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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클 마법사의 환생-52화 (52/522)

# 52

반 (3)

우스운 것이 당연했다.

자신은 황궁에서도 손에 꼽히던 실력자였고 눈앞의 헨리는 아직도 러너급에 머무르는 한낱 조무래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대련 요구는 무지한 자의 만용인 것일까?

하지만 반은 헨리의 눈빛에서 만용의 기운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비장의 수라도 감추고 있나 보군.’

그렇지 않은 이상 소드마스터에게 대련을 신청하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다.

“좋다. 대신 자신 있게 내뱉은 만큼 나를 실망시켜선 안 될 것이다.”

“물론입니다.”

헨리는 반이 대련을 승낙해 줄 것이란 건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앞서 열거한 사실들이 그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시켰을 테니까.

‘아무리 반이 소드마스터라지만 녀석도 결국엔 제국 검술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니 헥터의 검술을 익힌 나라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것이 헨리가 내린 판단이었다.

게다가 검기가 아닌 오로지 검술만으로 맞붙을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감은 충분했다.

“장소를 옮기도록 하지.”

* * *

시청의 지하에는 거대한 연무장이 숨겨져 있었다. 반이 스스로를 단련하기 위해 비밀리에 마련한 곳이었다.

대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헨리가 말했다.

“반 경.”

“말해라.”

“제가 비록 실력을 입증해 보이겠다고는 했으나 반 경에 비하자면 한참이나 모자란 실력입니다.”

“그래서? 이제 와서 꼬리를 내리려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러면?”

“제가 반 경을 쓰러뜨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그러니 제가 반 경의 기대치를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의 적정선을 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상극이 되는 검술을 익혔다고는 하나 상대는 무려 황궁 출신의 최상급 소드마스터다.

그 때문에 헨리는 자신을 낮춰서라도 핸디캡을 만들어 두기로 했다.

반은 흔쾌히 허락했다.

“좋다. 그럼 네놈이 나에게 세 번의 유효타를 먹인다면 그때는 네 실력을 인정해 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세 번의 유효타. 아직 맞붙어 보지는 않았으나 헨리는 세 번 정도는 어렵지 않게 먹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합의가 이루어진 후 두 사람은 연무장의 목검을 나누어 가졌다. 그리고 거리를 벌렸다.

두 사람은 똑같은 제국 검술의 기본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헨리의 겨눔세를 본 반은 생각했다.

‘역시나 제국 검술인가.’

제국의 검사들 대부분은 황제가 만든 검술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앙켈만이 왕국이었던 시절에 익혔던 검술보다 전 황제 골든 잭슨의 검술이 훨씬 더 효율성이 좋았기 때문이다.

“처음을 양보하지.”

“감사합니다.”

선공은 하수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은 선공을 양보했다. 헨리는 이에 감사 인사를 올리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서클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원이 좁혀졌다. 그리고 2개의 원이 맞닥뜨린 순간, 헨리는 순식간에 헥터 스텝으로 보법을 바꾸었다.

딱!

“……?”

궤도를 그리며 탐색전부터 시작할 줄 알았던 헨리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반의 허리를 타격한 것이다.

대련이 시작되자마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게다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움직임이었기에 반은 허무하게 선점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한 번입니다.”

헨리가 허리에 닿은 검을 회수하며 말했다.

“이거…… 내가 너무 얕보고 있었던 모양이군그래.”

자신의 허리를 친 검은 무게가 실린 타격이 아닌 가벼운 접촉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말인즉슨 당연히 허리에 검이 닿을 줄 알고 일부러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는 이야기였다.

“허허, 그런 수가 있었단 말이지.”

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방심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두 번은 허용치 않는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했다. 실수가 두 번이 나온다면 그것은 실수가 아닌 실력이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헨리는 본능적으로 반의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감지했다.

‘지금부터가 진짜인가.’

요행이 통하는 것은 한 번뿐이었다. 대련은 지금부터가 진짜였다.

반은 분명 웃고 있었다. 그는마치 사람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얼굴을 하고서 초연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하지만 실수를 인정한 그가 다시금 목검을 잡는 순간, 그의 목검은 진검이 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오싹.

목검을 쥔 헨리의 두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 정도일 줄이야…….’

반은 분명히 좀 전까지만 해도 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국 검술의 사용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치 손톱이 잘 벼려진 매가 하늘 위에서 먹잇감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다른 사람과 조우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헨리는 땅에 붙은 두 발이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강해졌구나.’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헤어진 1년 전에 비해 반의 경지가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실의에 빠지기는커녕 수련을 더 깊게 했다는 뜻. 자신이 죽고 나서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걸까. 반은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헨리는 그런 반이 기특했다. 그동안 자신을 잊지 않아 줬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헨리가 내기를 제안한 것은 어디까지나 1년 전의 반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외운 마법 무장과 검왕 헥터로부터 전수받은 헥터의 검술, 그리고 자신이 마물의 숲에서 지난 1년 동안 수련했던 검술을 이용한다면 반을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승부는 볼 수 있으리라 자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격차가 커지면 예상이 어긋나 버린다.

하지만 헨리는 겁을 먹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즐겁기까지 했다.

첫째는 반이 강해졌다는 사실에 기뻤고, 둘째는 그런 반을 상대로 자신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다는 사실에 즐거웠다.

마음 한구석에 호승심이 고개를 든 것이다.

‘나도 어느새 검사가 다 되었구나, 승부욕도 다 느끼고. 마법사일 때는 그런 검사들의 감성적인 사고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말이지.’

그런 헨리의 모습이 전해진 걸까.

“웃어?”

반은 그런 헨리의 모습이 못마땅했던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약간 오해가 있었던 듯했다.

