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하즈 시장 (4)
새벽이 깊었다. 좀처럼 잠을 자지 않는 헨리였지만 오늘은 혹시 모를 밤손님을 위해 일부러 침대에 몸을 뉘었다.
끼이이익.
예상은 적중했다. 새벽이 깊어졌을 무렵, 굳게 잠긴 헨리의 방문이 거짓말처럼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으로 복면을 쓴 밤손님들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침대를 향해 접근했다.
끄덕.
남자들은 서로 사인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품에서 수면 독을 적신 천을 꺼내 곤히 잠든 헨리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한참 뒤, 남자는 천을 거두고 헨리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려고 헨리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건 안 되지.”
그런데 그 순간, 헨리가 납치범의 손목을 붙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슬겅!
당황한 나머지 놈들이 검부터 뽑아 들었다.
손목을 붙잡힌 남자 또한 황급히 손을 뿌리치려 하였으나 헨리의 악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크악!”
쿵!
남자는 결국 조여 오는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 어떻게……!”
코끼리도 잠재우는 수면 독이었다. 그런 수면 독을 호흡기에 집어넣었는데 태연하게 일어난다는 것은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내가 이런 독 장난에는 신물이 나는 사람이라서 말이야…… 근데 너네는 계속 보고만 있을 거냐?”
“죽이면 안 된다! 생포해!”
“생포?”
전력을 다해도 이기지 못할 텐데 생포라는 말에 헨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붙잡힌 남자의 명령에 나머지 두 놈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오기 시작했다.
“그럼 어디…… 반이 얼마나 대단한 놈들을 보냈는지 한번 확인해 볼까?”
헨리가 이곳에서 묵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하즈뿐이었다. 그러니 저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분명히 낮에 흘린 퇴치 가루의 제조법일 터.
헨리는 거리를 좁혀 오는 두 놈들의 얼굴에 순식간에 주먹 한 방씩을 먹여 주었다.
쿵.
“뭐야? 설마 기절?”
그런데 두 놈 다 일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어이가 없었다. 나름대로 실력자를 기대했건만 이처럼 형편없는 조무래기들일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헨리는 먼저 붙잡고 있던 놈의 손목을 강하게 비틀었다.
“으아아악!”
생각보다 너무 강하게 비튼 나머지 손목뼈가 탈골되고 말았다. 감히 자신의 얼굴에 수면 독 따위를 들이댄 대가였다.
헨리는 남자의 손목뼈가 완전히 탈골된 뒤에야 놈을 풀어 주었다.
“흐흐윽…….”
남자는 퉁퉁 부어오른 손목을 붙잡고 고통으로 흐느꼈다.
저항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항하기엔 헨리의 무력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흐느끼는 납치범을 내려다보며 헨리가 말했다.
“누가 보낸 놈이냐?”
“그, 그냥 저희끼리 작당한 것입니다. 낮에 우연히 포자들을 제거하시는 걸 보고…… 으아악!”
말이 길다. 솔직하지 못한 놈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다.
그래서 헨리는 거짓말쟁이의 허벅지를 으스러뜨리듯 짓밟았다.
“마지막 기회다. 이번에도 거짓말을 한다면 평생 두 다리로 걷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저, 정말입니다! 믿어 주세요! 아니, 믿어 주십시오! 제발!”
헨리가 더욱 강하게 엄포를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눈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하고서 손이 닳도록 비벼 댔다.
‘흠…… 정말로 그냥 좀도둑인가?’
일격에 쓰러지고 가벼운 완력에 무너진 놈들이었다.
무슨 재주로 여기까지 들어온 건진 잘 모르겠지만 하즈나 반이 이렇게 멍청한 녀석들을 납치범으로 보냈을 리는 없을 듯했다.
“이름.”
“리, 린다입니다!”
“그래, 린다. 정말로 너희 셋이서 작당한 일이라고?”
“그렇습니다! 저희들은 정말 선생님께서 이끼를 퇴치하시는 걸 우연히 보고 제조법을 빼돌리려고 한 게 전부입니다!”
“정말 그렇단 말이지?”
“예, 예! 정말입니다! 정말이고말고요!”
헨리가 약간의 믿음을 보이자 남자는 한층 더 격해진 목소리로 진실을 고했다.
그러나 헨리는 이내 다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냐, 내 생각엔 하즈 시장이 내 제조법을 탐내서 너희들을 보낸 것 같다.”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게, 그게 무슨 말일까? 그건 좀 더 맞다 보면 알아서 깨닫지 않을까?”
