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수확 (3)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선 병역 기간 동안은 절대로 요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칼리번의 원칙이다.
그렇다 보니 병사와 장교 모두에게 늘 여흥과 오락거리가 필요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랑’이었다.
티니는 앞만 보고 달려온 여자였다.
그녀는 평민 출신이었으며 마땅한 배경이 없는 대신, 뛰어난 재능과 피나는 노력으로 현재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뛰어난 사람들은 대개 눈이 높다.
또한 자기에게 없는 것을 가진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거나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면에서 티니의 이상형은 이셀란에 가까웠다.
이셀란 또한 평민 출신이었으며 압도적인 재능과 노력으로 일대장이라는 자리를 거머쥐었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이셀란은 그녀의 아버지뻘 되는 나이였고 여자에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그러던 차에 헨리가 나타났다.
“어서 와.”
티니가 사는 관사의 문을 두드리자 목선이 깊게 파인 블라우스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헨리 정도면 괜찮지. 어리지, 똑똑하지, 능력 좋지. 누가 채 가기 전에 반드시 내가 붙잡아 놓겠어.’
티니는 요새 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여군의 성비가 월등히 낮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미래를 개척해 온 여성이었기 때문에 ‘사랑’ 또한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고 싶었다.
“점심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티니 님.”
“사석에선 그냥 누나라고 불러. 업무 시간도 아닌데 딱딱하게 님이라고 부를 필욘 없잖아?”
“그럴까요?”
헨리는 목선이 드러나는 칼라가 낮은 하얀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는 전생의 헨리가 가장 즐겨 입던 방식으로, 단정해 보이면서도 활동성이 편한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파스타 괜찮지?”
“직접 요리하신 겁니까?”
“응, 관사병이 해 주기도 하지만 보통은 내가 하거든. 그편이 훨씬 맛있기도 하고 말이야.”
“요리에 소질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먹어 보면 깜짝 놀랄걸.”
식탁에는 파스타를 비롯한 간단한 고기 요리와 신선한 샐러드가 차려져 있었다.
“우리도 가볍게 반주나 한잔할까?”
“저는 좋습니다.”
“이거, 맨날 대장님께 술로 시달리는 사람한테 억지로 권하는 거 아니야?”
“하하, 대장님처럼 드럼통 단위만 아니면 저도 반주는 좋아합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는 시작됐다.
중대원들 다음으로 자주 보았던 티니였기에 둘 사이엔 어색함이 없었다.
‘평화롭군.’
헨리 또한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에 마음이 흡족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와인을 두 병이나 비워 냈다.
“아~ 간만에 이런 휴일 너무 좋다.”
그녀의 볼이 발그스레하게 물들었다.
하지만 결코 취하지는 않았다. 일대장의 수행 기사답게 그녀 또한 대단한 주량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전략적인 사랑을 위해 느슨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저도 그러네요.”
“우리…… 자리 옮겨서 한 병만 더 마실까?”
“좋죠, 술은 어디 있나요?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냐, 내가 가지고 올게. 너는 여기서 기다려.”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티니는 헨리 몰래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한 병만 더 마시면……!’
오늘을 위해 ‘사랑의 묘약’이라 불리는 아끼던 술을 꺼낼 참이었다.
티니는 관사 바깥에 마련된 술 창고에 가기 위해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엇, 마침 노크하려던 참이었는데. 티니 장교님! 급한 서신이 있어서 이렇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뭐?”
문을 연 순간, 현관문 앞에는 급한 소식을 전하러 온 병사 한 명이 티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술이 확 깼다.
게다가 무드를 방해받은 티니는 기분이 떨떠름했지만 급한 서신이란 말에 애써 표정을 다독이며 말했다.
“카터 장교님께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셨다는 소식입니다.”
“뭐라고?”
카터가 깨어났다는 소식.
그리고 그 소식에 가장 먼저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헨리였다.
* * *
카터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중대 간부들을 포함해 이셀란까지 집무실을 비우고 모두 의무대로 몰렸다.
의무장교가 진찰 결과를 말했다.
“이제야 정신이 들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진한 마기에 오래 노출된 탓에 신체가 극도로 쇠약합니다.”
“치료하는 데에는 얼마나 걸리지?”
“예전처럼 완전히 회복하려면 적어도 1년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1년이나?”
“아시다시피 6급 구역부터는 마기의 농도 자체가 다릅니다. 게다가 진찰 결과, 한 달간 제대로 된 영양 공급도 없이 마물이 임의로 목숨을 연장시킨 탓에 장기가 많이 손상되었습니다.”
“……그럼 1년이면 확실히 완치될 수 있나?”