그러나 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상황이어야만이 반이 전력을 다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여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던 반이 처음으로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팟!

반의 몸이 움푹 내려앉는다 싶더니 어느새 헨리의 앞에 나타났다.

반은 딱딱한 표정 그대로 검을 세차게 아래로 내리그었다. 단 일격에 헨리를 쓰러뜨리겠다는 그의 의지가 잔뜩 묻어나는 검이었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덮쳐 오는 듯한 기세였다.

헨리는 본능적으로 검을 앞으로 찔러 넣었다.

쾅!

검과 검이 거세게 충돌했다.

헨리의 검은 반의 검을 십자 형태로 겨우 틀어막은 채, 헨리의 이마에서 단 5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지근거리에 멈춰 서서 파르르 떨리는 중이었다.

반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더 꿈틀거렸다.

‘이걸 막았다고?’

약간이었지만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 전력을 다해 내려친 일격이 막힐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반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의 입꼬리 아래로 마치 흉포한 맹수의 그것과도 같은 송곳니가 살짝 드러났다.

“건방지게 굴 만한 자격은 있군. 좋아, 인정해 주지. 그럼 이것도 한번 막아 봐라.”

반은 다시 한 번 더 한 걸음을 내딛으면서 이번에는 검을 우측으로 크게 돌렸다.

휭, 휭, 휭-!

목검이 매서운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도저히 동체 시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오러가 실리지 않았을 뿐이지, 반이 휘두르는 목검은 이미 거센 해일이나 다름없었다.

따다닥! 헨리는 뒤로 물러서면서 연거푸 반의 검을 계속 쳐냈다.

두 눈은 반의 목검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당장 그의 육안으로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어 마법의 도움을 빌리기까지 했다.

‘타겟팅으로도 잡는 게 겨우라니……! 역시 대단하다!’

타겟팅은 적수로 지정한 상대의 공격을 미리 포착해, 그것을 선점하는 효과를 가진 마법이었다.

원래는 상대 마법사들의 캐스팅을 무효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창안되었지만, 헨리는 이 마법을 검술에 접목시키면서 상대의 투로를 미리 예측하고 차단시키는 역할로 주로 쓰고 있었다.

‘이게 반이었단 말이지?’

헨리는 반의 검을 계속 쳐내면서 이를 악물었다. 자꾸만 뒤로 물러서게 된다. 이 거친 풍랑 속에서 어떻게든 길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다 어느새 뒤쪽 벽에 부딪쳤다.

쾅!

반의 목검이 아슬아슬하게 헨리의 머리 옆을 지나 벽에 틀어박혔다. 분명 목검이 충돌했는데도 불구하고 벽이 부서져 나갔다.

“뭐지? 제대로 실력을 검증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도망치는 게 그런 검증이더냐?”

반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헨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다를 겁니다.”

“뭐?”

반이 코웃음을 치면서 목검의 방향을 돌리려는 순간, 헨리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헤이스트, 헤이스트, 헤이스트.’

몸을 빠르게 가속시키는 마법이 3개나 연달아 중첩되면서, 한순간 육체의 움직임이 눈 깜짝할 사이에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헨리는 자세를 숙이면서 사선을 가르며 들어오는 반의 투로를 아슬아슬하게 빗겨 낸 뒤, 단숨에 녀석의 품속으로 깊숙하게 파고들면서 목검을 찔러 넣었다.

“흡!”

갑자기 빨라진 속도에 반은 순간 당황했다. 재빨리 검을 안쪽으로 당기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헨리가 반의 약점을 공략했다.

따악!

헨리의 목검이 반의 왼쪽 어깨를 강하게 찔렀다. 충격으로 반의 몸이 뒤로 움찔 밀려나자, 헨리는 미리 메모라이즈해 두었던 다음 마법을 발동시켰다.

‘블링크.’

헨리의 몸이 제자리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반의 반격기가 헨리가 사라진 자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반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헨리가 마검사였단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은 헨리가 실전에서 마법과 검술을 이렇게 번갈아 가며 사용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블링크를 사용한 헨리는 어느덧 반의 등 뒤를 점하는 중이었다. 헨리는 헥터가 가르쳐 준 보법을 밟으면서 몸을 부드럽게 돌려 반의 목덜미에 목검을 갖다 댔다.

“끝났습니다.”

목검이 아닌 보검이었다면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마법을 사용한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렇군. 어쩐지 몸놀림이 기형적이라더니…….”

“속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마법 또한 네 힘의 일부. 비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반은 대범한 남자였다. 헨리가 마법을 사용해 이겼든 어찌 됐든 간에 담담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더불어 이번 대련을 계기로 반은 약간이나마 무시하고 있던 편견마저 완전히 뒤엎기로 했다.

‘마검사라…… 과연, 대공다우십니다.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놈을 찾으신 겁니까?’

여러모로 헨리의 제자라는 사실이 반의 판단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윽고 장내의 분위기는 빠르게 환기되었다. 가득했던 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두 사람의 분위기를 더더욱 돈독하게 만들었다.

“그럼 약조하신 대로 복수에 동참하시는 겁니다?”

“그래, 좋다!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 할 수도 없는 법. 너의 그릇은 내 충분히 보았다.”

전생의 아랫사람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건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기분이 딱히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뿌듯했다. 반씩이나 되는 자의 인정은 어디를 가든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반 경.”

“반 경은 무슨.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인데 딱딱하게 경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형이라고 불러라.”

“하하, 알겠습니다. 형님.”

“그래. 그럼 이제 반성 중인 하즈한테 가 보자꾸나.”

증명은 끝났다. 헨리는 비로소 자신의 검으로 불린 남자를 다시 한 번 자신의 칼집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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