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마주치다 (3)
“신기한 놈일세, 마물 주제에 말을 하다니.”
마족도 아닌 주제에 말을 한다?
확실히 헨리가 신기해할 만했다.
여태껏 그런 마물이 발견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정체가 뭐냐? 설마 도플갱어라거나 뭐 그런 시시한 놈은 아니겠지?”
질문과 함께 헨리는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슈아아아아!
내민 손끝으로 거센 바람이 뭉쳤다.
녀석이 만약 실체가 없는 놈이라면 물리적인 타격은 먹히지 않을 테니 일부러 마법을 택한 것이다.
“마, 마법?”
헨리의 손끝으로 강풍이 휘몰아치자 블랙 또한 적잖게 당황했다.
“잘 가라.”
펑!
압축된 대기가 폭발하면서 엄청난 충격파가 놈에게로 쏘아졌다.
그러나…….
“피해?”
녀석은 운 좋게도 헨리의 공격을 회피해 냈다.
아니, 회피했다기보단 구름 같은 몸뚱이의 일부가 날아간 듯 보였다.
“히익!”
몸뚱이의 절반 정도가 날아가자 녀석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즉시 도망을 택했다.
헨리의 공격에 분노하기엔 블랙의 지능이 높았기 때문이다.
직설적인 도망이었다.
녀석은 공기 중으로 부유하되 빠른 속도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네놈이 도망쳐 봤자지.”
멀어져 가는 블랙을 보면서도 헨리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대기 중으로 흩어지려는 녀석의 몸뚱아리를 보며 나지막이 주문을 시전했다.
“리턴 투 보디.”
스스스슷.
헨리가 주문을 외우자 곧 대기 중에 흩어지려던 녀석의 살점들이 다시금 형태를 찾아 가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이미 한참이나 멀어져 버린 원주인의 몸뚱아리를 향해 느지막이 귀향에 나섰다.
“마법은 쓰기 나름이지.”
리턴 투 보디는 원래 죽은 병사들의 유해를 찾기 위해 개발된 마법이었다.
전쟁 중에 뒤섞이는 시체는 많았고 전사자의 유해를 원하는 유가족들은 많았으니까.
하지만 마법 자체가 워낙에 까다롭고 소모되는 마력도 많다 보니 리턴 투 보디의 혜택을 본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추적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헨리는 추적에 앞서 여전히 사투를 벌이고 있는 소대원들을 살폈다.
치열한 접전이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꽤 많은 숫자의 타우로스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안 도와줘도 되겠어.’
전력 차를 확인한 헨리는 그제야 추적을 시작했다.
소대원들의 안전도 중요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안전이 아닌 전임 소대장의 복수일 테니까.
* * *
한편, 전력을 다해 도망치던 블랙은 꽤 심각한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저놈은 뭐지?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내 최면술이 통하지 않는 거지?’
여태껏 검사들만 상대해 왔던 터라 저런 상대는 처음이었다.
알비노 타우로스의 번개는 물론이고 자신의 주특기인 최면술까지 통하지 않는 상대라니, 충분히 패닉에 빠질 만도 했다.
하지만 헨리에게 최면술이 통하지 않는 것은 결코 헨리가 마법사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헨리의 정신이 블랙의 것보다 훨씬 월등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블랙은 심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얼른 새 숙주를 찾아야 해!’
숙주가 없으면 독립적인 힘 자체는 약한 블랙이기에 한시라도 빨리 다른 숙주를 찾아야만 했다.
‘찾았다!’
한참을 도망치던 끝에 블랙은 다른 마물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발견한 마물의 이름은 ‘홀룸’으로, 반달곰을 닮은 마계의 곰이었다.
꾸어어어!
블랙은 즉시 홀룸의 입으로 자신의 몸을 욱여넣었다.
최면을 걸 틈도 없었다.
아니, 어차피 이 정도 수준은 딱히 최면을 걸지 않아도 신체를 장악함에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홀룸이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얼마간 몸을 파르르 떨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멀쩡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블랙의 기생이 성공한 것이었다.
마침 홀룸은 사냥을 마치고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블랙은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녀석이 먹고 있던 핏물 가득한 고기를 태연한 척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블랙을 쫓던 헨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흠.”
떨어져 나간 블랙의 살점들이 홀룸에게로 이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보통의 살점이 아닌 기체 형태의 살점이다 보니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헨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블랙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무려 알비노 타우로스를 쓰러뜨린 놈이다. 그러니 이깟 홀룸 따위로는 결코 대적할 수 없는 존재란 걸 블랙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제발 그냥 가라.’
홀룸인 척 연기하기 위해 입안 가득 고기를 우물거렸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홀룸이네?”
