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반 (4)
“반 님!”
반을 발견한 하즈가 잔뜩 울상이 된 얼굴을 하고서 반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그러나 뒤늦게 나타난 헨리를 보고서 다시금 뒷걸음질을 쳤다.
“히익!”
“반성은 잘하고 있었나?”
“반 님, 반성이라니요!”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동생한테 휘둘렸다면서?”
“도, 동생이라니요? 누, 누가 동생이란 말입니까!”
“헨리와는 오늘부터 형제처럼 지내기로 했다. 그러니 너도 지금부턴 헨리를 대할 땐 나를 대하듯 깍듯이 모시도록 해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못 하겠냐?”
“아, 아닙니다……. 그건 아닌데…… 하, 이게 무슨…….”
“시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또한 하즈 시장님을 존중해 드릴 생각입니다.”
반이 순식간에 서열을 정리해 주자 하즈는 울상이 되었고, 헨리는 웃음꽃을 피웠다.
호칭이 정리되자 헨리는 곧바로 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이제부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 사람은 본격적인 회의를 위해 하즈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헨리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계획들을 두 사람에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얼마 뒤, 잠자코 설명을 듣던 반이 말했다.
“……그러니까, 전문 운영 팀을 꾸려서 앙켈만을 관리하자?”
“그렇습니다. 어차피 모든 자유도시들은 귀족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에 봉착해 있습니다. 놈들은 자유도시들의 실적이 떨어지는 순간,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자신들이 직접 도시를 운영하겠다고 할 게 뻔합니다.”
그러나 하즈가 지적했다.
“하지만 아무리 전문 운영 팀을 꾸린다고 해도 항상 좋은 실적을 낼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은행원답게 꽤나 날카로운 시각으로 헨리의 계획들을 분석하고 있었다.
“좋은 지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앙켈만과 비발디 타운 간에 도시 협약을 체결시킬 생각입니다.”
“협약요?”
“일종의 교류입니다. 처음부터 많은 것을 나누어 가질 수는 없겠죠. 하지만 점점 더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게끔 구조를 짠다면, 귀족 놈들도 섣불리 운영권을 탐낼 순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은…… 일부러 부채 같은 걸 만들어 놓자는 얘깁니까?”
“겉으로 보기엔 부채처럼 보이겠죠. 하지만 금전적 부채를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도시의 운영권을 따내기 위해선 운영권자가 그 부채까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테니 그 부채처럼 부담스럽게 보일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죠.”
“흠…… 좋은 생각인 것 같긴 한데, 과연 이 협약에 벤트 시장도 동의해 줄까요? 누가 봐도 비발디 타운이 손해 보는 장사인 것 같은데요.”
“아, 그건 방금 결정이 났습니다.”
“예? 무엇이요?”
“비발디 타운은 이 협약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겠다고 말했거든요.”
헨리의 말에 반이 쿡쿡 웃었다.
그러나 하즈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저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라는 표정을 지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벤트 시장과 저 또한 하즈 시장님과 형님 같은…… 뭐,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설마 그 벤트 시장과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헨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즈 시장이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이내 벤트 시장을 동정하는 얼굴로 뒤바뀌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것 같군요.”
“충분합니다…….”
내심 벤트 시장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던 하즈였기 때문에 그 실망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협약 같은 건 미리 맺어 놓는 게 낫습니다. 그래야 앙켈만이 힘들어졌을 때 비발디 타운이 도움을 주기가 편할 겁니다. 명분이 되니까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야. 명분이 없으면 괜한 오해를 사기 쉬울 테니까.”
헨리의 말에 반이 맞장구를 쳤다.
덕분에 계획은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실은 도시 협약이나 전문 운영 팀 같은 건 꽤 먼 미래에 실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앙켈만의 비선 실세로 군림하고 있는 반을 포섭하기 위해서라도 미래의 계획을 앞당길 필요가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어. 세금 많이 내기로 유명한 도시를 2개나 손에 쥐고 있으면 최소한 돈 마를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이미 용병단 모집 공고를 이용한 특별세로 재미를 톡톡히 본 헨리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자유도시들을 휘하에 두게 된다면, 헨리는 굳이 천만황금의 사업체를 늘리지 않아도 큰돈을 마련하기가 수월해지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헨리, 네 말대로라면, 협약만 체결하면 굳이 전문 운영 팀 같은 건 만들 필요가 없지 않나?”
