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내 사람 (4)
“저게 뭐야?”
“웬 거지들이 저렇게 많아?”
“어디서 행사라도 하나?”
몇 시간 뒤 두 사람이 배니쉬 골목을 벗어날 때쯤, 헨리는 수백 명에 달하는 채무자들을 구제한 후였다.
“해, 햇빛이야……!”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으흐흐, 다시는 도박 같은 거 하지 않겠습니다.”
“끄흐흐흑…….”
반응은 각자 다양했지만, 대다수가 오랜만에 보는 햇볕 때문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소감이라도 한 말씀 하시지 그러십니까?”
“됐어, 자기들 인생 자기들이 사는 건데 뭐. 생각이 있는 놈들이라면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겠지.”
헨리는 구해 줬다고 해서 굳이 생색까지 내고 싶진 않았다.
* * *
헨리는 애초에 목표로 했던 회계사와 경영인 등을 데리고 먼저 조용히 옷 가게부터 찾았다.
옷 가게를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고용을 약속하긴 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이들이 바로 다음 날부터 말쑥한 양복을 입고 출근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헨리가 거지 떼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전에 가 본 적 있는 ‘슈즈메’였다.
헨리는 가게 밖에 거지 떼를 대기시킨 후 먼저 옷 가게로 들어가 직원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어머, 저번에 방문하신 장교님이 아니십니까?”
가게에 들어서자 헨리를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슈즈메의 매니저, 슐리비아츠였다.
그녀는 헨리를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미소를 띠며 알은체를 했다.
“매니저님이시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호호, 저야 늘 잘 지내고 있죠. 그나저나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이번에도 실비아 디자이너의 옷을 사러 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수십 벌 정도를 구매할 생각입니다.”
“수, 수십 벌이나요?”
“제가 입을 건 아니고, 제 밑에서 일할 직원들에게 입힐 겁니다.”
“호호호, 이제 보니 장교님이 아니시라 사장님이셨군요. 직원분들은 지금 어디 계시죠? 제가 한 분 한 분 정성스럽게 치수를 재서 사이즈에 딱 맞는 옷을 찾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믿고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제 가족처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들었지, 텐?”
“예, 알겠습니다.”
무려 실비아 디자이너의 옷 수십 벌이었다.
그 인센티브만 모아도 같은 디자이너의 장신구 하나쯤은 충분히 살 수 있는 금액이 될 것이다.
슐리비아츠는 전의를 불태웠다.
이번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떡해서든지 헨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로 무장했다.
그러나 얼마 뒤 텐이 데리고 온 헨리의 직원들을 확인한 순간, 슐리비아츠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이분들은 대체 뭡니까?”
“뭐긴요, 앞으로 저와 함께 일할 직원들이죠.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무, 문제라기보다는 그게…….”
퀭한 눈동자, 온몸에 가득한 상처 자국, 넝마 같은 옷, 땟국물, 갈비뼈가 훤히 드러난 기아 같은 몸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물통에 들어갔다가 나온 듯한 지독한 악취까지.
애석하게도 그녀는 결벽증을 가진 ‘깔끔쟁이’ 환자였다.
‘참자, 참아야 한다.’
치가 떨릴 만큼 혐오스러웠지만 그녀는 애써 환한 미소를 유지한 채 그나마 덜 더러워 보이는 남자의 몸에 줄자를 가져다 댔다.
그런데 그 순간.
“아.”
“끼야아아악!”
그녀가 남자의 가슴팍에 줄자를 들이민 순간, 그녀도 모르게 옷가지 뒤에 숨겨진 가슴의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남자는 짧게 신음했다.
그런데 그가 옅은 신음을 내뱉은 순간, 슐리비아츠는 치한이라도 만난 것처럼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쯧, 변한 게 하나도 없군.’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헨리는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그런데 그때였다.
“장교님, 안녕하세요?”
“음? 아! 케이미 양이 아닙니까?”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매니저님을 대신해서 직원분들의 옷을 골라 드려도 될까요?”
