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전설의 소대장 (2)
주문은 계속됐다.
“클린, 클린, 클린, 클린, 클린…….”
헨리는 같은 마법을 몇 번이나 중복해서 시전했다.
그러자 오른손 위로 눈부신 구체가 생겨났다.
‘됐다.’
텃세가 있을 것이라곤 어느 정도 예상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오래된 관사라니.
헨리는 이까짓 청소쯤이야 괴롭힘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걸 보여 주기로 했다.
“가동!”
파밧!
헨리는 밀집된 광휘의 구체를 먼지가 잔뜩 깔린 바닥을 향해 내동댕이쳤다.
그러자 엄청난 크기의 빛의 파도가 새카만 관사를 집어삼키는 굉장한 장경이 연출됐다.
* * *
늦은 오후.
숙취 때문에 늘어지게 잠을 자던 이셀란이 뒤늦게 집무실로 출근했다.
“대장님 오셨어요?”
그를 대신해서 업무를 처리 중이던 티니가 인사했다.
“흐아암, 역시 불타는 위스키야. 간만에 늘어지게 한숨 잤군. 그나저나 헨리 그놈은 어떻게 됐어?”
“말씀하신 대로 특임대로 배정시켰습니다. 지금쯤이면 특임대에 도착해서 적응하는 중일 겁니다.”
“티 안 나게 잘 유도했지?”
“물론입니다. 때마침 헨리가 원하는 조건과 비슷해서 유도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래? 그것 참 잘됐군. 기세를 몰아서 그쪽 문제도 잘 해결해 주면 좋으련만.”
“그렇잖아도 일 처리에 필요한 정보들은 대부분 알려 주었습니다.”
“크흐흐, 역시 티니야. 살로몬 그놈, 이참에 고생 한번 제대로 해 봐야 정신 차리지.”
“그런데 대장님. 굳이 이렇게 일을 번거롭게 하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재밌잖아. 그리고 헨리 그놈 그릇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렇군요. 아, 참! 그나저나 이번에는 무슨 부탁을 받으셨습니까?”
“부탁? 아아, 소원 말이지?”
“그렇습니다.”
“크흐흐흐, 그놈 그거 완전히 미친놈이야. 그놈이 무슨 소원을 빌었냐면…….”
그녀의 물음에 이셀란은 헨리가 부탁한 소원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소원의 내용을 들은 티니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그게 정말 소원이었습니까?”
“응. 확실히 미친놈이지?”
“우와…….”
헨리의 소원을 들은 티니는, 그 괴랄한 내용에 한동안 입을 벌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특수 임무 소대, 전원 무사히 복귀했습니다.”
“그래, 다들 수고했다.”
“전원 막사로 복귀시켜도 되겠습니까?”
“아니, 모두들 대기하고 있어. 소대원들이랑 갈 곳이 있다.”
“설마 정말로 왔습니까?”
“그래.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대장님께서 정말로 신입 장교를 보내 주실 줄은 몰랐다.”
“이야, 이거 소대원들 반발이 엄청나겠습니다?”
“기다려 봐.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굴리고 있던 참이니까.”
“어떻게 말입니까?”
“건물 뒤편에 있는 옛날 관사 알지?”
“뒤편에 있는 관사라면 중대장님이 옛날에 쓰시던 그 관사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은 창고로 쓰고 있는 곳. 내가 거기 청소를 시켰거든. 그곳이 네가 지낼 관사라면서 말이야.”
“와, 거기 크기가 얼마나 큰데…… 역시 중대장님이십니다.”
다른 부대에서 파견 나온 임시 소대장이 살로몬의 심술에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청소시킨 지 몇 시간쯤 됐는데 이제 슬슬 구경이나 가 보자. 청소 도구도 거지 같은 걸로 줬는데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한번 보자고.”
“그럼 소대원들 바로 집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파견 나온 소대장은 중대장과 마찬가지로 짐짓 들뜬 표정으로 소대원들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소식을 전해 들은 소대원들 또한 기대에 찬 표정으로 중대장과 함께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그리고 관사에 도착한 살로몬은 일부러 큰 목소리로 헨리를 찾았다.
“헨리, 안에 있나?”
그러나 헨리는 보이지 않았다.
‘관사에 있나?’
혹시 청소 중이라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생각한 살로몬은 재빨리 관사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문을 열자마자 자욱한 먼지를 뒤집어쓴 생쥐 같은 모습의 헨리를 기대했다.
그런데…….