“아, 그건 순전히 형님을 위해서입니다.”
“나 때문이라고?”
“앞으로 형님은 제가 창설한 밀리언 용병단에 소속되어 저와 함께 움직이시게 될 겁니다.”
“용병단? 굳이 용병단인 이유가 있나?”
“유명세를 떨치기엔 용병단만큼 손쉬운 조직도 없습니다. 무력을 키우는 데 별다른 명분이 없어도 되고 말입니다.”
“그렇군.”
“아무튼 앞으로 용병단 일을 하시게 되면 자연스레 도시 운영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 그 전에 전문 운영 팀을 꾸리려는 것입니다.”
헨리가 한창 반에게 운영 팀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할 때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하즈가 대뜸 미간을 찌푸리며 이견을 제시했다.
“잠깐만요! 제가 듣기에는 꼭 제가 못 미더워서 운영 팀을 만드신다는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하즈는 오랫동안 반의 감시하에 깨끗한 운영을 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반이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 이 깨끗한 운영이 지속되기 위해서라도 반을 대신해 도시를 청렴하게 운영해 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냥 잠자코 시키는 대로 해.”
“반 님!”
헨리의 의도를 파악한 반이 하즈의 의견을 묵살하려고 했다. 그러자 반에게 단 한 번도 대든 적이 없던 하즈가 처음으로 발끈했다.
“둘 다 진정하세요. 확실히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래요! 한번 말씀을 해 보십시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저와 함께하셔 놓고선 아직도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솔직히 못 미덥진 않았다.
하지만 치밀함을 요구하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만약의 가능성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헨리는 이쯤에서 채찍이 아닌 당근을 꺼내 들기로 했다.
이럴 때일수록 섭섭한 감정을 방치시키면 훗날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님, 그런 게 아닙니다. 듣기로는 시장님께선 시장으로 취임하신 이후 제대로 된 휴일도 없이 매일같이 일해 오셨다고 하더군요.”
“그거랑 운영 팀이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운영 팀을 꾸린다는 건 업무를 분담해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분담요?”
“현재의 시장님은 시장으로서 수행해야 할 대외 활동과 도시 운영 문제까지 혼자서 감당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그 짐을 덜어 드리겠다는 겁니다. 도시의 운영은 전문 운영 팀이 맡도록 하고, 시장님께선 그저 시장으로서 해야 할 대외 활동만 수행해 주시면 됩니다.”
“그게 그 말씀이잖습니까! 결국 저는 허수아비 노릇이나 하라는 것 아닙니까!”
“따지고 보면 그렇겠네요.”
“뭐, 뭐요?”
“따지고 보면 허수아비가 맞습니다. 근데 그게 왜요. 허수아비는 싫습니까?”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흥분이 극에 달해 얼굴이 시뻘게진 하즈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이에 헨리가 뻔뻔한 표정으로 차갑게 대꾸했다.
“왜죠?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당장이라도 속 시원하게 대답할 줄 알았던 하즈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그것을 본 헨리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대답 못 하겠지. 너는 오랫동안 우리한테 시장으로서 길들여져 왔으니까.’
그렇다. 사실 하즈는 오랫동안 반의 감사에 대한 공포에 길들여진 상태였다.
그것은 일종의 노예 증후군이었다.
사람은 오랜 세월 노예로 지내게 되면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차고 있는 족쇄에 자부심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하즈가 앓고 있는 착각이었다.
“시장님, 시장님께선 지난 십몇 년간 앙켈만의 시장으로서 성실하게 일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드리려는 겁니다.”
“기회……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허수아비가 뭐 어때서 그러십니까? 시장이라는 좋은 명함 달고 남은 인생을 누리십시오. 그동안 제가 시장님을 대신해서 앙켈만을 최고의 도시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헨리의 달콤한 속삭임에 하즈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좋은 명함과 남은 인생, 그리고 최고의 도시.
