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전설의 소대장 (4)
툭.
잘린 휴고의 목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휴고는 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고, 일격에 승리를 거둔 헨리는 단단한 땅바닥에 자신의 목검을 꽂아 패자의 비석을 곧추세웠다.
좌중은 침묵에 휩싸였다. 대신 경악에 찬 표정으로 말없이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어떻습니까?”
헨리가 살로몬을 향해 물었다.
“이, 이 무슨…….”
살로몬 또한 말문이 턱 막혔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말이 된다고?’
오러. 단연코 쉽게 베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상대가 오러도 익히지 못한 맨몸의 러너급 검사라면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헨리는 보통의 러너급 검사가 아니었다. 자그마치 마도사의 경지에 오른 5서클 마법사였다.
그리고 마도사는 소드 마스터에 준하는, 아니 소드 마스터를 훨씬 뛰어넘는 경도의 마력을 지녔다.
그 때문에 마도사가 소드 마스터보다 훨씬 더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 리 없기에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검을 바라보며 서 있는 휴고에게 헨리가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
완벽한 패배였다.
더불어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겪었다.
익스퍼트 유저가 오러도 없는 일개 검사에게 검을 잘렸으니 말이다.
가볍게 테스트를 마친 헨리는 침묵하는 군중 사이를 가르며 행정실로 향했다.
그리고 행정실로 들어가기 전, 고개를 돌려 중대장에게 말했다.
“안 들어오십니까? 아침 회의 진행하셔야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뻔뻔하게 행동하는 헨리를 보며 군중은 다시 한 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 *
행정실에는 헨리를 포함한 세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큰 충격을 받은 휴고는 말없이 자신의 관사로 돌아갔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차마 그런 휴고를 불러낼 수가 없었다.
그 후 행정실로 돌아온 그들은 다시 아침 회의를 진행하려 했지만 좀처럼 쉬이 진행할 수가 없었다.
“……저는 늘 하던 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결국 보그 또한 먼저 행정실을 나섰다.
회의를 끝마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이나 행정실을 먼저 비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윽고 행정실에는 살로몬과 헨리,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헨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살로몬을 바라보았다.
“회의 진행 안 하십니까?”
식은땀이 났다.
분명히 오러도 깨치지 못한 일개 신입 장교가 분명한데 헨리에게서 총사령관님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헨리의 종용에 살로몬이 힘겹게 대답했다.
“이, 이게 자네에게 주어진 일이야. 읽어 보고 진행하도록 해. 나도 잠시만 좀 쉬어야겠어…….”
살로몬은 헨리에게 회의 서류를 넘겨준 뒤 힘겨운 발걸음으로 행정실을 나섰다.
“멍청한 놈들.”
간부들이 모두 행정실을 나섰을 때, 헨리는 그제야 조그맣게 욕설을 내뱉었다.
‘예나 지금이나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똑같구만.’
어리석은 행동이긴 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쉽게 저지르는 일인지라 설교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헨리는 살로몬이 주고 간 서류를 살폈다.
서류에는 헨리를 포함한 나머지 소대장들이 해야 할 일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헨리는 그중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게 뭐야?”
헨리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
그것은 바로 마물의 숲, 9급 구역을 순찰하며 그곳에서 발견한 게헨나들을 소탕하는 일이었다.
“겨우 이딴 게 임무라고?”
이셀란의 직속부대이니 임무를 내린 이 또한 이셀란이 분명했다.
헨리는 하찮기 짝이 없는 임무 내용을 보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가 무슨 뜻으로 이런 임무를 내려 주었는지는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일종의 배려일 테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신입 장교일 테니 차근차근 바닥부터 배워 나가라는 의미에서 내려 준 배려.’
마물의 숲. 대륙에서 유일하게 마물들이 나타나는 곳이다.
마물의 숲 끝에는 허공이 찢어진 것처럼 거대한 공간이 열려 있는데, 그곳이 바로 마계로 통하는 ‘마계의 문’이었다.
제국에서는 마계의 문과의 거리에 따라 급수를 매겨 위험 등급을 표시했다.
문과 가까울수록 1급에 가까웠고 요새와 가까울수록 9급에 가까웠다.
그러니 임무지에 적힌 9급 구역은 요새에서 가장 가까운, 안전한 숲의 외곽이라는 뜻이었다.
‘배려는 고맙지만 이따위 임무나 하자고 이곳에 온 게 아니라서 말이야.’
헨리는 임무 내용이 쓰인 서류를 챙겨 들었다.
그런 다음 중대의 말 한 필을 꺼낸 다음 서둘러 이셀란의 집무실로 향했다.
* * *
똑똑.
“들어와.”
이른 아침부터 이셀란의 집무실에 누군가가 방문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셀란은 먹던 다과를 내려놓고 방문자를 응대했다.
방문자는 헨리였다.
“특임대의 헨리 소대장입니다.”
헨리는 집무실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고개를 숙여 인사부터 해 보였다.
그러자 이셀란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니가 여긴 어쩐 일이냐?”
“지정해 주신 임무 때문에 논의차 방문했습니다.”
“임무 때문에?”
“예.”
“자세히 얘기해 봐.”
“임무 내용이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이상하다고?”
“예.”
“어떤 점이 이상하단 거지?”
“저는 특수 임무를 다루는 특임대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주어진 임무는 본대의 보병대원들이나 할 법한 단순한 소탕 임무더군요.”
헨리의 이야기를 듣던 이셀란과 티니는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말인즉슨 주어진 임무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항의를 하러 왔다는 뜻.
