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마주치다 (2)
“소, 소대장님……?”
알롱드를 포함한 소대원 모두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든든한 모습으로 명령을 내리던 신입 소대장이 눈 깜짝할 새에 새카만 숯덩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쿵! 쿵!
그리고 벼락이 떨어지고 얼마 뒤, 가로지르려던 숲의 안쪽에서 거구의 타우로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수가…….”
처음에는 놀랐다. 너무 갑작스러웠기 때문이다.
지금은 눈물이 났다.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타우로스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소대원들은 몸을 떨며 분노했다.
“이, 이 개새끼들이……!”
그동안 숱하게 6급 구역을 드나들면서 웬만해선 마찰을 피해 오던 타우로스들이었다.
놈들은 특임대의 전력보다 훨씬 강했고 무리 지어 다니는 숫자조차 특임 대원들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타우로스들을 눈앞에 마주하게 된 순간임에도, 소대원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각자의 무기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모두들 잠깐만.”
“부소대장……?”
“모두들 진정해. 다들 소대장님의 죽음 때문에 이성을 잃은 건 알겠지만 냉정하게 생각해야 돼. 소대장님은 타우로스들에게 죽은 게 아니야, 벼락 때문에 죽은 거지.”
“……!”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리고 알롱드의 말대로 타우로스들은 헨리의 죽음 직후에 등장했을 뿐, 헨리의 죽음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단순한 불청객일 뿐이었다.
“지금부터 지휘는 내가 맡을게. 모두들 대열을 유지하고 최대한 부대로 복귀하도록 한다.”
“뭐? 이대로 그냥 돌아가자고?”
“애처럼 굴 거야? 놈들은 타우로스야.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도망쳐도 살 수 있을지 장담 못 하는데 언제까지 칭얼거릴 셈이야?”
부소대장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또한 헨리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는 부소대장이라는 직책에 걸맞게 냉정함으로 소대원들을 타일렀다.
“포지션은 가장 날카롭게, 단숨에 여기서 벗어나도록 한다.”
결국 모두가 알롱드의 말에 수긍했다.
지금은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행동해야 할 때였다.
쿠어어어!
그런데 알롱드가 도주를 명령하려던 순간이었다.
십수 마리의 타우로스들 사이로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하얀 타우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6급 구역에 드나들었지만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놈이었다.
“저놈은 또 뭐야?”
놈은 칙칙한 마물의 숲과는 어울리지 않게 마치 천사가 강림한 듯한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타우로스……?”
외형은 분명히 타우로스였다.
하지만 색깔이 하얗다는 이유만으로 놈은 거룩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알비노 타우로스가 고함을 내지르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우어어어어!
쾅!
불끈 쥔 양손이 바닥을 내려친 순간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타우로스의 전신에서 새하얀 전기가 일어난 것이었다.
“번개?”
“부소대장, 지금 내가 잘못 본 거지?”
“……나도 내가 본 게 거짓말이었으면 좋겠군.”
알비노 타우로스의 능력에 모두가 두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전기가 치솟는 녀석을 보며 소대원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저놈이 범인이었군.’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모두가 확신했다, 소대장을 죽인 범인은 바로 저놈이 분명하다고.
소대원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다름 아닌 게보였다.
“난 오늘 여기서 죽는다.”
“게보!”
“말릴 생각 하지 마. 너희들도 느끼고 있잖아? 저놈이 바로 범인이란 걸.”
의외의 인물이 가장 의외의 발언을 했다.
그러나 게보를 시작으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도 여기서 죽는다.”
“같이 가자. 소대장을 두 번이나 보낸 우리는 중대로 돌아갈 면목이 없다.”
결심은 산불이 번지듯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아홉 명의 소대원 모두가 죽음을 결심하고 각자의 무기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쿠어어어어!
두 집단의 살기가 최고조에 달한 순간, 알비노 타우로스의 울음과 함께 싸움이 시작되었다.
“으아아아아!”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한 소대원들의 고함 소리가 마물의 숲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저마다 푸른색 오러를 맺어 낸 소대원들이 눈알의 실핏줄을 터뜨리며 놈들에게로 질주했다.
쾅!
검과 뿔이 맞부딪치고 갑옷과 주먹이 맞부딪쳤다.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걱!
고양이를 피해 다니던 생쥐가 이빨을 드러냈을 때 그 이빨은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된다.
그것은 오러 또한 마찬가지였다.
죽음을 결심한 전사는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기개를 발산하며 전우의 원수를 베어 냈다.
쿠어어어어!
죽음의 기운이 고양될수록 타우로스들 또한 미쳐 발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소대장을 죽인 알비노 타우로스가 싸움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신 놈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코를 벌름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녀석이 향한 곳은 새카맣게 타 버린 헨리의 시체였다.
“저 새끼가 감히?”
그리고 그 모습을 이제 막 한 마리의 타우로스를 베어 낸 게보가 목격했다.
녀석의 이상 징후를 포착한 게보는 그 즉시 몸을 돌려 놈에게로 향했다.
“뭐 하는 짓이야!”
붕!
놈을 향해 게보가 뛰어들었다.
그리고 일순간 게보는 날았다.
그 도약력이 어찌나 높던지, 언뜻 보면 그가 허공을 내딛는 중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게보가 허공에 뜬 순간, 알비노 타우로스는 게보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강력한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 목청껏 고함을 내질렀다.