무엇 하나 그를 흥분시키지 않는 단어가 없었다.
끝으로, 헨리는 하즈의 결심을 굳혀 줄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시장님.”
“예, 예?”
자신의 장밋빛 노후를 상상하던 하즈가 황급히 대답했다.
“앞으로는 여태껏 받아 왔던 봉급의 세 배를 지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드리는 보너스입니다. 그리고 지난 세월 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휴가나 병가, 연차가 있다면 마음껏 쓰도록 하십시오. 그 또한 제가 보장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헤, 헨리 경!”
짊어져야 할 의무를 덜어 주고 더한 쾌락을 안겨 준다.
은행원 출신의 하즈를 구워삶기란 이렇게나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하즈를 구워삶는 헨리를 보며 반은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에게서 마치 전생의 대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 대공의 제자야.’
헨리의 말에 감동한 하즈가 헨리의 손을 붙잡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헨리 경, 저는 그런 뜻인 줄도 모르고 그만……!”
됐다. 이것으로 하즈는 앞으로 더욱더 훌륭한 허수아비 시장이 되어 줄 것이다.
‘후후, 귀여운 녀석.’
예나 지금이나 하즈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믿음이 갔다. 초심을 유지하는 사람은 드문 법이니까.
“일단은 이 정도가 전부겠네요. 협약에 대한 자세한 안건은 전문 운영 팀을 꾸린 뒤에 협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지.”
“그럼 이제 남은 일은…….”
계획의 대략적인 설명을 마친 헨리는 그제야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일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가령, 반을 끌어내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도와준 ‘배우들’의 존재 같은 것 말이다.
“시장님, 혹시 제가 데리고 온 사람들 아직도 응접실에 있습니까?”
“그들 말입니까? 계속 기다리고 있긴 합니다.”
“그럼 응접실로 갑시다. 언제까지고 그들을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까요.”
연극이 끝났으니 배우들을 퇴근시킬 필요가 있었다.
* * *
응접실에는 여전히 헨리의 해독제를 기다리는 불쌍한 어린양들이 노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헨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헨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제일 먼저 호텔 지배인이 헨리 앞으로 다가와 몸을 떨었다.
“저, 저, 헨리 경? 그, 그 약속하신 건 언제쯤…….”
“이것 말씀이십니까?”
헨리가 품에서 해독제로 추정되는 알약 한 움큼을 꺼냈다. 그런 다음 그에게 알약을 쥐여 주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가 보셔도 좋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알약을 받아 든 그가 허겁지겁 입안으로 약들을 털어 넣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린다 또한 다급해진 표정으로 헨리에게 말했다.
“헤, 헨리 경, 저는요! 아, 아니, 저희 것도 주십시오!”
“방금 그게 마지막이었는데?”
“예,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 전에 지배인이 먹은 게 전부라고. 더 이상은 없어.”
“아…… 아아, 아아……!”
털썩.
더 이상 해독제가 없다는 말에 린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물들었다. 물론 그것은 나머지 두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본 헨리가 낮게 웃었다.
“가 봐. 혹시 알아, 지배인한테 약이 조금 남았을지? 해독제는 한 알이면 충분하거든.”
불현듯 린다의 머릿속에 지배인의 손에 한 움큼의 약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헨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사람은 벌에 쫓기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우당탕탕!
그 모습을 본 반이 물었다.
“저놈들, 왜 저러는 거야?”
“제가 독약을 먹였거든요. 사흘 내로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고통스럽게 죽는 독약을요.”
“뭐? 그게 정말이야?”
“아뇨, 당연히 거짓말입니다.”
“장난이 짓궂군.”
“오밤중에 제 침실에 침입한 놈들입니다. 저 정도 벌은 꽤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쯧쯧, 불쌍한 놈들.”
약을 먹은 지 하룻밤이 지났으니 이제 이틀 정도가 남았다.
이틀이면 그들이 인생을 돌아보며 진심 어린 참회를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라고 헨리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