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29화 (29/522)

# 29

페브리지 (3)

‘5년 전부터 마족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면 최악의 경우엔 현재 마족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건가. 갈수록 태산이군.’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만약 녀석이 진화기를 거쳐 벌써 마족이 되었다면 6급 구역이 아니라 숲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다른 정보는 더 없습니까?”

-있긴 한데, 사실 지금부터 말씀드릴 건 좀 확실치가 않아서…….

“어떤 정보라도 좋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현재로썬 귀한 정보입니다.”

격려에 힘입은 그는 자신의 죽음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게…… 제가 마지막으로 죽임을 당하기 직전, 놈이 제 동료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저에게로 다가왔을 때였어요. 음…… 그러니까…… 그놈이 제 입으로 들어오기 전, 그놈은 희열에 찬 살인마처럼 겁에 질린 저의 모습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놈이 한 말이 ‘곧 마족이 될 자신에게 먹히는 걸 영광으로 알라.’였고요.

‘먹혀?’

-그러고 나서 그놈이 제 입속으로 들어왔는데, 언뜻 보기엔 굉장히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거든요? 근데 그게 뭐랄까…… 약간 최면에 걸린 것처럼 정신이 멍해진다고 해야 되나…….

“최면 말입니까?”

-예. 순간 되게 정신이 멍해졌어요. 마치 약에 취한 것처럼……. 아무튼 그리고 놈이 제 몸속으로 들어오는데 그 과정이 아주 생생하게 느껴지는 거 있죠? 특히 제 머릿속으로 침투해 들어올 땐 무슨 기생충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줄 알았다니까요.

“머릿속으로 침투라면…… 솔직히 잘 상상이 가지 않아서 그러는데, 조금만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음…… 비유를 하자면 마치 영혼이 합쳐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영혼이 합쳐진다라…….”

-놈이 제 머릿속으로 침투하는 순간, 그놈이 가진 기억의 일부가 저한테 보였거든요.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감정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좀 강렬한 쾌락이었는데…… 아, 그래! 향기예요, 놈은 향기 때문에 저희를 기습한 거였어요.

‘향기?’

갈수록 더 난해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그의 설명은 계속됐다.

-제가 그놈의 기억을 봤다고 말한 건, 그놈이 느끼던 감정들이 저와 합쳐지면서 공유가 됐기 때문이에요. 놈이 느끼던 쾌락은 다양했어요. 살인에 대한 쾌락과 육체를 지배한 정복욕, 그리고 우리에게 그런 욕구를 가지게 된 향기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죠.

난해한 설명 속에서 헨리는 무언가 중요한 단서를 잡은 것 같았다.

“그게 무슨 향기였습니까?”

-탈취제 향이었습니다.

“탈취제…… 말입니까?”

-예, 공유된 감각이 너무 강렬해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저희들끼리만 쓰곤 했던, 교역상에게 구매한 탈취제 향이었습니다.

“하지만 탈취제는 냄새를 지우는 물품이 아닙니까?”

-보통은 그렇죠. 하지만 저희가 구매한 제품은 약간의 향기가 감도는 제품이었거든요.

물이 귀한 세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이 넘쳐 나지 않는 이상은 고작해야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발달된 것이 바로 탈취제였다.

탈취제는 소량만으로도 지독한 땀 냄새를 잡아 줄 수 있었으니까.

-그쪽도 아시겠지만 보급품으로 나오는 탈취제는 솔직히 기능도 별로고 끈적거리기만 하잖아요? 그래서 월급을 받자마자 좀 무리해서 좋은 탈취제를 구매했습니다.

“그럼 그 탈취제 때문에 공격받은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탈취제 향기가 놈의 욕구를 강렬하게 자극했던 것 같았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낀 놈의 감정은 그랬습니다.

홀터벨트는 탈취제에 포함된 미량의 향기가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보통은 숲으로 출정하기 전에 사람의 냄새를 지우고 마물들이 싫어하는 ‘위장 향’을 바르기 때문이다.