“예, 재활 기간까지 넉넉잡아 1년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블랙이 제거되었다는 소식을 알려 드렸더니 이 말만큼은 꼭 전해 달라고 그러더군요.”
말을 마친 의무장교가 헨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고맙다고요.”
블랙이 제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카터는 눈꺼풀조차 겨우 들어 올리는 상태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블랙을 죽이는 것.
헨리에겐 그저 단순한 임무였지만 카터에겐 몇 년이나 지속되어 온 오랜 염원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카터는 그것을 대신 이루어 준 헨리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브리핑을 마친 의무장교는 자리를 비웠고 이제 자리에는 간부들밖에 남지 않았다.
침묵 속에 먼저 말을 꺼낸 이는 살로몬이었다.
“이셀란 일대장님.”
“왜?”
“혹시나 해서 여쭙는 건데, 그럼 1년 뒤에 카터 소대장이 완전히 치료가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뭘 어떻게 해?”
“카터가 죽은 줄만 알고 헨리 소대장을 특임대에 발령시키셨잖습니까? 군법대로라면 죽은 게 아니라 단순한 행방불명이었으니 1년 뒤엔 그럼 카터 소대장이 특임대로 복귀하는 겁니까?”
“그건…….”
꽤나 중요한 문제를 살로몬이 지적했다.
어차피 인사권은 이셀란에게 있다. 하지만 아무리 이셀란이 헨리를 아낀다 하더라도 이런 경우에까지 형평성을 깨뜨릴 순 없었다.
‘골치 아프네, 이거…….’
골치 아픈 딜레마였다.
살로몬의 물음에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잠자코 있던 헨리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헨리의 대답이 끝났을 때.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아니, 그런 말은 없었잖아?”
그의 대답을 들은 모두는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 *
-나 참…… 사실 넌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허튼소리.”
보름달이 뜬 새벽, 달은 슬슬 저물어 갔고 헨리는 고된 수련에 땀범벅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냐, 잘 생각해 봐. 동네 바보도 1년만 전장에서 구르면 알아서 깨치는 법인데 머리도 똑똑한 놈이 그거 하나 못 터득했다는 게 말이 되냐?
“시끄럽다니까.”
카터가 깨어난 날. 어느새 시간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그동안 헨리는 특임대 소대장으로서 성실하게 복무하였으며 온갖 공로는 물론이고 수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 엘리트 장교가 되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수많은 임무를 해치우고 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갔어도, 헨리는 여전히 소드 러너의 경지에 머물러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헨리는 그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제국 검술과 헥터의 검술을 연마했다. 또한 체력 단련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스스로에게 핸디캡을 주면서까지 마물을 상대했다.
그러나 손쉽게 얻으리라 예상했던 헨리의 오러는 조금도 발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단한 놈.
그리고 그런 헨리를 보며, 헥터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러란 본디, 한계에 다다른 육체가 내뿜는 강렬한 생명의 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물의 숲과 같은 위험천만한 곳에서는 오러의 터득이 더욱 쉬운 법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달랐다.
헨리는 그런 힘이 없어도 그 자체만으로도 막강했으며 그 때문에 생명의 힘을 끌어 올릴 만한 위기가 없었다.
타고난 강자일수록 오러의 터득은 늦는 법이다.
그리고 늦게 터득한 만큼 남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력한 오러를 손에 넣는 것이 보통이었다.
헥터가 그랬으니까.
그래서 헥터는 더더욱 이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자신의 예상대로 헨리가 정말로 타고난 천재라면, 언젠간 자연스럽게 오러를 터득하는 것이야말로 헨리에겐 최고의 수련법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한계를 깨치는 게 가장 큰 수련이지.’
이윽고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자 헥터 또한 자연스럽게 명계로 돌아갔다.
헨리는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슬슬 전역을 준비해 볼까?”
노블레스 오블리주 제도의 최소 복무 기간은 1년.
그리고 오늘이 바로 헨리가 입대한 지 딱 1년이 되는 ‘전역 날’이었다.
헨리의 전역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헨리의 전역 계획은 이미 1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의무대에서 카터가 눈을 뜬 그날부터 말이다.
“클린.”
마법으로 몸을 닦아 낸 헨리는 갑옷이 아닌 제복을 입었다.
이제 더 이상 아침 회의에 참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받고 나서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는 제복을, 헨리는 처음으로 맵시를 가다듬으며 잘 차려입고 중대장 앞에 섰다.
중대장과 다른 소대장들. 그리고 뒤에 정렬하고 있는 수많은 중대원들.
제복을 입고 나타난 헨리를 보며 살로몬이 물었다.
“정말 전역해야겠냐?”