홀룸을 발견한 헨리가 뒷짐을 지고 슬슬 걸어와 살폈다.
“난 또 블랙 그놈이 기생이라도 한 줄 알았네.”
슬그렁.
말을 마친 헨리는 뽑은 성검에 마력을 휘감기 시작했다.
“멍청한 놈.”
서걱!
검을 휘두르자 홀룸의 수급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헨리는 이어서 손가락을 튀겼다.
“이그나이트.”
화르륵!
그러자 홀룸의 사체에 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 바로 몸이 불탈 때 느끼는 고통이라고 했다.
홀룸 안에 숨어 있던 블랙은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황급히 시체를 탈출했다.
“어떻게! 어떻게 찾아낸 거야!”
절규하는 블랙.
하지만 헨리는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카터는 어디 있지?”
“카터?”
“한 달 전쯤에 사라진 인간 기사 말이야.”
“내가 그걸 말해 줄 것 같아?”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주지.”
이름은 모르지만 존재를 아는 걸 보니 카터는 아직까지 살아 있는 듯했다.
헨리는 먼저 허공을 떠다니는 블랙을 확실하게 얼리기로 했다.
보는 눈이 없으니 상대방에게 선사할 고통의 선택 폭이 넓어진다는 뜻이었다.
“프리즈.”
쩌저저적!
“너, 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얼음 속에 갇힌 블랙이 절망한 목소리로 외쳤다.
“난 너한테 질문을 허락한 적이 없다.”
딱!
헨리가 한 번 더 손가락을 튀기자 이번엔 얼음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꽁꽁 언 얼음을 찌그러뜨릴 만큼 강력한 압력이었다.
“크아아악!”
“어때? 이제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드나?”
“제기랄!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직 멀었군.”
딱!
화르륵!
마법은 계속됐다.
헨리의 손가락이 튕길 때마다 블랙은 얼고 찌그러지고 불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블랙의 비명 소리 또한 한없이 높아져만 갔다.
“튼튼해서 좋네.”
구름처럼 풍만하던 본체는 이제 두 손으로도 다 가려질 만큼 한없이 초라해졌다.
오래 버티긴 했어도 결국 한계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대체, 대체 왜!’
블랙은 깊은 절망을 느꼈다.
마계에서 넘어온 이후 단 한 번도 이런 종류의 벽을 느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절망은 더더욱 깊었다.
블랙의 몸이 다시금 얼었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 자신의 몸뚱아리가 얼 수 있다는 걸 블랙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허공에서 내려와 땅바닥을 나뒹굴 때, 헨리가 다가와 블랙과 눈을 맞추었다.
“너, 정체가 뭐야?”
카터가 살아 있다면 그의 위치를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이셀란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병대를 풀어 수색을 개시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 녀석은 달랐다.
마물 주제에 말을 할 줄 알며 겨우 6급 마물 따위가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를 꺾었다. 헨리가 호기심을 가지기엔 충분했다.
“알려 드릴게요. 알려 드릴 테니까 제발 목숨만 살려 주세요.”
좀 더 느긋하게 고통을 주며 심문하려 했건만 아무래도 단단히 겁을 먹은 듯싶었다.
헨리는 한 번의 손짓으로 블랙을 결빙 상태에서 풀어 주었다.
“앞장서라.”
투지가 꺾인 상대를 괴롭혀 봤자 얻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헨리가 명령하자 주먹만큼 작아진 블랙이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앞장서서 날아가기 시작했다.
* * *
얼마 뒤, 헨리는 6급 구역의 꽤 깊은 곳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여, 여기예요.”
도착한 곳은 어느 이름 모를 굴이었다.
굴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넓어졌다.
헨리가 블랙을 따라 가장 안쪽에 도착했을 때, 정말로 카터가 있었다.
“카터 소대장님?”
발견된 카터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더불어 몸도 좀 말라 보였다.
헨리가 카터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슈슈슈슉!
안내를 마친 블랙이 갑작스레 카터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얼마 뒤 카터의 몸을 차지한 블랙이 감은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쉽게 당할 줄 알고?”
아껴 두었던 숙주를 점령한 블랙이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헨리가 지그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뻔한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헨리는 녀석이 이렇게 행동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구속을 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뭐가 우스운 거냐!”
헨리의 웃음이 비웃음이란 걸 알아챈 블랙이 벽면에 세워 둔 카터의 검을 뽑아 들며 역정을 냈다.
츠즈즈즛!
“오러?”
그리고 녀석은 놀랍게도 검날에 오러를 발산시켰다.
‘숙주의 능력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건가.’
일부러 마지막 기회를 준 보람이 있었다.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날 이 지경으로 만든 것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블랙이 카터의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네 몸 또한 내 것이다.”
