리의 서류를 들고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한참 뒤 웃는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뭐 하다 온 거야?”
“지부장을 만나고 왔습니다.”
“지부장?”
“아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바로 이곳의 지부장입니다.”
“그래? 인맥 좋네.”
“그럼요, 제가 누구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됐어?”
“제 예상이 맞았습니다. 살게라에 출입할 수 있는 의뢰가 있다고 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후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떤 의뢴데?”
“일단은 단순한 상단 호위입니다. 그런데 관계가 조금 꼬여 있습니다.”
“꼬여?”
“상단 호위에 대한 의뢰를 맡긴 건 민간 업자인데, 그 민간 업자가 하는 일이 제국 기관에서 맡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일인데?”
“단순한 보급품 운송입니다. 살게라가 워낙에 척박한 지역이다 보니 최소한의 의식주는 해결하라고 제국에서 꾸준하게 보급품을 보내 주는 모양입니다.”
“쫓아내고 보급품을 준다니, 그럴 거면 애초에 쫓아내지나 말 것이지…….”
“죄수들도 밥은 먹여 주지 않습니까?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맞는 말이었지만 듣기 거북한 것은 사실이었다.
“근데 제국에서 왜 굳이 민간 업자한테 보급품 운송을 맡겨? 자기들이 직접 하면 되잖아?”
“듣기로는 운송비를 줄이기 위해 일부러 살게라와 가까운 비발디 타운의 소상인에게 대리 운송을 맡겼다고 하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업무를 위탁시키면 오히려 보수까지 챙겨 줘야 하니 돈은 더 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일은 따지고 보면 황명이나 마찬가지. 황명을 이런 식으로 처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놀고먹는 제국군을 이용해 운송을 하고 군수 협약을 맺은 상단에서 보급품을 구입한다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일을 진행시킬 수 있다.
그런 좋은 방법을 놔두고 이렇게 번거롭게 일을 처리한다는 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정기적인 보급품 운송에 호위병이 필요하답니다. 그런데 호위병단을 이미 뽑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어떡해?”
“제가 누굽니까,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저, 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지부장이 손을 좀 써 주겠답니다. 마침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한다고 하니 시간도 딱 맞습니다.”
“그래? 그거 잘됐네.”
“아, 참! 그리고 이참에 용병단 등급도 B등급으로 심사를 받아 놨습니다.”
“확실히 지부장 연줄이 좋긴 좋네. 하루 만에 B등급이라니. 수고했어.”
텐은 받아 온 서류와 함께 B등급 용병증을 헨리에게 내밀어 보였다.
“용병 패는 제작에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니 일단은 임시 용병증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알겠어. 그건 그렇고…… 페인트 상단? 얘네야, 위탁 운송을 맡았다는 놈들이?”
“그렇습니다.”
“뭐, 그럼 일단은 알겠어. 떠날 준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가서 헤글러한테 말 좀 전해 줘.”
“알겠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좀 있긴 했지만 그 부분을 빼면 나름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헨리는 텐을 먼저 저택으로 보낸 후 살게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 * *
헨리는 첫 의뢰를 기념하여 헤글러에게 제법 쓸 만한 말 한 필을 선물해 주었다.
물론 헨리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헨리는 이번에도 구입한 말에 명마 개조술을 사용했다.
‘앞으로 쭉 함께할 놈이니까 이 정도 투자쯤은 괜찮겠지.’
이 밖에도 헨리는 검을 포함한 각종 방어구와 보조 무기까지 몽땅 새것으로 맞춰 주었으며 살게라의 한파를 대비한 방한용품까지 넉넉하게 구비하여 주었다.
“……단장님, 이렇게 많이 주셔도 되는 겁니까?”
“왜, 부족해?”
“아, 아뇨! 오히려 넘칠 정도입니다.”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용병만큼 장비가 중요한 직업도 없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모집할 때 적어 놨잖아, 업계 최고의 대우를 보장해 주겠다고 말이야.”
헨리의 말에 헤글러가 다시 한 번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직원 한 명에게 투자한 것치곤 꽤 많은 액수가 들었지만 헨리가 가진 재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모든 점검을 끝마친 뒤에야 집합 장소인 동문으로 떠날 수 있었다.
* * *
아침의 동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활기를 띠고 있었다.
대부분이 아침 일찍부터 먼 길을 떠나는 상단들이었다.
헨리 일행은 페인트 상단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헨리는 마차 앞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 남자에게 알은체를 해 보였다.
“혹시 페인트 상단의 직원분이십니까?”
“제가 상단주 문케입니다만…… 누구십니까?”
“오늘부터 호위를 함께할 밀리언 용병단의 단장, 헨리라고 합니다.”
헨리는 인사와 함께 길드의 서류를 내밀었다.
그러나 문케는 헨리가 내민 서류를 읽어 보지도 않은 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두 분이 전부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이 적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꼴랑 두 명일 줄은…….”