“예, 예? 그게 무슨…… 으아악!”
말을 마친 헨리는 다시금 녀석의 허벅지를 지르밟았다.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녀석들이 정말로 단순한 좀도둑일 수도 있었지만, 새벽에 이런 난리를 피웠으니 오늘 밤은 글러 먹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헨리는 계획을 변경해 새로운 명분을 만들기로 했다. 직접 하즈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명분을 말이다.
‘사일런트 룸.’
딱!
헨리가 손가락을 튀기자 방 안에 절대적인 침묵이 작용됐다. 본격적인 작업에 앞서 혹시 모를 소음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폭력이 시작됐다.
헨리는 녀석의 팔뚝과 허벅지, 그리고 복부 등을 짓누르며 비교적 점잖은 고통을 선사했다.
“으아아악!”
얼마 뒤, 만신창이가 된 린다는 눈이 풀리고 침을 질질 흘리며 온몸을 떨었다.
딱.
사일런트 룸을 해제한 헨리가 몸을 숙여 린다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더 할까?”
“제발…… 제발 믿어 주십시오…… 제발…… 정말 잘못했습니다…….”
“맞아. 너는 내 퇴치 가루를 탐낸 하즈 시장이 보낸 자객이다. 그리고 너희 패거리는 나한테 들켜서 생포당한 것이고. 그렇지?”
“그, 그게 무슨…….”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더 맞을래?”
“아, 아닙니다! 맞습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저희는 하즈 시장이 보낸 자객입니다!”
“진작에 그래야지.”
이로써 하즈의 자객을 생포했다.
하지만 헨리는 그에 만족하지 않고 품에서 조그마한 알약 하나를 꺼내 린다의 입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삼켜.”
헨리의 명령에 린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삼키지 않으면 또다시 고통이 시작될 테니까.
“방금 삼킨 약은 사흘 안에 해독제를 먹지 못하면 온몸의 피가 검게 변하며 죽는 맹독이다. 날이 밝는 대로 너희들을 데리고 하즈 시장한테 갈 생각인데…… 뒷일은 말 안 해도 잘 알겠지?”
“아,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 두 놈한테도 이걸 먹여 놓을 테니 알아서 잘 교육시켜 놓도록.”
말을 마친 헨리는 기절한 나머지 두 놈에게도 똑같은 약을 먹였다.
그런 다음 포승줄로 놈들을 묶은 뒤, 이번에는 자는 척이 아닌 진짜 수면을 취했다.
* * *
“잘들 잤냐?”
오랜만에 푹 잔 헨리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방 한쪽에는 포승줄에 묶인 채 피떡이 되어 있는 납치범 삼인방이 널브러져 있었다.
헨리는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린다를 제외한 나머지 두 놈의 발목부터 짓밟아 으스러뜨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으아아악!”
헨리는 한동안 말없이 놈들을 밟으며 지독한 고통을 선사했다.
그리고 마침내 발길을 거두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래야 공평하지.”
과연 전직 대현자다운 공평함이었다.
헨리는 이어서 호텔의 지배인을 호출했다.
이대로 놈들을 연행해서 시청에 간다고 한들 하즈가 잡아뗀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헨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들의 존재를 증명해 줄 ‘확실한 증인’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나타난 지배인이 만신창이가 된 삼인방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에 헨리가 수면 독이 묻은 천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간밤에 저를 습격한 놈들입니다. 제가 가진 것을 노리고 온 좀도둑들이지요.”
“그, 그런 일이! 당장 치안대를 불러 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끝입니까?”
“예, 예?”
헨리가 되묻자 당황한 표정을 짓는 지배인.
그러나 사태를 파악했을 땐 이미 한참이나 늦은 뒤였다.
“말귀가 어둡네. 지금 내가 묵고 있는 이 호텔, 듣기론 여기가 앙켈만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던데 그게 아닌가 봐?”
“그, 그렇습니다만…….”
헨리가 묵고 있는 호텔은 앙켈만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숙박 시설로, 귀족이나 돈 많은 상인에게 인기가 많은 ‘할래건’이라는 호텔이었다.
“기본적인 방범도 안 되는 곳이 무슨 고급 호텔이야? 당신들 각오해. 이놈들만 처리하고 나면 이곳의 열악한 방범 시설에 대해 고발할 테니까.”
서민들이 아닌 귀족이나 재벌만 상대하는 곳이 바로 할래건 호텔이었다.
그런데 그런 고급 호텔이 기본적인 방범도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라고 소문이 난다면?
지배인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헤, 헤, 헨리 경! 잠시만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오해? 무슨 오해?”
