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수확 (1)
이셀란의 외침에 헨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막거스도 막거스였지만 젤나의 위스키 또한 막거스 못지않게 악명 높은 술이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질리는구만, 정말.’
취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취기야 마력을 순환시키면 되는 문제고, 오늘 새벽은 술도 취한 김에 오랜만에 푹 쉬어 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드럼통째로 마시는 저 어마어마한 양에 있었다.
“오늘은 사발로 마신다! 할 수 있겠지?”
‘갈수록 태산이군.’
기쁜 날, 권력자가 주는 술을 거절해선 안 된다.
이에 헨리는 한숨을 내쉬며 사발을 들어 올려 보였다.
“예, 물론입니다.”
어쨌든 오늘도 한바탕 큰 난리가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헨리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주인님.
‘음?’
머릿속을 울리듯이 들려오는 목소리.
목소리의 정체는 클레버였다.
‘내 허락 없이 나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런 대화법은 전생에서도 꽤 자주 이용해 봐서 그다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텔레파시와 비슷한 마법들이 이런 방식이었으니까.
-나온 게 아니에요! 이 정도 능력쯤이야 저한텐 쉬운 일이거든요.
종속 관계를 맺었으니 이 정도 ‘체내 대화’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고작 능력 자랑이나 하자고 말을 꺼낸 것은 아닐 터.
‘그래서 용건이 뭐지?’
-혹시 지금 곤란한 상황이신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느껴졌거든요. 주인님이 불편해하시는 감정들이 저에게도 전달이 됐거든요. 그래서 감히 여쭈어보았습니다.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저 술, 제가 대신 마셔 드릴 수도 있습니다.
‘뭐?’
-제가 가진 능력, ‘체스트’를 사용한다면 주인님을 대신해서 술을 마시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은 거예요.
체스트. 아마도 아공간을 말하는 것이리라.
뜬금없는 권유였지만 제법 괜찮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건배 이후 곧바로 목구멍에 술을 들이부어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 대신 마셔 주겠다는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인님은 그저 자연스럽게 술을 드시면 돼요. 그럼 제가 주인님의 식도에 체스트를 개방해 술을 받아 내겠습니다.
‘내 식도에 체스트를 연다고?’
-예! 그 정도쯤이야 저한텐 아주 쉬운 일이거든요.
처음 듣는 방식이었지만 나름대로 현실성 있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아직 클레버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
계약으로 인해 종속 관계가 되었다고는 하나 정신적인 측면까지 완전히 복종시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이번 기회에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은 저보다 훨씬 더 높으신 존재…… 제가 당하면 당했지 감히 주인님께 해를 끼칠 순 없는걸요.
‘백금 때문인가?’
처음에 보았을 때와는 달리, 블랙의 성격은 상당히 고분고분하게 바뀌어 있었다.
헨리는 성격이 바뀐 이유로 마기를 정화시킨 백금을 떠올렸다.
백금으로 인해 마기가 정화되었다면 거칠기 그지없는 성격 또한 유순하게 변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한 번만 믿어 보도록 하지.’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어차피 종속 계약이 맺어진 몸이었다. 주종 관계가 맺어진 이상, 쉬이 주인을 해칠 순 없을 터.
판단을 마친 헨리는 술잔을 채운 이셀란에게 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건배하시죠.”
“크흐흐, 오늘 한번 코가 휘도록 마셔 보자고!”
쨍!
잔이 부딪히고 사발 가득히 담긴 위스키가 목구멍으로 흘러 넘어갔다.
꿀꺽, 꿀꺽.
하지만 그때였다.
아무리 술을 입안 가득 들이부어도 목구멍을 통해 술이 넘어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좋군.’
의외의 쓸모였다.
헨리는 더 이상 이셀란과의 술자리가 두렵지 않았다.
* * *
성가셨던 근심거리에서 해방된 후, 술자리는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헨리는 쉴 새 없이 이셀란과 잔을 나누었고 젤나의 위스키는 그 명성에 걸맞게 금방 이셀란을 쓰러뜨렸다.
“커어어어, 퓨퓨퓨퓨…….”
“끝났군.”
거칠게 코를 골며 잠든 이셀란을, 헨리는 번쩍 들어 올려 침대로 옮겼다.
그런 다음 병사들에게 뒤처리를 맡긴 후 유유히 관사로 복귀했다.
관사로 돌아온 헨리는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따뜻한 차 한 잔을 준비했다.
‘이번에도 오러는 무리였나.’
헨리는 사실 내심 블랙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를 사로잡았으니 그 힘 또한 대단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블랙은 나약했다.
물론 그것이 헨리에게만 적용되는 조건이라 해도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원래 목적이었던 보물 또한 찾지 못했으니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헨리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묵빛으로 변한 백금 반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클레버.”
-예, 주인님.
대기하고 있던 클레버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음.”
나타난 클레버는 여전히 구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바뀐 점이 있다면 새카만 흑빛이었던 몸체가 안개처럼 새하얗게 변했다는 것 정도.
그 모습을 본 헨리가 말했다.
“외형을 좀 바꿨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슈슈슉.
사실 외형은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뚜렷한 실체가 있는 편이 아무래도 대화하기엔 좋았으니까.
곧 클레버의 모습이 조그마한 고양이처럼 변했다.
고양이는 전신이 새하얀 털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눈동자 하나는 파랗고 다른 하나는 노란 오드아이였다.