“이상하군요. 탈취제에 포함된 향이라고 해 봤자 뿌리자마자 금방 날아가는 것이 보통, 게다가 위장 향까지 끼얹었을 텐데 위장 향을 뚫고 그 탈취제의 냄새를 맡는다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뭐라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하지만 제가 느낀 바로는 그랬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죠, 마물의 후각기관이 인간과 달리 몹시 예민할지.

맞는 말이었다.

헨리가 아무리 숲의 마물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놈들의 기호까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탈취제가 시발점이었다니…….’

모든 일의 비극이 고작 탈취제 때문이라는 사실이 조금 허탈했다.

하지만 고작 탈취제였기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혹시 그 탈취제의 이름이 뭔지 기억하십니까?”

-워낙 유명해서 그쪽도 들어 보셨을 겁니다. ‘페브리지’라는 이름의 탈취제였습니다.

“페브리지라면 청록색 병에 들어 있는 그것 말입니까?”

-예, 그거요. 요즘도 유명할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때는 나름대로 유명한 제품이었거든요. 그래서 월급날 무리를 해서 구매한 감이 좀 없잖아 있었습니다.

마침 헨리도 아는 제품이었다.

헨리는 이외에도 몇 가지 정보를 더 물어보았지만 아쉽게도 홀터벨트가 가진 정보는 그뿐이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복수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카터 소대장님을 뵙게 된다면 감사했다고만 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터 소대장님의 구출은 물론이고 복수까지 반드시 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그때였다.

-이봐, 거기까지 하지.

-예?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헥터가 홀터벨트의 말을 가로막은 것이다.

“헥터, 왜 그래?”

-문답을 대가로 약속할 보답은 그만하면 충분하다. 어이, 너도 이승에 미련이 많은 건 알겠지만 그쯤 하지 그래?

-……알겠습니다. 제 욕심이 지나쳤네요. 그럼.

헥터의 단호한 지적에 홀터벨트가 곧 신기루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직후, 헨리가 헥터에게 물었다.

“왜 그런 거야? 부탁 몇 개쯤은 들어줄 수도 있잖아? 그래도 나름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사람인데.”

-아니. 순박해 보여도 내 눈에는 보였다, 녀석이 가진 이승에 대한 미련이 말이야. 네가 부탁을 들어줄수록 녀석은 이승에 대한 미련들 때문에 더 큰 부탁들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저주를 내렸겠지.

“너처럼 말이야?”

-흥, 솔직히 네 입장에서 보면 나도 크게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야.

“이기적인 놈.”

-이놈이 그래도!

“알겠다, 알겠어. 그래도 적절한 타이밍에 잘 끊어 줬어. 안 그랬다면 네 말대로 끝도 없이 말려들었겠지.”

헥터의 주장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만약 그가 적절한 타이밍에 중재해 주지 않았더라면 헨리는 동정심에 끝없이 부탁을 받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결국 헥터가 그랬던 것처럼 펜던트에 저주를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시 흑마술이란…….’

새삼스레 흑마술의 위험성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튼 날이 밝는 대로 문제의 탈취제부터 한번 구해 봐야겠군.”

-그럼 이제 볼일은 끝난 건가? 그럼 슬슬 수련을 시작하자고, 지금도 충분히 늦었어.

“그러지. 목격자 조사에 시간을 너무 쏟아부었어.”

중요한 정보를 확보한 헨리는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서둘러 밀린 수련을 시작했다.

* * *

이튿날.

식사를 마친 후 헨리는 아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행정실을 찾았다.

행정실에는 두 명의 간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헨리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살로몬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인사를 받아 주었다.

실력 검증 이후로 처음 섞는 대화였다.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헨리는 태연스럽게 자리에 없는 간부를 찾았다.

“휴고 소대장님은 아직이십니까?”

“……그 친구는 당분간 쉬기로 했어.”

“어디 아프신가 봅니다?”

“좀 아프지…… 그것도 꽤 많이…… 음, 그래 당연히 아프고말고…….”

눈치를 보아하니 자존심에 어지간히 큰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그런 일로 병가를 냈다는 생각에 헨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제저녁에도 자리에 안 계셔서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한동안 저는 블랙의 뒤를 쫓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블랙? 설마 그 블랙?”