“어, 어……?”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헨리는 깔끔하게 정리된 막사 안에서 한가로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음? 중대장님 오셨습니까?”
먼지는커녕 마치 새 건물을 연상케 할 만큼 산뜻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이에 당황한 살로몬이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애초에 너무 오래되어 철거하기로 한 관사였다. 그런 관사에서 산뜻한 냄새가 나다니?
중대장을 비롯한 특임 대원들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 살로몬 중대장님, 저는 그럼 이만 저희 부대로 복귀하겠습니다.”
당황한 것은 임시 소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타 부대에서 파견을 나온 그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서둘러 내빼는 데 바빴다.
“중대장님도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그나저나 뒤에 계신 분들은 누굽니까?”
놀란 사람들을 보며, 헨리는 태연한 표정으로 의아함을 연기했다.
‘내가 군 생활을 해도 너보다 훨씬 더 오래했다, 애송아.’
중첩된 클린의 효과는 대단했다.
효과가 수십 배로 늘어난 클린은 헨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청결함을 선사했고, 그 덕분에 헨리의 관사는 부대에서 가장 깨끗한 구역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가구나 인테리어는 또 어떠한가?
유행의 선구지라고 불리던 황궁에서 수십 년을 살았던 그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감각적인 센스를 활용하여 요새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사를 만들어 내는 것에 성공했다.
“오늘은 시간이 부족해서 외관 공사를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며칠 내로 외부 공사도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외, 외부도 손본다고?”
“그냥 간단한 보수만 좀 하겠습니다. 군데군데 낡은 곳들이 보여서 그럽니다.”
확실히 아름다운 내부에 비해 외관은 여전히 낡아 빠진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이 넓은 공간을, 청소는 물론이거니와 어떻게 인테리어까지 싹 뜯어 고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 너! 네가 진짜로 여기를 혼자서 다 치웠다고?”
“청소와 약간의 수리만 했을 뿐입니다. 여러 사람이 필요한 작업은 아니지요.”
당당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살로몬은 더더욱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결과가 이렇게나 뚜렷하니 더 이상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
“그나저나 무슨 일이십니까? 청소 검사 때문에 오신 겁니까?”
헨리의 집요한 지적에 살로몬은 헛기침을 해 보였다.
민망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대원들을 소개하는 쪽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인사하지. 우리 중대에서 실질적인 활동을 맡고 있는 특수 임무 소대의 대원들이다.”
“아, 소대원들이었군요. 그럼 저도 잠시 인사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그, 그래…….”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게 갈구어 대던 중대장이었다. 그러나 청소에 대한 충격 때문인지 좀처럼 무어라 입을 열지 못했다.
헨리는 중대장을 뒤로한 채 관사 앞에 정렬하고 있는 소대원들을 쭉 훑어보았다.
‘눈빛 한번 살벌하네.’
헨리를 반기지 않는 것은 비단 장교들만의 사정이 아니었다.
독립 중대일수록 가족 같은 연대감으로 똘똘 뭉친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헨리는 이들이 왜 자신을 반기지 않는지 그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죽은 소대장 이름이 카터였던가?’
죽은 소대장, 그리고 비어 있던 특임대의 소대장 자리.
그렇다. 헨리가 부임한 이곳은 원래는 죽은 소대장의 자리였던 것이다.
카터 소대장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이곳에서 무려 5년이나 근무한 베테랑 장교였다.
게다가 다른 귀족 출신 장교들과는 달리 평민 출신이었던 그는 특권 의식도 없었고, 그 때문인지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그러나 모든 비극은 그가 임무 중에 마물의 숲에서 죽임을 당한 것에서 시작됐다.
‘가족 같은 정이 넘치는 곳이 바로 독립 중대지. 게다가 그의 죽음을 잊기도 전에 능력 없는 소대장이 부임했으니 반항심이 생길 만도 해. 하지만 여기는 군대다. 감정 따위에 휘둘려선 안 될 군대.’
그것이 니들 중대의 근본적인 잘못이었다.
감정에 휘둘려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
특히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살로몬 중대장조차 소대원들과 함께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으니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내 힘으로 이곳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 아마 이셀란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허락해 준 것이겠지.’
얼핏 보면 헨리의 선택을 존중해 주어 이곳에 근무하는 것을 허락해 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수석 생도에게 근무지의 선택권을 준다고 해도, 신입 장교가 고를 수 있는 근무지는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이곳은 특수 임무를 맡아 움직이는 일대장의 직속부대. 그런 부대에 경험이 부족한 신입 장교를 부임시켰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도 실력으로 증명해 보인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의도였지만 어찌 됐든 헨리의 조건에 부합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들일 생각이었다.