“저희 할래건 호텔은 앙켈만의 모든 숙박 시설들 중 최고의 방범 시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은 당최 어떻게 된 건지 저도 잘…….”
“그래서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 아닙니다! 저는 다만 이놈들이 어떻게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러니 조금만 더 침착하게 사태를 파악해 보는 게 어떨까요?”
무슨 말을 내뱉어야 할지 모를 것이다.
헨리는 횡설수설하는 지배인을 뒤로 물린 뒤 린다에게 턱짓하며 물었다.
“야.”
“예, 옙!”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호텔 뒤편에 난 담장의 개구멍으로 들어왔습니다.”
린다의 입에서 확실한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들었지? 그리고 당신은 지배인으로서 제일 먼저 죄송하다는 말부터 해야 되는 거 아냐?”
“헤, 헨리 경!”
헨리의 차가운 냉소가 떨어지자 지배인이 즉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서 제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습니다! 배상은 만족하실 만큼 해 드릴 테니 부디 고발만은 제발……!”
장사치인 지배인에게는 돈이 자존심보다 중요했다. 그는 귀족이 아닌 평민이었기 때문이다.
“만족할 만큼이라고?”
“그렇습니다! 어떤 것이든 들어드릴 테니 부디 소문만은 제발……!”
“그래, 그렇단 말이지?”
지배인은 생각했던 것만큼 아주 멍청하진 않았다.
지배인으로부터 확답을 받아 낸 헨리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그는 린다에게 그랬던 것처럼 지배인을 확실한 증인으로 만들기 위해 알약 하나를 꺼내 들었다.
* * *
“시, 시장님!”
“뭐야, 무슨 일이야?”
“응접실에 손님들이 오셨는데,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 무슨 문제?”
“그, 그게…… 헨리 경이 웬 남자 셋을 묶어 왔는데, 할래건 호텔의 지배인도 함께 왔습니다.”
“뭐?”
시장실에서 서류 업무를 보던 하즈가 웰의 보고에 황급히 응접실로 달려 나갔다.
웰이 말한 대로 헨리와 할래건 호텔의 지배인, 그리고 피떡이 된 낯선 남자 세 명이 포승줄에 묶여 있었다.
이에 하즈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헨리 경이 아니십니까? 아침부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
헨리는 대답 대신 수면 독이 묻은 천 조각을 하즈에게 던졌다.
“이, 이게 뭡니까……?”
“뭐긴, 네가 보낸 자객들이 나한테 사용한 수면 독이지.”
“자, 자객요?”
자객이라는 말에 하즈와 웰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증거는 이미 충분하니까 어색한 연기는 이제 그만 집어치우는 게 어때?”
“헤, 헨리 경!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모르겠다고? 야, 네가 직접 말해 봐.”
헨리가 턱짓으로 린다를 가리키자 피떡이 된 린다가 하즈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시장님…… 죄송합니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너 누구야!”
“시장님께서 시키신 대로 제조법을 훔쳐 오려고 했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셋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린다가 뻔뻔하게 연기를 이어 나갈수록 하즈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들었지?”
“개소리 집어치워! 어디서 양아치 같은 놈들 몇 놈 잡아다가 교육시켰나 본데, 그딴 술수에 내가 당할 것 같아?”
“양아치 몇 놈? 지배인님, 지금 지배인님보고 양아치라고 하는데요?”
이번에는 할래건 호텔의 지배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장님, 간밤에 저 남자들이 시장님의 심부름을 이유로 저희 호텔에 방문하였습니다.”
“뭐?”
“이미 방문 기록지와 문지기들의 증언 또한 확보된 상태입니다.”
지배인은 조작된 방문 기록지를 하즈에게 내밀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럼 설마 지금 앙켈만 최고의 호텔 지배인님께서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야? 할래건 호텔이 어떤 곳인지 알면서도?”
할래건 호텔은 정재계의 인사들이 애용하는 호텔이었다. 그렇기에 하즈는 그런 호텔의 지배인이 절대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하즈 또한 할래건 호텔과 파트너십을 맺고 꽤 오랫동안 협약 관계를 유지해 왔기에 그 누구보다도 할래건의 명성을 잘 알았다.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하즈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미안하게 됐다, 하즈.’
시체처럼 새하얗게 질려 버린 하즈를 보고 헨리는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딱히 악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반을 불러내기 위해서라면 과거의 시시콜콜한 잔정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 잔정 따위를 신경 쓰기에, 헨리는 이미 한 번 비참한 말로를 겪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