쿠어어어어!
번쩍!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게보는 시간이 엄청 느리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느려진 시간. 게보는 그 시간 속에서 하늘이 번쩍거림을 볼 수 있었고 전신의 피가 차가워짐을 느꼈다.
‘여기서 끝이구나……!’
죽기 전에 볼 수 있다는 주마등을 본 걸까?
게보는 난생처음 겪어 보는 느려진 시간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어깨 위로 들어 올린 검과 함께 일생의 마지막 일격을 내질렀다.
콰르릉!
게보의 머리 위로 거대하고 하얀 벼락이 떨어졌다.
푸욱!
벼락이 떨어지기 전, 게보는 뻗은 검 끝에 묵직한 고깃덩이의 감촉을 느꼈다.
혼신을 담은 마지막 일격이 놈의 살갗을 찌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게보는 그대로 바닥을 향해 굴러떨어졌다.
쿠당탕탕!
착지를 준비하지 못한 몸뚱아리는 튀어나온 갑옷과 부딪혀 근육을 짓눌렀다.
하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곧 떨어질 벼락 때문이었을까? 게보의 몸은 두려움에 잔뜩 움츠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
게보는 두려움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몇 초가 지나도 느껴져야 할 뜨거움이나 짜릿함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수고했다, 게보.”
“……예?”
익숙한 음성.
게보는 누군가의 칭찬에 간신히 눈을 떴다.
그리고 두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게보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소, 소대장님?”
눈앞에 보이는 이는 분명한 헨리였다.
그리고 헨리는 숯덩이가 아닌 멀쩡한 모습을 하고서 떨어지고 있는 벼락을 성검으로 받아 내고 있었다.
굉장한 광경이었다.
이윽고 벼락이 멈추었고, 헨리는 성검을 내려 검에 꽂힌 스크롤 한 장을 찢어 냈다.
검에 꽂아 둔 마법 스크롤이 알비노 타우로스의 벼락을 흡수한 것이다.
“일어나.”
그리고 헨리는 쓰러진 게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게보가 환한 미소와 함께 헨리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긴박한 상황에서 감동적인 재회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가서 전해, 내가 살아 있다고. 그러니 절대 죽지들 말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헨리는 게보에게 명령을 내린 후 몸을 돌려 알비노 타우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지, 나한테 벼락을 던진 놈이?”
우어어어!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헨리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잠시나마 사라졌던 Dhdl의 냄새가 강렬하게 진동했기 때문이다.
쿠어어어어!
목덜미에 끼얹은 남은 원액은 블랙을 포효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그리고 블랙은 몇 년 전에 홀터벨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뒤집어진 눈깔을 하고서 거대한 주먹을 도끼처럼 휘둘렀다.
쾅!
굉장한 타격음.
하지만 헨리는 놈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이셀란에게 그랬던 것처럼 양손으로 검날을 떠받쳐 놈의 공격을 막아 냈다.
“별것도 아닌 놈이.”
이셀란에 비하자면 한참이나 나약한 내려치기였다.
헨리는 즉시 검을 밀어 녀석을 밀어낸 다음 녀석의 명치를 향해 강력한 발 차기를 집어넣었다.
콰직!
강화된 마법 무장 덕에 녀석은 순식간에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이어서 헨리는 성검에 마력을 휘감아 녀석의 목덜미를 베었다.
서걱!
검은 정직하게 일직선을 그렸다.
그 결과 녀석의 수급이 바닥을 굴렀고 잘린 목덜미에선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이런…….”
그러나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탓일까? 분수처럼 솟은 피가 헨리를 덮치고 말았다.
그 탓에 얼굴을 포함한 전신이 알비노 타우로스의 피로 적셔졌다.
한숨이 나왔다.
헨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종류의 불결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런 쓸모없는 자식.”
잘린 알비노 타우로스의 목이 인상을 구기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이건 헨리도 예상치 못한 일이라 적잖게 당황했다.
머리가 잘린 타우로스가 말을 한다는 건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푸시시시시…….
그리고 이어서 잘린 타우로스의 목에서 검은색 가스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가스는 마치 로켓처럼 추진력을 더해 잘린 목을 부유시켰고 다른 의미로 생기를 더했다.
기괴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헨리는 그 기괴함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정신을 차렸어.”
잘린 목이 다시 한 번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나의 새로운 숙주가 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새하얀 목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았다.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가스를 내뿜으며 헨리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헨리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새하얀 목이 눈앞까지 다가와 초점 잃은 눈동자에서 붉은색 빛을 내뿜을 때에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찾았다.”
“뭐?”
새하얀 목이 눈앞까지 다가왔을 때 헨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이 바로 블랙이라는 것을.
녀석은 블랙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은 타우로스가 이런 식으로 되살아날 순 없었을 테니까.
헨리는 먼저 주먹에 마력을 담아 있는 힘껏 내질렀다.
빡!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런 다음 헨리는 성검에 마력을 담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녀석의 머리가 두 동강이 났다.
그리고 두 동강 난 머리 사이로 홀터벨트가 말했던 ‘악령’을 연상케 하는 시커먼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블랙의 본체였다.
“이런 망할!”
탈취제에 정신을 못 차리던 블랙이 갑작스레 이성을 되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헨리가 타우로스의 피를 뒤집어쓴 탓에 향기가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헨리는 우연찮게 블랙을 찾아낸 덕에 그제야 맡은 임무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