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내 사람 (2)
헨리와 반은 하루 정도 여유를 갖고 그동안 쌓인 여독을 풀었다.
사실 여독이랄 것도 없었다. 두 사람 모두 훌륭한 말과 괴물 같은 체력을 가진 이들이었으니까.
저녁때가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식탁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원래는 텐 혼자서 사용했어야 할 식탁이었지만 이제는 헨리가 직접 모은 ‘헨리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헨리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고작해야 서너 명에 불과했지만 그 서너 명만큼은 자신과 뜻을 함께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텐도 내 사람으로 만들 때가 됐어.’
식사를 하는 내내 헨리는 텐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했다.
그는 비록 배당금에 대한 빚 때문에 움직이는 사내였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친 후 헤글러의 가족이 먼저 식탁에서 일어나자, 헨리 또한 슬슬 운을 떼기 시작했다.
“텐.”
“왜 그러십니까?”
“나랑 술 한잔하지?”
“둘이서 말입니까?”
“싫어?”
“아닙니다. 어이, 가서 위스키 좀 꺼내 와.”
“형님도 한잔하시겠습니까?”
“난 술을 별로 안 좋아해서 말이야. 먼저 일어나 보겠네.”
눈치가 빠른 반이 먼저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로써 식탁에는 헨리와 텐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우선 한 잔 하지.”
쨍!
녹은 얼음과 적절하게 뒤섞인 위스키가 제법 괜찮은 맛을 냈다.
이윽고 잔을 내려놓은 헨리가 다시 한 번 텐의 이름을 불렀다.
“텐.”
“왜 그러십니까?”
“내가 많이 밉나?”
“그럼 안 밉겠습니까?”
“사과해도 안 풀리겠지?”
“사과하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왜? 생각보다 살 만하지 않나. 투기장은 여전히 잘 운영되고 있고, 월급도 꼬박꼬박 들어오고 있잖아.”
“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한동안 시시껄렁한 농담들이 오고 갔다.
하지만 농담 속의 절반은 진심이기도 했다.
텐은 헨리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만 아니었다면 과거의 영광을 오래도록 영위할 수 있었을 테니까.
두 사람은 위스키를 한 잔씩 더 나누었다.
잔에서 입술을 뗀 헨리는 이번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지긋한 눈빛으로 텐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뭡니까?”
결국 참지 못한 텐이 헨리에게 본론을 다그쳤다.
이에 헨리가 조금 더 진지해진 눈빛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텐, 나는 앞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갈 생각이야.”
“그런데요?”
“하지만 사업을 확장할 자신은 있지만 그 사업을 돌볼 자신은 없어. 이게 무슨 말인지 아나?”
확장할 자신은 있지만 돌볼 자신은 없다.
눈치 빠른 장사꾼인 텐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더러 그 사업체들을 맡아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역시 너는 눈치가 빨라서 좋아.”
“아뇨, 말은 바로 해야겠습니다. 어차피 제가 헨리 경에게 지급해야 할 배당금이 남아 있는 이상 저의 모든 것을 헨리 경 마음대로 하실 생각이 아니십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지. 하지만 나는 그런 편협한 관계는 싫어.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새롭게 말을 꺼내는 것이고.”
“무슨 의도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관계가 채무자와 채권자,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까?”
“없지. 그래서 그 이상의 관계를 만들자는 이야기야.”
“예?”
텐은 머리가 좋은 남자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헨리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채무자와 채권자. 사실관계만 놓고 보더라도 한없이 불리한 이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새로운 관계를 다질 수 있다는 것일까.
이에 헨리가 천천히 속내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네가 보기엔 내가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일 것 같나?”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엄청나게 돈을 벌어들이시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돈에 집착하시는 건 아니고. 요즘은 뜬금없이 용병단을 만들겠다고 하시니, 저는 솔직히 말해서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럼 만약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걸 알려 주면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나?”
“……대체 원하시는 게 무엇이기에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분위기를 잡으시는 겁니까?”
“대륙 제패.”
“예?”
“대륙 제패가 내 꿈이야. 천만황금과 밀리언 용병단은 대륙 제패를 위한 첫걸음에 불과하고.”
예상치도 못한 단어가 등장하자 텐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진심이십니까?”
“나는 늘 진지해.”
그런 텐의 모습을 본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상징적인 말이니 너무 어렵게 해석할 필요는 없어. 아무튼 그런 목표가 있기 때문에 나는 더 큰 힘이 필요하고 더 많은 돈이 필요한 거야. 그래서 말인데 텐, 이제 그만 채무 관계가 아닌 정식으로 뜻을 함께하는 내 사람이 되는 건 어때?”
“내 사람…… 말입니까?”
“그래, 내 사람. 이미 헤글러와 반 경 그리고 벤트 시장은 내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내 사람.
해석하기에 따라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사람이라는 단어와 대륙 제패를 뒤섞게 된다면 그 단어가 가지는 뜻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 된다.
텐은 대답 대신 한동안 헨리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헨리 모리스. 그는 분명히 비범한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들키지 않았던 자신의 영업 비밀을 파훼시키는가 하면, 도시의 주인인 벤트 시장까지 마음대로 휘둘렀다.
게다가 이번에는 어떠한 수를 쓴 건지 황궁 출신의 반까지 용병단으로 포섭해 왔다.
텐은 나름대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헨리를 만난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헨리의 말이 계속되었다.
“천만황금이 어디까지 성장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뜻을 이루고 나면 그때는 내가 일군 사업 전부를 너에게 줄게. 어때, 이만하면 꽤 괜찮은 조건이지 않나?”
“전부를 말입니까?”