블랙이라는 말에 두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 대장님 특별 지시로 시작된 임무입니다. 어제 임시로 빌려 간 말은 마구간에 잘 반납해 두었고 기록표도 잘 작성해 두었습니다.”

“아, 아니 말 따위야 아무래도 좋지만, 블랙이라니? 너 블랙이 어떤 놈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가진 정보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제 방식대로 처음부터 다시 조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도 잠시 이셀란 일대장님께 다녀와야 합니다. 그러니 중대장님께 허가를 요청드립니다.”

“어, 어, 허가? 가, 가야지. 가도 되긴 하는데…… 아니 어떻게 신입 장교인 네가 블랙을…….”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살로몬이 말을 더듬었다.

이에 헨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살로몬에게 말했다.

“중대장님.”

“어, 어……?”

“이제 ‘신입 장교’나 ‘실력’으로 문제 삼는 행위는 하지 않기로 약속하신 것 아닙니까?”

헨리의 일침.

이에 살로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래, 미안하다.”

“감사합니다. 그럼 허가해 주신 걸로 알고 저는 이만 대장님이 계신 곳으로 가 보겠습니다.”

보고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할 말을 끝낸 헨리는 간단히 묵례를 해 보인 뒤 조용히 행정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행정실에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을 때였다.

“중대장님…… 괜찮으십니까?”

보그가 살로몬의 눈치를 보며 살며시 안부를 물었다.

“괜찮지, 괜찮고말고……. 하…… 어쩌다가 내가 이 모양이 됐냐…….”

그런 보그의 물음에 살로몬은 그저 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 * *

헨리가 이셀란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페브리지 같은 병외 물품은 요새 밖에 나가서 사 와야 했는데, 병역을 이행 중인 장교는 요새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게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탈취제 좀 구해 달라고 아침부터 찾아온 거다?”

“그렇습니다.”

“미친놈.”

그리고 그런 헨리를 보며 이셀란은 고개를 내저었다.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작은 가능성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뿐입니다.”

이셀란의 얼굴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해야 탈취제 하나 때문에 이 사달이 일어났다고 하면 누구라도 믿기 힘들 테니까.

하지만 자신이 믿고 맡긴 임무였다.

이셀란은 얼마간 고민하던 끝에 적당한 결정을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외출은 안 돼. 그런 말도 안 되는 걸로다가 병외 외출을 허락하면 다른 놈들 입에서 불만이 나올 게 뻔하니까. 며칠 뒤면 정기 교역상이 온다. 그때까지만 참아.”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임무가 중요하다고 한들 형평성이 달린 문제였으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헨리 소대장, 페브리지라면 혹시 이거?”

대화에 끼어든 것은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티니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청록색 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뭐야, 티니? 네가 그걸 왜 가지고 있어?”

“탈취제를 모으는 게 제 취미라서요. 게다가 페브리지는 저도 즐겨 쓰는 제품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마침 오늘 페브리지를 챙겨 왔는데 이런 우연이 있네요?”

그녀가 빙긋 웃어 보이며 탈취제를 흔들어 보였다.

“저거면 됩니다, 대장님.”

“저거면 된다고?”

“예.”

“티니, 그거 얼마야? 다음 교역상이 오면 내가 몇 개 더 사 줄 테니까 지금 좀 빌려줄 수 있어?”

“빌려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뭣하면 그냥 드릴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다른 걸 받고 싶은데요.”

“다른 거? 그게 뭔데?”

“헨리 소대장?”

“예, 티니 님?”

“헨리 소대장이 필요한 거니까 대장님이 아니라 헨리 소대장이 대가를 지불해 줬으면 좋겠어.”

“물론입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그럼 나중에 휴무 날에 나랑 밥 한번 먹어 줄 수 있어?”

“예?”

“싫으면 말고.”

“아, 아닙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그 정도야 쉽습니다.”

“그래? 그럼 약속한 거다?”

그렇게 헨리는 식사를 대가로 페브리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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