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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서클 마법사의 환생-38화 (38/522)

# 38

진짜가 나타났다 (2)

“들어오시랍니다.”

예상했던 대로 시청 문은 순순히 열렸다.

벤트 라르센.

그는 제국에서 작위를 받은 명예 귀족임과 동시에 이곳 비발디 타운을 관리하는 시장이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시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굳건한 체스 챔피언으로 군림해 왔고, 그 명성을 인정받아 유흥과 도박의 상징인 비발디 타운의 관리자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느 놈이야? 어느 놈이길래 그 이름을 가진 것도 모자라 바게스에 대해 알고 있는 거야?’

비발디 타운의 시청은 하늘 높이 솟은 탑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탑을 일컬어 ‘비발디 타워’라고 칭했으며, 비발디 타워를 관리하는 벤트를 ‘비발디의 황자’라고 불렀다.

헨리가 탑의 2층에 위치한 응접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헨리를 발견한 벤트가 대뜸 날카로운 말투로 질문을 던졌다.

“당신입니까, 헨리 모리스라는 사람이?”

“그렇습니다만.”

“실례지만 신분 패를 좀 볼 수 있을까요?”

불신이 가득한 눈빛.

신분 패 검사라면 이미 시청 입구에서 진작 이루어졌다.

하지만 반드시 자신의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가 있다. 벤트가 그랬다.

“얼마든지요.”

헨리가 은으로 된 신분 패를 건네자 벤트는 재빨리 그것을 받아 확인했다.

‘별이 3개…….’

명예로움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제국에선 신분 패에 박힌 별의 개수가 곧 힘이었다.

블랙 등급의 귀인.

벤트는 신분 패를 살피는 척하며 힐끗 헨리를 살폈다.

‘저건 설마 디자이너 실비아의?’

무려 비발디 타운의 시장이었다. 눈썰미라면 한낱 옷 가게 직원보다 몇 수는 위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상하게 생각됐다.

‘은으로 된 신분 패라면 준남작이 분명한데…… 대부호 집안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준남작 주제에 실비아의 옷을 입고 있는 거지?’

준남작은 대부분이 훈장을 받아 명예 귀족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준남작은 대부분이 자그마한 영지 하나가 재산의 전부인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준남작이 실비아의 제품 같은 값비싼 명품을 두르고 있다는 건 조금 어색한 모습이었다.

“확인이 끝나셨다면 이제 그만 돌려주시죠.”

“아, 예, 여기……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귀인인 것도 모자라 제법 부유해 보이기까지 한다. 거기다 전직 대마법사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고, 바게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앞서 열거된 사실들만 하더라도 충분히 경계심을 둘 만한 인물임은 확실했다.

“전부 나가 있어.”

벤트가 손짓하자 응접실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 모두가 바깥으로 나갔다.

이윽고 응접실에는 헨리와 벤트,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이윽고 벤트가 말했다.

“먼저 저를 찾은 이유를 묻기 전에 질문 한 가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바게스 말인데요. 바게스가 무엇인지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알다마다요. 여관 이름이 아닙니까?”

‘그, 그걸 어떻게?’

“궁금증은 해결되셨나요? 그럼 이제 제 용건을 좀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만.”

딱히 마땅한 대답을 내놓진 않았지만 표정에서 이미 모든 것이 드러났다.

“용건이 뭡니까?”

“저랑 체스 한판 두시죠.”

“……예?”

“저랑 가볍게 체스나 한판 두시죠. 그게 용건의 전부입니다.”

“혹시 제가 누군지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알다마다요. 비발디 타운의 시장이자 제국 최고의 체스 챔피언이신 벤트 라르센 경이 아니십니까?”

벤트의 표정에 다시 한 번 당혹감이 스쳤다.

이에 헨리가 오른쪽 손가락을 들어 올려 보이며 말했다.

“물론 체스 마스터이신 벤트 경이 듣기엔 다소 어이가 없으실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그렇죠.”

“그래서 말인데, 만약 저와 체스를 두어 승리하신다면 제가 어떻게 바게스 여관에 대해 알게 됐는지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뭐라고요?”

“사실 그게 거슬려서 직접 저를 보러 오신 게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이 정도 제안이면 꽤 수지맞는 장사가 아닙니까?”

벤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게임에 가장 궁금해하는 것을 내기의 대가로 걸었다.

누가 봐도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났지만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헨리의 파격적인 제안에 벤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할수록 두통만 야기될 뿐이었다. 결국 벤트는 단순하게 생각기로 했다.

“제 별명이 무패의 챔피언인 것은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그래서 도전하는 겁니다. 원래 철옹성은 무너뜨려 보고 싶은 게 보통이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헨리 경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설마 그냥 친선 게임이나 하자고 이 난리를 피우신 건 아닐 테고.”

“제가 질 확률이 더 높은 것 같은데 굳이 상품을 건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럼 어떤 소원이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거래가 성립되자 벤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 다음 응접실 한편에 놓인 서랍장에서 체스 판과 말들을 꺼내 왔다.

“제가 도전자이니 백을 잡겠습니다.”

“그러시죠.”

체스는 전쟁의 축소판과 같다.

한정된 구역에서 각자 능력이 다른 말들을 가지고 선수의 전술을 이용해 상대를 무너뜨리는 게임이다.

비슷한 종류의 게임은 많았지만 체스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까닭은 체스가 제국에서 만들어진 ‘전통 놀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통 놀이를 만든 사람이 바로 나란 말이지.’

그렇다. 체스를 만든 사람이 바로 헨리였다.

사실 체스는 헨리가 살던 지역의 게임을 본떠 만든 아류에 불과했지만, 고향이 사라지고 제국이 들어서면서 아류가 원본을 잡아먹게 되었다.