“케이미 양이 말입니까?”
“저도 이곳의 직원인걸요.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골라 드리고 싶습니다.”
근처에서 잠자코 매대의 옷을 정리하던 케이미가 매니저를 대신하여 옷을 골라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기특했다.
그녀는 공손히 헨리의 허락을 받은 후 인상 한번 찡그리지 않고 하나하나 직원들의 치수를 기록해 나갔다. 그런 다음 빠른 속도로 치수에 맞는 옷들을 가지고 왔다.
헨리는 그녀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쇼핑을 끝낼 수 있었다.
“이번에도 케이미 양의 도움을 받았군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직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걸요. 이번에도 저희 슈즈메를 찾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싹싹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흡족했다. 최근에 받은 서비스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서비스였다.
헨리는 이번에도 역시 영수증에 그녀의 이름을 서명한 뒤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로써 그녀는 어마어마한 인센티브를 정산받게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또 이용해 주세요.”
거액의 영수증을 건네받은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흠뻑 머금은 채 다시 한 번 배꼽 인사를 했다.
그러나 헨리는 영수증을 건넨 것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주머니에서 백금화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케이미 양, 이건 팁입니다.”
“예? 이, 이렇게나 많이요?”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이 돈은 케이미 양이 친절하기 때문에 주는 돈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지금 같은 서비스를 쭉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헨리는 기분 좋게 계산을 마친 뒤 직원들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
그런 다음 구매한 옷에 걸맞은 최고급 구두와 넥타이까지 한꺼번에 구매한 뒤 이들을 모두 공중목욕탕에 밀어 넣었다.
덕분에 목욕탕 주인만 울상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 물을 갈았는데 난데없는 거지들의 등장에 기존의 손님들까지 모두 욕설을 내뱉으며 가게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대신 오늘 하루치 매출과 수도세는 제가 내도록 하겠습니다.”
“예에?”
물론 영업을 방해한 만큼 주인에게는 충분한 보상을 했다.
한참 뒤, 목욕재계를 마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이들이 ‘거지 채무자’가 아닌 ‘회계사와 경영인’이 되어 헨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때를 벗기고 제대로 된 옷을 입혔을 뿐인데 전문직 특유의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났다.
이를 지켜보던 텐이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다시 태어난 직원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직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헨리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이제 일하러 가야지?”
“예! 어떤 일이든지 맡겨만 주십시오!”
헨리는 새롭게 태어난 직원들의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받으며 그들과 함께 텐의 저택으로 향했다.
훌륭한 인재들을 등용하였으니 이젠 그에 걸맞은 일을 시작할 차례였다.
* * *
“이게 그 협약서입니까?”
“그렇습니다.”
헨리는 지난 며칠 동안 직원들을 갈아 만든 협약서를 들고 벤트 시장을 찾았다.
“생각보다 내용이 많이 없네요?”
“협약을 맺자마자 큰 사업을 벌일 순 없으니까요. 협약 이후에 시행할 사업 기획서 또한 충분히 준비되어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습니까…….”
어차피 선택권은 없었다.
벤트는 협약서를 대충 훑어본 다음 서랍에서 도장을 꺼내 찍어 주었다.
“모쪼록…… 피해가 생기지 않게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걱정하시는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헨리 경이야 믿고 있긴 합니다만…… 그건 그렇고, 이제 모집 공고는 완전히 끝난 겁니까?”
“그렇습니다. 세금 정산은 끝내셨습니까?”
“보내 주신 회계사들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정산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 참 다행이군요.”
며칠이 지난 지금,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던 밀리언 용병단의 모집 공고는 어제를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아쉬워했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합격자는 처음에 합격한 헤글러가 전부였다.
‘이렇게나 인재가 없다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헨리는 그나마 한 명이라도 건진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기로 했다.
“얼마나 벌었습니까?”
“특별세로만 12만 3,741골드를 벌었습니다.”
“소소하네요.”