이윽고 소대원들 앞에 선 헨리가 말했다.
“반갑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소대장, 헨리 모리스라고 한다.”
상급자가 먼저 인사를 건넸음에도 불구하고 소대원들 모두가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개판이구만.’
이것은 엄연한 항명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높은 인물인 중대장부터가 이 모양이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리라.
그 누구도 헨리의 인사에 반응하지 않자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참, 나…… 군기가 개판이구만.”
여기서 헨리의 편을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헨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밖에 없었다.
“너.”
“예.”
헨리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소대원을 가리키자 그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이름이 뭐지?”
“호딘입니다.”
“호딘. 카터 소대장이 쓰던 관사가 어디에 있지?”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하급자가 상급자의 질문에 토를 달게 되어 있나?”
“……아닙니다.”
“어디지?”
“저곳입니다.”
“안내해.”
헨리는 호딘을 앞세워 카터의 관사로 향했다.
끼이이익.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깔끔하게 정리된 그의 물건들이 보였다. 카터의 유품이었다.
“나가서 다시 정렬해 있어.”
“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헨리를 쳐다보았지만 호딘은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헨리가 양손으로 나무 상자를 들고 소대원들 앞에 나타났다.
헨리는 가져온 나무 상자를 소대원들 앞에 내려놓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사정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다들 전임 소대장인 카터 소대장을 잊지 못해서 이러는 거라지?”
다시 한 번 이어지는 침묵.
다들 헨리가 들고 온 나무 상자의 정체를 직감했다.
그것은 바로 죽은 소대장의 관사에 있던 그의 유품들이었다.
‘미련한 놈들.’
헨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헨리는 일부러 그의 유품들을 가지고 온 척, 쓸데없는 잡동사니들을 상자 가득 채워 왔다.
정황상 누가 봐도 유품처럼 보이게끔 말이다.
‘정신이 번쩍 들 거다, 아마.’
이어서 헨리는 품에서 기름병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콸콸콸.
마개를 열고 내용물을 쏟아붓자 기름 냄새가 났다.
헨리가 말했다.
“다들 대단한 시인들 납셨군. 그럴 거면 나가서 애도의 노래라도 부르지 왜 여기서 군인놀이를 하고 있는 거지?”
말을 마치면서 헨리는 이번에는 성냥갑을 꺼내 들었다.
치지직!
성냥갑에 성냥개비를 긁자 자그마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소대원들 모두의 얼굴에 ‘설마?’ 하는 표정이 깃들었다.
“모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이건 명령이다.”
말을 마친 직후, 헨리는 망설임 없이 성냥불을 나무 상자로 던졌다.
화르륵!
기름을 머금은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그 모습을 본 소대원들의 눈에 핏발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가장 뒤편에 정렬해 있던 소대원의 목소리였다.
그는 고함과 함께 앞으로 뛰쳐나와 상의를 탈의하더니, 그것으로 불을 끄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기름을 머금은 불꽃을 옷 한 벌로 제압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헨리는 그런 소대원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화르륵!
“안 돼에!”
결국 그의 옷에도 불이 붙고 말았다.
그것은 아무도 멈출 수 없는 잔인한 작별이었다.
“으아아아!”
맥없이 타들어 가는 유품들을 보며 이름 모를 소대원이 절규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헨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소대장님의 유품을!”
“미쳤군.”
그는 이미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소대원들이 뒤늦게 나서며 그를 말리려던 찰나, 헨리가 말했다.
“놔둬.”
“하, 하지만!”
“놔두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 뭐 하는 짓들이지?”
상황은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헨리는 냉랭한 분위기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상의를 탈의하며 말했다.
“눈빛 한번 살벌하네. 이러다 하극상이라도 일으키겠어. 꼬우면 계급장 떼고 한판 붙든가.”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소리를 지른 것은 살로몬이었다.
그러나 헨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중대장님.”
“뭐?”
“이건 그냥 제 부하가 하극상을 일으키지 못하게 미리 예방 조치를 하는 것뿐입니다.”
헨리가 담담하게 대꾸하자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던 소대원이 힘겹게 말했다.
“지금 하신 말씀…… 꼭 지키셔야 합니다.”
“걱정도 많으셔라. 덤비기나 해.”
그 순간, 소대원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