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진짜가 나타났다 (1)
1년 만에 바깥세상에 나온 헨리.
하지만 큰 감흥은 없다. 단지 이루고자 했던 목표를 전부 채우지 못해 아쉬울 뿐이었다.
그래도 규칙적인 일상에서 벗어나니 후련함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어쩌면 어제까지가 합법적으로 부릴 수 있는 마지막 여유였는지도 모른다.
‘우선은 돈.’
더 이상 군대 같은 시간을 잡아먹는 일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헨리는 1년이나 시간을 낭비한 만큼 곧바로 다음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자유를 얻은 헨리가 가장 먼저 목표로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
돈을 우선 목표로 택한 까닭은 간단했다.
많은 재물만큼 가장 원초적인 힘을 가지는 것도 없었으니까.
‘먼저 비발디 타운으로 간다.’
비발디 타운은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유흥 지역이었다.
유흥 도시인 만큼 귀족 산하가 아닌 제국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었으며, 도시 안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대부분이 제국의 세금으로 거두어졌다.
“가자.”
푸히힝!
1년간 이셀란의 마구간에서 편하게 지낸 덕에 제이드의 몸집은 한층 더 거대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이 둔해지진 않았다. 오히려 잘 먹고 잘 쉰 덕분에 체력이 대폭 늘었다.
헨리를 태운 제이드는 한참을 달렸다.
그러자 슬슬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외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 봐도 엄청나네, 저 성벽은.’
유흥으로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일 수 있기에 제국은 비발디 타운에 아낌없이 투자했다.
그 결과, 비발디 타운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호화로운 도시들 중 하나로 우뚝 솟을 수 있었다.
도시의 입구에 도착했다.
거대한 성문 앞에는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출입하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줄이 몹시 길었다.
과연 향락의 도시다운 명성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남들처럼 줄을 서지 않았다.
대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줄을 앞질러 검문소 앞에서 안장을 내렸다.
이를 본 병사가 헨리의 차림새를 보고 미리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제국군 같은데 여긴 아무리 제국군이라 해도 특별히 봐줄 순 없어. 그러니 저 뒤로 가서 줄 서.”
제국 최고의 향락가였다. 그렇다 보니 어중이떠중이 같은 귀족들은 물론이고 부호나 관료 또한 구름처럼 몰리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엔 특혜 같은 건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쾌락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게 이곳의 슬로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헨리는 말없이 신분 패를 꺼내 보였다.
“아, 글쎄 아무리 이런 걸 보여 줘도…… 어, 어?”
비발디 타운의 병사들은 모두가 황궁 소속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지간한 귀족들 앞에서도 기죽을 필요가 없었다.
병사에 대한 모독은 곧 황궁에 대한 도전이었으니까.
하지만 헨리가 내민 은패를 확인한 순간, 병사의 눈동자가 급격히 확장되었다.
“벼, 별이 3개? 추, 충성! 제가 감히 귀인을 몰라뵙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이제 들어가도 되겠죠?”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이걸 가져가시면 머무르시는 데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황급히 경례를 올려붙인 병사는 품에서 자그마한 카드 한 장을 내밀어 보였다.
‘블랙 카드군.’
좀처럼 혜택이 주어지지 않을 뿐이지 아예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관료 중 실세, 혹은 엄청난 대부호, 그리고 헨리와 같은 명예로운 귀인들에겐 예외적으로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증표가 바로 ‘비발디의 프리 패스’라 불리는 ‘블랙 카드’였다.
“그럼.”
헨리는 짧게 묵례를 해 보인 뒤 제이드와 함께 비발디로 입성했다.
* * *
뿌우우우!
“따끈따끈한 비발디 특제 황금 꼬치 있습니다!”
“젤나의 위스키가 있어요!”
“최강 불꽃 쇼! 지금 시작합니다!”
카드를 받고 타운으로 들어서자 벌써부터 도시의 활기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수많은 노점상은 물론이고 음유시인과 광대의 길거리 공연, 그리고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각종 도박.
이 모든 게 비발디 타운의 ‘특산품’이었다.
‘여전하네, 여긴.’
헨리는 제국을 건설했던 개국공신들 중에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이곳 비발디 타운과의 인연 또한 남달랐다.
도시에 입성한 헨리는 제일 먼저 옷 가게부터 찾았다.
언제까지고 제복만 입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헨리는 주위를 둘러보던 끝에 가장 크고 화려해 보이는 옷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가게의 매니저는 끝이 날카로운 안경을 쓴 빼빼 마른 여자였다.