“예? 소소한 정도가 아닙니다. 비발디 타운 역사상 단기간에 이렇게 세금을 많이 벌어들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기존의 세금이 아닌 오로지 새로 추가된 특별세로만 12만 골드가 넘는 돈을 벌어들였다.
보통 한 달에 벌어들이는 전체 세금이 50만 골드인 것을 감안했을 때 12만 골드는 엄청난 소득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헨리에겐 그저 애들 푼돈처럼 느껴졌다.
“시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고생했는데 고작 12만 골드라니…… 다음번엔 좀 더 규모를 크게 벌여야겠습니다.”
‘저런 미친…….’
세상에 12만 골드를 푼돈처럼 여기는 이는 귀족들 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윽고 헨리가 말했다.
“들어와.”
헨리의 명령에 바깥에서 대기하던 남자 한 명이 서류 가방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해리스였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저희 회계 팀의 수석 회계사, 해리스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시장님.”
감옥에서 갓 꺼내졌을 때와는 달리 해리스는 몹시 깔끔하고 차분한 이미지로 뒤바뀐 상태였다.
더불어 헨리가 그를 수석 회계사로 임명한 까닭은, 하이샤가 소개했던 것처럼 그가 정말로 ‘천재’ 회계사였기 때문이다.
“여기, 말씀하신 서류입니다.”
해리스가 서류 가방을 열자 안에는 두꺼운 종이 뭉치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것을 본 벤트가 물었다.
“이게 뭡니까?”
“장부입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저희 천만황금에서 특별세만 따로 분리하여 기록한 특별세 장부입니다.”
“예? 그걸 왜 따로 기록하신 겁니까?”
“얼추 계산을 해 보니까 벌어들인 12만 골드 중에 무려 9만 골드가 저희 천만황금에서 벌어들인 세금이더라고요.”
“그런데요?”
“뭐가 그런데입니까? 설마 벌어들인 12만 골드를 죄다 제국에 바칠 생각이셨습니까?”
“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순진하신 분이셨군요. 어차피 저희 직원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시장님이 가지고 계신 특별세 장부도 거두어들인 회사 이름만 명시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얼마나 거두어들인 것인지 알 수 없게 될 겁니다.”
헨리의 친절한 설명에 벤트는 그제야 헨리가 의도하는 바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장부를 조작하여 세금을 횡령하자는 뜻이었다.
“타운에서 가장 큰 투기장이 바로 저희 천만황금입니다. 그런 천만황금에서 따로 기록해 둔 특별세 장부만 일부 소각한다면, 소각한 장부만큼 눈먼 돈이 만들어지지 않겠습니까?”
이윽고 헨리는 해리스가 건넨 서류 뭉치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그리고 저는 지금, 특별세를 기록한 장부들 중 절반에 가까운 서류들을 불태웠습니다.”
“그, 그렇다면 얼마나……?”
“넉넉하게 잡아서 5만 골드 정도가 될 겁니다.”
“5, 5만 골드!”
순식간에 5만 골드라는 비자금이 생겨 버렸다.
헨리는 잿더미가 된 서류들을 테이블 옆 쓰레기통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1만 골드.”
“예?”
“이번 일에 대한 대가로 시장님께 1만 골드의 보수를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예? 저, 저한테 말입니까?”
“시장님 몫은 확실하게 챙겨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모자라신 겁니까?”
“아, 아,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정말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상상을 뛰어넘는 액수에, 벤트의 입은 도무지 다물릴 줄을 몰랐다.
1만 골드.
그가 평생을 체스 플레이어로 살아오면서 번 상금과 시장 월급을 합한다 해도 결코 만져 보지 못할 돈이었다.
헨리는 그런 돈을 벤트의 몫으로 깔끔하게 지급해 주었다.
‘이제 돈맛을 보았으니 죽을 때까지 나한테 충성하겠군.’
텐 다음은 벤트였다.
그 또한 약점에 의한 굴복보다는 달콤한 미끼를 통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편이 미래를 위해서라도 훨씬 나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얼굴에 희열이 가득 찬 벤트를 보며 헨리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