“아까는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원래대로였다면 권속으로 만든 존재의 능력부터 낱낱이 살피는 게 우선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여태껏 시간이 없어서 클레버를 미처 확인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클레버는 헨리의 감정을 알아채고 눈치껏 자신의 능력을 활용했다.
이것은 확실히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너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너에 대해 알기 위해서다. 그럼 이제 가까이 오도록.”
종속 관계를 맺었다면 권속의 능력을 알아보기란 쉽다.
그저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기운을 공유하면 끝이니까.
헨리는 무릎 위로 올라온 클레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스스슷.
클레버에게 마력을 흘려 보내자 곧 클레버가 가진 능력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체스트’와 ‘최면술’은 물론이고, 기생이 아니라 ‘정신 침략’이었나.’
무려 세 가지 능력이나 지닌 재주 많은 미믹이었다.
특히 체스트와 정신 침략은 고위급 마법사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는 기술.
헨리는 클레버를 사로잡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됐다.”
-감사합니다.
헨리가 손을 거두자 클레버는 다시 무릎 아래로 내려가 가만히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영리한 녀석.’
이렇게까지 영리한 마물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제 마기를 제거했으니 마물이라 부르기도 어려운 존재가 되긴 했다.
능력을 확인한 헨리는 이윽고 궁금했던 점들을 묻기 시작했다.
“진화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예,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마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카터를 사로잡은 이유도 그 때문인가?”
-예, 진화가 끝나는 즉시 준비한 그릇에 뿌리를 내려 완전한 육체를 손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아쉽겠네?”
-아닙니다.
클레버가 아닌 척 단호한 태도를 보였지만 억울할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족이 되었다면 이런 식으로 사로잡힐 일 또한 없었을 테니까.
“내 생각이 맞는다면 너는 어떠한 향에 반응했다. 그게 무슨 향이지?”
-Dhdl입니다.
“Dhdl?”
-이 또한 마땅한 인간의 말을 찾지 못해 마계어 그대로 부르고 있습니다.
“Dhdl라면…….”
헨리는 이번에도 ‘Dhdl’을 그대로 직역했다.
그런데 단어를 직역한 순간,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오이?”
-저는 인간의 말을 완전히 깨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말씀해 주셔도 저는 오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라.”
해석한 것이 맞는다면 좀 어처구니가 없을 것 같았다.
헨리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중대 식당을 방문했다.
그런 다음 식재료 창고를 뒤져 오이 1개를 가지고 다시 관사로 돌아왔다.
“이게 오이다.”
-이, 이건!
헨리가 오이를 꺼낸 순간이었다.
오이를 발견한 클레버의 동공이 확장되며 순식간에 전신이 빨갛게 물들었다.
-흐허, 헉, 이, 이건, 허헉!
과도한 호흡, 아무래도 해석한 것이 맞는 듯했다.
‘오이가 약점이었다니.’
무슨 대단한 물질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Dhdl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오이였고 헨리는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질질.
헨리가 허탈함을 느끼고 있을 때, 클레버의 시선은 헨리가 들고 있는 오이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마치 매혹당한 듯한 눈빛이었다.
이에 헨리는 짧은 한숨과 함께 오이를 던져 주었다.
“너 먹어라.”
-가, 감사합니다!
그러자 오이를 통째로 전달받은 클레버의 몸이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정신 못 차리는 걸 보니 약점이 아니라 각성제쯤 되는가 보군.’
헨리는 한동안 그런 클레버를 가만히 관찰했다.
클레버는 받아 든 오이를 끌어안고 뒹굴거리는가 하면 껍질을 핥기도 하고 마음껏 냄새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엔 오이를 부러뜨려 촉촉한 속살을 음미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클레버.”
-네, 넹! 주인님!
클레버는 던져 준 오이 하나를 깨끗이 먹어 치웠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발그스레한 털빛을 하고서 몽롱하게 대답했다.
“홀터벨트는 탈취제 때문이라고 쳐도, 카터는 왜 습격한 거지? 카터는 탈취제를 쓰지도 않았는데?”
-그, 그냥 호기심이었습니다용. 오랫동안 저를 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용…….
즉 오랫동안 추적해 온 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온 셈이었다.
이로써 궁금한 점이 모두 해결되었다.
볼일을 마친 헨리는 클레버를 역소환시키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클레버에게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클레버.”
-예에~ 주인님?
“혹시 이렇게 생긴 버섯을 본 적이 있나?”
헨리가 클레버에게 보여 준 것은 소대원들에게 보여 주었던 킨 머시룸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혹시나 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보물이 위치한 곳이 6급 구역이니만큼 6급 마물인 클레버라면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거라면…….
클레버는 몽롱한 눈빛으로 한참 동안이나 그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혀 짧은 소리로 대답했다.
-킨 머시룸이네용?
“맞아. 이걸 본 적이 있나?”
-당연히 봤습지용용…….
“그럼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나?”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용!
클레버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헨리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 * *
“군중 속의 고독.”
퉁!
모두가 잠든 새벽, 헨리는 최소한의 무장만을 마친 채 허리춤에 성검을 착용했다.
“클레버, 위치는 확실하겠지?”
-예. 저만 믿으세요, 주인님.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헨리는 클레버의 증언을 바탕으로 어서 빨리 달이 떠오르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중대 전체가 깊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 헨리는 그제야 마물의 숲으로 은밀한 출정을 떠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