게임이 시작됐다.

헨리는 여유롭게 선공을 두었으며 벤트 또한 차분한 마음으로 게임에 임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어?”

“체크메이트. 외통수입니다.”

“자, 자, 자, 잠깐만요. 어, 어?”

처음엔 벤트도 차분한 마음으로 게임에 임했다.

10년이 넘도록 해 온 손발과도 같은 것이 체스니까.

하지만 게임이 진행될수록 그는 묘하게 상대에게 끌려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극대화되었을 때, 벤트는 자기도 모르게 외통수를 내주고 말았다.

식은땀이 났다.

지난 10년간 쌓아 왔던 두터운 명성과 무패의 챔피언이라는 명예가 한순간에 박살 나 버렸기 때문이다.

벤트는 전신에 흐르는 식은땀과 축축하게 젖은 손을 가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결국엔 심하게 손을 떨며 체스 판을 흩어 놓았다.

“벤트 경,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괘, 괘, 괜찮습니다. 하, 한 번만 더 다시 두시죠.”

“그럼 이번엔 제가 흑을 잡겠습니다.”

10여 년 만에 잡는 백.

벤트는 10년 만에 도전자의 입장에 서서 백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의 일이었다.

“이번에도 외통수입니다.”

와르르!

두 번째 게임은 첫 번째보다 훨씬 더 빨리 끝났다. 그것도 더욱 압도적인 실력 차로 말이다.

게임이 끝나자마자 벤트는 누가 볼세라 황급히 체스 판을 엎어 버렸다. 그리고 오한이 나는 사람처럼 몸을 심하게 떨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게임이 한순간에 박살 나고 말았다. 그러니 그에 따른 후유증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벤트를 보며 헨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깝네요. 공식전이었으면 ‘킹 슬레이어’라는 호칭과 함께 어마어마한 상금을 손에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방금 전에 둔 게임은 구경꾼 하나 없는 비공식전.

즉 헨리가 아무리 벤트를 이겼다고 떠들어 봤자 그것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그런 헨리의 말에 벤트는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 그래요! 이건 비공식전이야! 전 피곤해서 이만 쉬어야겠어요. 그,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

존대와 반말이 뒤섞인 걸 보니 충격이 어마어마한 듯했다.

헨리는 한동안 그런 벤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왜, 왜요! 왜 쳐다봅니까!”

“다시 하시겠습니까?”

“뭐, 뭐요?”

“삼세판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아무래도 경기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재, 재경기 말입니까?”

“시간은 많습니다. 다시 백을 잡으세요.”

패배에 대한 충격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 혼란 때문에 대화를 나누지 못하면 곤란했다.

‘완전히 박살 낼 필요가 있겠어.’

그래서 헨리는 충격에 대한 반동이 오지 않게끔, 벤트의 정신을 완전히 박살 내기로 결정했다.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벤트는 백을 잡았고 헨리는 흑을 잡았다. 그리고 결과는 또 한 번 헨리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마, 말도 안 돼!”

쾅!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벤트가 주먹으로 체스 판을 내려쳤다.

“시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들어오지 마!”

큼직한 소리에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하인과 비서가 황급히 응접실로 들어오려고 했다. 그에 벤트가 버럭 역정을 쏟았다.

‘목격자가 있어선 안 된다!’

제국 최고라는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지금의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됐다.

그리고 혼란에 빠진 벤트를 보며 헨리는 다시 한 번 슬쩍 미소 지어 보였다.

* * *

그가 진정을 찾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아무리 뜨거운 용암도 결국엔 식는 법.

그러나 식은 벤트는 진정보다는 탈진에 가까운 무기력함이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되셨습니까?”

“당신…… 대체 정체가 뭐요?”

“신분 패라면 이미 보셨잖습니까?”

“같잖은 말장난일랑 집어치우쇼. 지금은 그런 헛소리에 놀아 줄 기분이 아니니까.”

벤트가 묻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도 대답을 회피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녀석, 소심한 건 여전하구만.’

그런 벤트를 보며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만난 제자의 성격이 옛날과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벤트는 헨리에게 체스를 직접 배운 유일한 제자였다.

그리고 그 체스를 배운 장소가 바로 ‘바게스’라는 이름의 여관이었다.

이후, 몇 번 더 벤트를 골려 먹던 헨리는 마침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벤트 경.”

“왜 그러쇼.”

“저는 사실 마법사, 헨리 모리스 님의 두 번째 체스 제자입니다.”

“……뭐라고요?”

다시 한 번 이어지는 헨리의 파격적인 선언.

그것은 무기력하게 식은 벤트의 눈동자를 다시 한 번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바게스 여관은 벤트 경이 스승님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체스를 배운 곳이 아닙니까?”

“마, 맞습니다. 그럼 설마?”

“저는 모리스 영지에서 배웠습니다. 이름과 성이 같다는 이유로 두 번째 제자가 될 수 있었죠. 물론 벤트 경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저보다 한발 빨리 체스를 배운 선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벤트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헨리의 말을 가만히 경청했다.

“저는 이제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뜻을 펼치기 위해 3개의 별을 쌓았고, 더 큰 뜻을 펼치기 위해 이곳 비발디 타운으로 왔습니다.”

“예? 왜 하필 비발디 타운에…… 당신의 큰 뜻이란 게 설마……?”

“아,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는 체스 챔피언 같은 꿈은 가지고 있지 않거든요.”

예상이 빗나가자 벤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무엇을 원하십니까……?”

“10만 골드.”

“예?”

“저는 10만 골드를 원합니다, 벤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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