“놀라진 마. 아직은 일군 사업이 하나도 없으니까.”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헨리의 말대로 아직은 아무런 사업도 일궈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텐이 혹했다는 것은, 그만큼 텐이 헨리에게서 절대적인 미래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에겐 나를 대신해서 사업체를 운영해 줄 유능한 경영자가 필요해. 예를 들어 경쟁이 심하기로 소문난 비발디 타운에서 최고의 투기장 자리를 오랫동안 선점한 천만황금의 경영자 같은 사람 말이야.”
“그러면 뭐 합니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인데.”
“그건 내가 손을 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고. 만약 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거다.”
뻔한 립서비스였지만, 그런 립서비스가 계속될수록 왠지 모르게 텐의 마음은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었다.
“나와 함께하자, 텐. 만약 나와 함께해 준다면 천만황금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너를 대륙 최고의 황금왕으로 만들어 줄 것을 약속할게.”
‘황금왕!’
그리고 마침내 헨리의 입에서 황금왕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을 때, 텐의 마음은 완전히 헨리에게로 기울고 말았다.
“좋습니다.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 몸, 한번 잘해 봅시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미래의 황금왕.”
“흐흐, 황금왕은 무슨…… 됐습니다, 그런 부끄러운 호칭 따위.”
입으로는 싫어했지만 표정만큼은 솔직했다.
이로써 단순한 채무 관계였던 두 사람은 ‘헨리의 사람’이라는 새로운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귀여운 놈.’
생물학적인 나이로 따지자면 텐의 나이는 중년에 속했지만 헨리는 그보다 두 배는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그런 헨리의 눈에 손자뻘쯤 되는 텐의 쑥스러움은 마냥 귀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텐까지 포섭했으니 이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겠군.’
텐은 원래 배당금만으로도 충분히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헨리에게는 능동적인 인재가 필요했다.
헨리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헨리에게 훨씬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그런 유능한 인재가 말이다.
만약 배당금만으로 그를 굴복시킨다면 그가 가지는 헨리에 대한 감정의 골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질 것이다.
그러면 텐은 점점 더 수동적인 인물이 되어 갈 테지.
그것은 헨리가 원하는 인재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헨리는 좀 낯간지럽긴 해도 용병들이나 벌일 법한 의기투합의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유치하고 부끄럽긴 해도, 밤이 있고 술이 있다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엔 충분할 테니까.
“그럼 이제부터 사업 이야기를 좀 해 볼까?”
뜻을 함께하기로 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술잔에 위스키를 가득 채웠다.
* * *
헨리는 날이 밝는 대로 텐과 함께 비발디 타운에서 가장 유명한 ‘경영 길드’를 찾았다.
“여기야?”
“그렇습니다. 여기가 바로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경영 길드인 ‘골든핏’입니다.”
어젯밤, 비로소 텐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 헨리는 앙켈만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텐에게 말해 주었다.
물론 자신이 헨리의 제자라는 내용이 아니라, 도시 협약 문제나 전문 운영 팀 같은 것들을 말이다.
두 사람은 우선적으로 전문 운영 팀부터 꾸리기 위해 날이 밝는 대로 경영 길드 골든핏을 찾았다.
그러나 앙켈만 운영 문제를 가지고 의뢰를 해 보아도 돌아오는 답변은 기대 이하였다.
“그 정도 운영 팀을 꾸리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합니다. 다른 곳도 아닌 자유도시의 운영이니까요. 만약 돈이 없다면 거둬들이는 세금에 대한 지분으로 대신해도 됩니다.”
무려 골든핏의 부마스터가 제시한 조건이었다.
턱도 없는 소리였다. 도시에서 걷는 세금에 손을 대는 순간, 그것은 명백한 횡령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경영 길드 쪽은 포기해야 할 것 같네.”
“하지만 경영 길드가 아니라면 어디 가서 회계사와 전문 경영인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게……. 이런 종류의 인력시장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참 아쉽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모든 직업군이 널린 인력시장이 있다면 굳이 경영 길드를 찾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죠…… 음, 인력시장?”
아쉬운 마음에 우스갯소리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텐의 눈동자에 느낌표가 떠올랐다.
“있었네요, 인력시장.”
“그게 무슨 말이야?”
“어찌 됐든 회계사와 경영자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회계사의 경우엔 최소한 자격증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밑바닥 인생들 중에는 회계사 출신도 경영자 출신도 있는 법이니까요.”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텐은 헨리를 데리고 비발디 타운의 뒷골목을 찾았다.
“여긴 어디지? 처음 보는 곳인데?”
“일단은 배니쉬 골목이라고 불리고 있긴 합니다만, 저희들 사이에선 사채 골목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합니다.”
“사채 골목?”
배니쉬 골목, 통칭 사채 골목.
비발디 타운에서 활동하는 고리대금업자들이 대부분 몰려 있는 곳이었다.
텐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에는 유흥과 도박에 자산을 탕진하고 끝끝내 사채까지 끌어다 썼지만 결국 돈을 갚지 못하여 목숨을 저당 잡힌 이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텐은 그렇게 목숨을 저당 잡힌 이들 중에서 회계사와 경영자 출신들을 고용할 것을 추천했다.
“음, 나쁘지 않은 전략인 것 같긴 한데…… 일단 그럼 사람들 상태부터 한번 보고 결정하자고.”
“알겠습니다.”
오래 써야 할 직원을 구하는 일이었다. 아무나 뽑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헨리는 일단 사람들 상태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이윽고 텐은 그나마 친분이 있는 사채업자인 ‘하이샤’가 운영하는 ‘천사의 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