“예, 제 뜻은 여기까지입니다.”
“네 뜻이 어디가 어떻다고…… 에휴, 이미 마음을 굳힌 사람을 달래기도 어렵고 이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우리가 더 감사하지, 우리가 네 덕분에 얼마나 꿀을 빨았는데……. 그래, 너도 그동안 고생했다. 이제 똑바로 서 봐.”
척.
중대장의 명령에 헨리의 허리가 꼿꼿이 세워졌다.
“뒤로 돌아.”
척.
“헨리 모리스 소대장을 향해, 경례!”
“충! 성!”
전역 날에 받는 온 중대원의 경례.
그것은 헨리에게 표하는 최고의 찬사이자 뜻깊은 존경이었다.
그리고…….
“흑흑흑…… 소대장님, 정말로 가셔야겠습니까?”
“안 됩니다. 소대장님 같은 분이 또 어디 계시다고…….”
어젯밤, 대원들은 밤새도록 술을 퍼부으며 눈물의 이별식을 가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대원들은 못내 아쉬웠는지 또다시 눈물을 터뜨렸다.
이에 살로몬이 마지막 전역 소감을 권유했다.
“헨리 소대장,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지?”
하지만 헨리는 어젯밤 전직 제국의 현자로서의 덕담을 충분히 해 주었다.
“그동안 고생했고 볼 수 있으면 또다시 보자.”
“참 너답다.”
담백한 전역 소감.
이에 휴고가 씩 웃어 보이며 헨리의 어깨를 툭툭 털어 주었다.
“그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마지막 이별식이 끝났다.
헨리는 가만히 오른손을 들어 올려 중대원 모두에게 경례를 해 보였다.
“너도 몸조심하고.”
인사를 마친 헨리는 짧은 묵례 후 조용히 중대를 벗어났다.
* * *
“정말 가야겠냐?”
“예, 그렇습니다.”
“입대할 때만 해도 출세하고 싶다던 놈이 무슨 전역을 이렇게 빨리 해?”
헨리의 전역 선언 이후, 이셀란은 끊임없이 헨리에게 장기 복무를 권유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헨리는 웃음으로 일관했고 이셀란은 끝끝내 헨리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이셀란이 못내 아쉬운지 마른 입술을 훔치며 말했다.
“받아라.”
한참을 아쉬워하던 이셀란은 그제야 조그마한 은패 하나를 헨리에게 내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그것은 신분 패였다.
제도에 대한 의무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이에게 제공되는 새로운 신분 패였다.
헨리의 신분 패에는 원래 ‘무공훈장’의 증표로 푸른색 별 하나가 박혀 있었다.
그러나 의무의 완수로 인해 하나의 별을 추가로 지급받았고, 복무하는 동안 엄청난 공로들을 세워 하나의 별을 추가로 지급받았다.
총 3개의 별을 가진 은패.
이 신분 패만 있다면 이제 어디서든 손쉽게 경례를 받을 수 있으리라.
“네 부탁대로 고향에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거.”
“이게 그 증표입니까?”
“그래, 네 부탁 때문에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증표다. 너 때문에 내가 별걸 다 만들어 본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증표.
이것을 만든 이유는 헨리가 교육대를 수료하면서 획득한 한 가지 소원 때문이었다.
“아무튼 네 소원대로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네가 이 증표를 가지고 있는 한 나는 언제 어디서든 너의 부탁 한 가지는 반드시 들어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대장님.”
헨리는 이셀란에게 ‘미래의 도움’을 소원으로 빌었다.
분명히 먼 미래에는 이셀란 같은 막강한 인재가 반드시 필요할 테니까.
“아, 그리고 말씀드렸던 대로 그 녀석도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로난, 그놈 말이냐?”
“예. 교육대 시절에 저를 끝까지 몰아붙인 유일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포람가에 발목이 묶인 양자이니만큼 저처럼 갑자기 떠나 버릴 위험도 없고요.”
“나는 이미 명품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싸구려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네 얼굴을 봐서 테스트는 한번 해 보겠다마는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알지?”
“물론입니다.”
이로써 대부분의 준비를 끝마치게 되었다.
볼일을 마친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벌써 가려고?”
“예.”
“아쉬운 척이라도 좀 해라, 이놈아.”
“당연히 아쉽습니다.”
“뻔뻔하기는……. 아무튼 그동안 수고 많았다. 그리고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나는 항상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마음이 바뀌거든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대장님.”
“대장은 무슨. 가라!”
헨리는 마지막으로 경례를 해 보였다.
그런 다음 집무실 앞에 매여 있는 제이드와 함께 유유히 바깥세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