이에 티니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이셀란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혹시 내 착각이었나?”
“아닙니다. 대장님께서 이런 임무를 내려 주신 까닭은 잘 알고 있습니다.”
“까닭이 뭔데?”
“바닥부터 차근차근 경험을 쌓으라는 뜻에서 내려 주신 것 아닙니까?”
“그래. 기본을 무시하는 놈만큼 어설픈 놈도 없지. 그런데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임무가 하찮다고 불평을 하러 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이에 헨리는 좀 전에 있었던 휴고와의 대련 이야기를 해 주었다.
스스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 같아 낯간지러운 일이긴 했지만, 적어도 방금 전의 일화는 자신의 실력을 한 번 더 강조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헨리의 이야기를 듣던 이셀란과 티니는 다시 한 번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가 그 휴고를 이겼다고?”
“예, 그렇습니다.”
“오러가 둘린 목검을 베고 단 일격에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인데?”
“직접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헨리의 대답에 이셀란은 가만히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무려 휴고였다. 몇 년만 더 수련한다면 차기 소드 마스터가 될 놈이었는데, 그런 놈의 오러를 꺾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헨리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눈빛에 담긴 진심을 읽어 내지 못할 정도로 이셀란의 안목이 탁한 것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기똥찬 소식만 굴러들어 오는군.”
판단은 끝났다.
단순히 임무에 대한 불평을 하러 왔다면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휴고를 꺾고 온 녀석을 매몰차게 내쫓을 순 없었다.
이셀란은 능력주의자였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저 녀석을 한참이나 잘못 본 모양이야.’
헨리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감히 천재라는 호칭도 부족할 판이었다.
하지만 헨리가 매번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줄 때마다 이셀란은 경악과 더불어 감출 수 없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기분이었다.
“크흐흐흐…….”
이셀란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한번 들어나 보자. 첫 임무가 마음에 안 든다고 걷어찼으니 당연히 원하는 임무가 있을 테지?”
정답이었다.
하지만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줄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그래서 헨리는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딱히 생각해 둔 임무는 없지만 가 보고 싶은 곳은 있습니다.”
“가 보고 싶은 곳?”
“예. 6급 구역에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
“왜 하필 6급이지?”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듣기로는 6급 구역이 특임대의 주요 활동지라던데 이왕 첫 임무를 맡는다면 주요 활동지에 대해 알아보고 싶습니다.”
헨리가 6급 구역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곳에 바로 헨리가 찾고자 하는 ‘보물’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에 표시는 해 뒀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손을 하나라도 더 벌릴 수 있는 게 나에게는 좋다.’
물론 보물을 숨겨 둔 곳을 표시해 둔 이정표는 있었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 임무를 가장하여 6급 구역을 한번 탐색해 보고 싶었다. 무엇이든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으니까.
헨리의 요구에 이셀란이 짧게 고민했다.
하지만 불허할 이유가 없었기에 금방 수락 명령이 떨어졌다.
“좋아, 허락하지. 어차피 9급 구역 또한 경험을 쌓기 위해 보내려고 했던 곳이니까.”
“감사합니다.”
허락이 떨어진 직후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헨리를 붙잡아 세운 건 이셀란의 음흉한 웃음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헨리 소대장.”
“예?”
“아무리 그래도 임무인데, 6급 구역을 산책 다녀오듯 다녀올 순 없잖아?”
“……그렇긴 하죠?”
“이왕 다녀오는 곳, 네가 그렇게 원하는 임무다운 임무를 주겠다. 어때? 하고 싶지?”
“……물론입니다. 지시만 내려 주십시오.”
그 휴고를 제압한 헨리였다. 그런 헨리에게 새로운 호기심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
이셀란은 헨리를 또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티니, 가서 카터에 대한 서류 좀 가지고 와.”
“알겠습니다.”
티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서류 창고가 집무실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티니가 자리를 비우자 그제야 이셀란이 말했다.
“너, 전임 소대장이 누구였는지는 알고 있지?”
“카터 소대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카터 그놈이 전임이었지. 그놈이 왜 죽었는지도 알고?”
“그냥 임무 중에 변을 당한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맞아. 녀석은 임무 중에 변을 당해 순직하고 말았지. 근데 말이야, 그놈이 맡은 임무…… 궁금하지 않나?”
전임 소대장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임무.
헨리는 그제야 이셀란의 꿍꿍이를 알아챌 수 있었다.
‘능구렁이 같은 놈.’
이것은 단순한 끼워 팔기가 아니었다.
신임 소대장에게 굳이 전임 소대장의 임무를 언급한다는 것은, 카터에게 맡겼던 임무가 꽤나 중요했거나 급했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내뱉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 그렇잖아도 그 점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던 차입니다.”
“역시 너라면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사실 아주 관심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소대원이 하극상을 일으킬 정도로 광분하는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티니가 가지러 간 서류에 나와 있겠지만 카터는 꽤 오랫동안 어떠한 마물을 쫓고 있었다.”
“마물 말입니까?”
“그래. 근데 그 마물 놈이 보통 놈이 아니어서 말이야. 일단은 그놈을 ‘블랙’이라고 부르고 있긴 한데, 사실 놈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
“대체 어떤 놈입니까?”
“추측일 뿐이지만 놈은 아마도 유희를 즐기는 마족이 아닐까 싶다.”
“마족…… 말입니까?”
마족.
이셀란의 입에서 꽤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