‘과연…… 기생충다운 발언이군.’
헨리는 그제야 왜 블랙이 카터를 살려 두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녀석의 주된 힘은 ‘기생’.
그리고 기생충이 강인한 숙주를 탐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죽어라!”
먼저 움직인 쪽은 블랙이었다.
블랙은 푸른 검기를 내뿜으며 헨리에게 달려들었고, 꽤 위협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게 네놈의 한계지.’
부웅!
빡!
크게 휘둘린 검을 헨리는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검을 뽑지 않고 검집째로 카터의 목덜미를 내려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카터의 육신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어…… 어떻게!”
“그래서 네가 마물이라는 거다.”
“뭐, 뭐라고?”
“말을 할 줄 알아도, 검기를 흉내 낼 수 있어도 겨우 그뿐인 게지.”
사실 헨리의 말대로 말을 할 줄 알고 숙주의 능력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은 굉장히 뛰어난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검기를 다룰 줄 알아도, 검사는 검기가 전부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몇 년, 아니 몇십 년에 걸쳐 갈고닦은 보법과 검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제대로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오러였다.
블랙은 카터의 육체를 움직이고 싶었지만 헨리가 육체의 급소를 가격한 탓에 몸이 통나무처럼 뻣뻣해짐을 느꼈다.
아무리 억지로 움직이고 싶어도 마물이 아닌 인간의 육체였기 때문에 명확한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놔라! 놓으란 말이다!”
근육이 굳어 온몸에 마비가 왔을 텐데도 블랙은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
생존을 위한 추한 몸부림이었다.
“패럴라이즈.”
이에 헨리는 한 번 더 카터의 육체를 마비시켰다.
이윽고 발버둥이 멈추었고, 블랙은 다시 한 번 절망에 빠졌다.
“이제 똑똑히 알겠느냐, 너와 나의 차이를?”
절망한 상대에게 실낱같은 희망을 준다. 그리고 그 희망마저 처참하게 박살 내면 상대는 재기 불능에 빠지게 된다.
그야말로 완벽한 패배를 안겨 준 셈이었다.
“사…… 살려 주세요.”
헨리의 예상대로 완벽한 절망을 맛본 블랙이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넌 대체 정체가 뭐냐?”
그러나 그것은 헨리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헨리는 블랙의 말을 무시한 채 품어 왔던 궁금증부터 해소시키기로 했다.
“알려 드리면 살려 주실 건가요……?”
“네놈 하기에 따라 다르겠지.”
“제, 제 이름은 클레버입니다! 마계에서 온 순수 마물이며, 저희 일족의 거의 마지막 생존자입니다!”
“일족?”
“예!”
블랙의 이름은 클레버였다.
클레버는 어떻게 해서든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질문에 응답했다.
“무슨 일족?”
“그게…… 인간계 언어로는 아직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서 말씀드릴 수가…….”
“난 마계어를 할 줄 안다. 그러니 마계어로 대답해 봐.”
“그, 그러십니까? 저희 일족의 이름은 ‘Alalr’입니다!”
‘Alalr?’
마왕 토벌의 과정에서 어떤 마족과의 인연 덕분에 약간의 마계어를 배운 적이 있었던 헨리는 한동안 ‘Alalr’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그리고 곧 마땅한 대륙어로 치환시킬 수 있었다.
“미믹?”
“그게…… 뭐죠?”
“Alalr의 인간 말인 셈이지. 나 참, 겨우 미믹한테 이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미믹.
상자 따위에 기생하여 상자를 여는 인간들을 기습하는 하급 몬스터들 중의 하나다.
헨리는 블랙의 정체가 겨우 미믹이라는 것에 큰 실망감을 느꼈다.
“질문은 이것으로 끝이다. 그럼 이제 죽어라.”
“자, 잠시만요! 살려 준다면서요, 약속이 다르잖아요!”
“고려해 본다고 했지 약속한 적은 없다. 이그나…….”
“자, 잠깐만요!”
마법을 시전하려던 순간, 클레버가 고함을 질렀다.
“뭐지?”
“저, 저를 살려 주신다면 이걸 드릴게요.”
“그게 뭔데?”
“분명히 좋아하실 거예요. 잠시만 저를 풀어 주세요.”
“허튼수작이라면 안 부리는 게 좋을 거다.”
어차피 도망쳐도 놓칠 걱정은 없었다.
리턴 투 보디가 아니더라도 녀석을 추적할 방법은 얼마든지 많았으니까.
헨리는 마력으로 구속하고 있던 클레버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카터의 몸에서 검은색 가스가 분출되더니 클레버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음?”
본체로 돌아온 클레버가 내놓은 것은 엄청난 양의 ‘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