여자는 헨리를 발견하자마자 인사와 동시에 헨리의 행색을 살폈다.
‘군인? 제복을 보니 장교는 맞는 것 같은데…… 어려 보이는 게, 하급 장교쯤 되겠군.’
제국 상인들은 대부분 직원을 부릴 때 인센티브 제도를 채택했다. 직원이 능력껏 판 만큼 그에 상응하는 보너스를 주는 것.
그러나 하급 장교는 대체로 가난했기에, 그런 손님을 상대로 옷을 팔아 봤자 인센티브는 푼돈에 가까운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판단을 마친 매니저는 곧바로 다른 종업원을 호출했다.
“케이미, 가서 손님 응대하렴.”
“알겠습니다, 매니저님.”
매니저의 명령에 가게의 막내, 케이미가 정리하던 옷가지를 내려놓고 황급히 헨리 앞에 다가와 섰다.
가게에선 돈 안 되는 손님을 ‘찌꺼기’라고 불렀는데, 보통 찌꺼기 처리 담당은 가게의 막내들 몫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제품이라도 있으세요?”
‘말단?’
그리고 그런 차별적인 대우를, 헨리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헨리는 쉬이 내색하지 않고 자신에게 배정된 종업원에게 말했다.
“여기가 비발디 타운에서 가장 큰 옷 가게입니까?”
“네! 저희 옷 가게 ‘슈즈메’야말로 비발디 타운에서 가장 큰 옷 가게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자부심이 넘치네요?”
“그럼요! 슈즈메에서 일하는 건 제 자랑거리들 중에 하나니까요.”
눈망울이 크고 전체적으로 생기가 감도는 여자였다.
그리고 헨리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열정적인 사람을 좋아했다.
‘하급 장교 주제에 똥폼은.’
하지만 그런 헨리를 보며 매니저는 혀를 찼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세련된 척하는 찌꺼기 손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헨리가 주문을 시작했다.
“저는 지금 흰색 셔츠와 검정색 바지를 찾고 있습니다. 아, 바지는 바지통이 슬림한 제품으로요.”
“이런 제품은 어떠세요?”
헨리의 주문에 케이미가 즉시 가까운 곳에 있는 옷들을 추천해 보였다.
추천한 옷들은 보통 옷들에 비해 가격이 조금 있는 제품이었다.
“음, 제 취향은 아닌 것 같네요.”
‘그럼 그렇지.’
비싼 제품을 거절하는 헨리를 보며 매니저는 역시나, 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런 것 말고 혹시 디자이너 ‘실비아’가 만든 제품은 없습니까?”
“네? 누구요?”
“실비아 디자이너 제품 말입니다. 이렇게 큰 가게에도 없다면 어쩔 수 없죠.”
“아, 아닙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디자이너 실비아.
디자이너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리며, 그녀가 만든 옷은 노예가 입어도 귀족으로 보이게 할 만큼 제국 최고의 세련미를 가졌다고 한다.
“시, 실비아라고?”
그리고 동시에 매니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실비아의 제품이라면 가게에서 가장 고가에 거래되는 의류. 그 때문에 한 벌만 팔아도 막대한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는 옷이었다.
“케이미! 잠시만 이리로 오겠어?”
“네? 저 말씀이세요?”
“그래, 너 말이야. 저분은 내가 안내해 드릴 테니까, 너는 여기 있는 옷들을 좀 정리해 주겠어?”
“정리요……?”
“왜, 싫어?”
“아, 아닙니다…….”
무려 실비아의 옷이었다.
인센티브에 눈이 먼 매니저는 처음의 판단과는 달리 대박의 냄새를 맡자마자 곧바로 케이미에게서 손님을 빼앗았다.
그리고 얼마 뒤, 눈대중으로 사이즈를 맞춰 온 매니저가 주문받은 옷들을 들고 헨리 앞에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말씀하신 흰색 셔츠와 슬림한 바지입니다.”
“담당 직원분이 바뀌셨네요?”
“호호, 그 직원은 지금 바빠서 제가 대신 안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요? 뭐, 좋네요. 그럼 그냥 이걸로 하겠습니다. 바로 입고 가도 되죠?”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고객님! 오홍홍홍!”
일부러 제일 비싼 제품으로 골라 왔다. 그런데 헨리는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구매를 결정했다.
매니저의 입꼬리가 귀까지 치솟았다.