지부장이 미리 언질을 주었다고는 하지만 수가 너무 적어서인지 문케는 적잖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이해가 됐다. 본래 호위병은 질보단 양이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둘 다 실력만큼은 확실합니다.”
“실력은 둘째 치고, 사실 상단 호위라는 게 정말 호위만 하는 게 아니거든요. 같이 짐도 좀 옮겨 줘야 되고……. 그런데 정말 두 명으로 되겠어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일단 알겠습니다. 이미 받아들이겠다고 승낙한 상태이니 거절할 수도 없고 이거……. 대신 예정에 없던 인력을 받은 것이니 보수가 조금 적은 것은 어느 정도 감안해야 됩니다?”
“알겠습니다.”
문케는 이어서 식사 시간을 포함하여 생활에 필요한 잡다한 사항들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대략적인 설명이 끝날 때쯤, 먼저 섭외된 용병단의 단장을 소개해 주었다.
“서로 인사들 하세요. 이쪽은 하운드 용병단의 단장, 빌레이입니다.”
빌레이는 서른 살이 조금 넘은 베테랑 용병으로 B등급이었다.
그는 큰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다가 B등급이 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용병단을 차린 인물로, 나름대로 야망이 있는 남자였다.
“반갑습니다, 빌레이라고 합니다.”
“헨리입니다.”
“이거, 소문의 그 밀리언 용병단이라기에 내심 긴장하고 있었는데…… 설마 두 분이 전부인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허허, 대규모 모집 공고를 내길래 얼마나 대단한 용병단을 차리나 했더니 역시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사실이군요.”
“크크크.”
“들었어? 꼴랑 두 명이라는데?”
“그게 용병단이냐?”
대규모 모집 공고 덕분인지 첫 의뢰임에도 불구하고 밀리언 용병단의 유명세는 확실했다.
헨리는 뒤편에서 껄렁대는 빌레이의 부하들을 힐끗 본 뒤 빌레이에게 가볍게 대꾸했다.
“혹시…… 저희 용병단 모집 시험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뭐, 뭐요?”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사실, 빌레이나 그 부하들 전부 1차 시험장에서 낙방한 불합격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피식.
“아니면 말고요.”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헨리가 피식 웃음을 짓자, 빌레이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게 물들었다.
“두 분 다 그만! 계약서에도 명시되어 있지만 내부 다툼으로 인해 제가 피해를 입게 된다면 정식으로 위약금을 청구할 테니 주의들 하세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럼 슬슬 출발하시지요.”
이에 헨리가 가벼운 미소와 함께 문케를 안심시켰다.
‘으득! 저 빌어먹을 놈이 감히!’
빌레이 또한 위약금 때문에라도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거하게 한 방 먹은 탓에 이가 갈렸다.
이윽고 상단 마차가 출발했다.
* * *
“근데 단장.”
“왜?”
“저 밀리언 용병단의 단장이라는 놈, 그놈 아니야? 검 치기 챔피언.”
“뭐?”
“맞는 것 같은데? 이름도 헨리인 걸 보니 확실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저놈 때문에 내가 돈을 좀 잃었거든.”
이동하는 내내 상단은 상단 직원끼리, 용병단은 각자의 용병들끼리 뭉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빌레이는 다시 한 번 헨리의 명성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에 빌레이의 다른 부하가 말했다.
“나도 그때 봤어. 저놈 엄청 잘 싸우던데?”
“야, 검 치기가 싸움이냐? 그냥 검이나 한 번씩 주고받는 거지.”
“아니야! 아무리 검 치기라도 챔피언 방어전 때부터는 엄청 살벌해.”
“그래?”
헨리의 명성에 빌레이의 부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시끄러워! 용병 일이 어디 애새끼들 장난 같은 검 치기랑 같은 줄 알아? 그리고 자고로 용병 일은 힘이 아니라 머릿수가 중요하단 거 몰라?”
“그런가?”
“아냐, 단장 말도 맞아. 두 사람보다 세 사람이 낫고 세 사람보다 네 사람이 나으니까.”
“저놈들이 우리 발목이나 안 잡아야 할 텐데 말이야.”
“소문을 좀 들어 보니까 이번 일도 용병 길드 지부장이 상단주한테 사정사정해서 어거지로 끼워 넣은 거라며?”
“뭐야? 그럼 지부장 낙하산이네.”
“밀리언 용병단이 천만황금 소속이잖아. 어쩐지 겉만 번지르르하더라니.”
수근거림은 음모가 되었고 음모는 금방 기정사실처럼 변질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을 전해 들은 헤글러가 인상을 와락 구기며 헨리에게 항의했다.
“단장님, 저놈들이 저렇게 떠드는 거 그냥 이대로 가만히 놔두실 겁니까?”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헨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놔둬, 싸워 봤자 위약금밖에 더 발생하겠냐. 조용조용히 가자.”
“그래도 분하잖습니까!”
“원래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했어. 기다리다 보면 곧 기회가 올 거야.”
그리고 몇 시간 뒤, 결국 참지 못한 헤글러가 빌레이의 부하를 후려 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