헨리는 탈의실에서 제복을 벗고 곧바로 실비아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우와! 옷이 날개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너무너무 잘 어울리세요!”
“그런가요?”
“네~ 제가 이곳에서 근무한 지 벌써 5년이 다 돼 가지만 이렇게까지 실비아 제품이 잘 어울리는 분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고맙군요. 그럼 바로 계산하도록 하겠습니다.”
평민들이 입는 옷 한 벌의 가격은 보통 1실버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비아의 옷은 셔츠 한 벌에 무려 수십 골드를 호가하는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영수증을 받아 든 헨리가 말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호호, 저는 매니저 슐리비아츠라고 합니다.”
“아뇨, 그쪽 말고 처음에 저를 응대해 주신 분요.”
“……네?”
“마침 저기 있네요. 저기요?”
헨리가 손가락을 튀겨 보이며 케이미의 시선을 끌었다.
“그쪽 이름이?”
“저, 저요? 저는 직원, 케이미라고 합니다.”
“골라 준 옷, 마음에 들었어요. 영수증은 그쪽한테 드리겠습니다.”
“네? 저, 저한테요?”
직원들은 손님이 건넨 영수증을 모아 그것을 바탕으로 인센티브를 정산받는다.
그러므로 직원들에게 있어 비싼 제품의 영수증은 보물과도 같은 셈.
헨리의 돌발 행동에 매니저 슐리비아츠가 당황하며 말했다.
“저, 저기요, 손님? 손님께 드린 옷은 케이미가 아니라 제가 골라 드린 건데요.”
“알고 있어요.”
“예?”
“하지만 저는 케이미라는 직원에게 부탁했습니다만?”
헨리는 건네받은 영수증에 케이미의 이름을 서명한 뒤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옷 잘 입을게요. 그럼 수고해요.”
사실 옷 따위야 누가 골라 줘도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헨리가 기분이 나빴던 것은 처음에 자신을 얕잡아 보던 매니저의 눈빛이었다.
‘다음은 구두.’
점잖게 복수를 마친 헨리는 곧 방문할 구두 가게에서도 똑같은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에 드는 구두까지 장만한 헨리는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결 낫네.’
입고 있는 옷들을 사기 위해 1년 동안 받은 급여와 클레버가 가지고 있던 보물 전부를 처분했다.
그야말로 빈털터리가 된 셈.
하지만 별로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제대로 된 옷을 입은 것 같아 흡족할 뿐이었다.
쇼핑을 마친 헨리는 이윽고 도시 중앙에 위치한 ‘하이 스코어’라는 이름의 거대한 게시판 앞에 섰다.
하이 스코어는 비발디 타운에서 일어나는 모든 투기 종목에 대한 최고점과 챔피언들이 기록된 게시판이었다.
‘어디 보자…… 설마 벌써 기록이 깨진 건 아니겠지?’
하이 스코어 앞에 선 헨리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찾았다.’
헨리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추었다.
시선이 멈춘 곳에는 ‘체스’라는 이름을 가진 게임이 보였다.
‘역시 부동의 챔피언이네. 아직까지 자리를 지킬 줄이야.’
하이 스코어에 기록된 최고의 체스 플레이어는 ‘벤트 라르센’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였다.
벤트 라르센은 여태껏 3천 번이 넘는 체스를 두면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제국 최고의 체스 챔피언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말이야.’
헨리는 체스 챔피언이 여전히 같은 사람인 것을 확인하고 다시금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 * *
“시장님, 블랙 등급의 귀인이 시장님을 만나 뵙고 싶어 하십니다.”
“블랙 등급? 누군데 그래?”
“자신을 헨리 모리스라고 밝혔는데, 자세한 용건은 만나서 이야기하겠답니다.”
“헤, 헨리 모리스?”
저녁 식사를 시작하려던 찰나, 벤트 라르센은 헨리 모리스라는 이름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지, 아니야. 헨리 모리스는 죽었잖아. 동명이인이겠지?”
“그렇습니다.”
“깜짝 놀랐잖아!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해.”
“그게…… 혹시라도 접견을 거절한다면 ‘바게스’에서 있었던 일을 알리겠답니다.”
“뭐, 뭣?”
바게스라는 단어에 벤트는 하마터면 의자에서 넘어질 뻔했다.
그리고 식탁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뭐, 뭐 하고 있어! 당장 준비해!”
벤트의 명령에 비서가 바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