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교육대 (4)
오전에는 이론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무예를 갈고닦는다.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반복되는 학습 속에서 진가가 발휘된다는 교육대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지루해 죽겠네.’
처음에는 오랜만의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였던 헨리지만, 그 재미는 딱 사흘밖에 가지 못했다.
‘내가 가르쳐도 저거보단 잘 가르치겠다.’
헨리는 강의 실력이 떨어지는 교육 장교를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그것도 강의 실력이 떨어지는 선생에게 수업을 듣는 것은 매우 큰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루 전체가 지루한 것은 아니었다.
교육과정이 3주 차에 접어들면서 ‘특수 대련’이라는 새로운 과정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특수 대련.
어떤 대련은 동료를 지켜 가며 다수를 상대해야 하는가 하면 어떤 대련은 단체 개인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특수한 상황을 가정하고 생도의 한계치를 자극하는 훈련법이었다.
그러나 특수 대련의 끝은 늘 한결같았다.
“승자는 헨리 생도.”
절대 바뀌지 않을 결과였다.
헨리는 주변에 쓰러진 동기들을 둘러보며 여유롭게 마법 무장을 해제했다.
“제길, 또 지다니!”
이번 종목은 단체 개인전이었다.
그러나 동기들은 헨리 한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해 일부러 임시 동맹까지 맺고 협동 공격을 퍼부었으나 그마저도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의외의 인물도 있었다.
모두가 협공에 협조할 때 로난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차석의 자존심을 떠나,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괜찮냐?”
“이야, 나는 대체 언제 너를 이겨 보냐.”
“그래 가지고 마물 앞에서 칼이나 뽑겠냐?”
“네가 너무 뛰어나다는 생각은 안 해 봤고?”
“핑계는.”
헨리는 쓰러진 로난에게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주었다.
이로써 교육대에서의 마지막 훈련이 끝났다.
교육 장교가 훈련 생도들을 한데 모은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이 교육대 마지막 날이지?”
“예.”
“내일이면 여태껏 쌓아 놓은 성적들을 바탕으로 첫 번째 근무지가 정해진다.”
꿀꺽.
첫 번째 근무지라는 말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너무 겁먹을 것 없다. 교육 기간 동안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너희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보직을 배정해 줄 테니까. 혹시라도 보직이 적성에 맞지 않다면 병과 이전이 가능하니 너무 상심하지는 말도록.”
지휘관이라고 해서 모두가 마물을 상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전투를, 어떤 이는 보급을 맡아야만 운영되는 것이 군대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고했다. 내일은 퇴소식 이후 발령받은 부대로 바로 이동될 터이니, 아직 서먹한 사이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푸는 게 좋을 거다. 어찌 됐든 너희는 동기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럼 모든 교육이 끝났으니 뒤풀이라도 해야지? 식당에 술과 고기를 준비해 놓았으니 다들 마음껏 회포를 풀도록. 이상!”
“감사합니다!”
한 달 만에 떨어진 음주 허가 명령에 모든 생도들이 기뻐했다.
모두가 아이처럼 식당으로 향할 때, 교육 장교가 나지막이 헨리에게 말했다.
“헨리 생도?”
“예, 장교님.”
“이셀란 일대장님께서 너를 찾으신다. 행정실 앞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으니 곧바로 이동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행정실 앞에는 정말로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것도 티니와 함께.
그녀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왔어?”
헨리의 신분이 민간인에서 훈련 생도가 된 덕분에 티니는 자연스럽게 반말을 사용했다.
“예, 장교님.”
“어머, 나한테까지 장교님이라고 딱딱하게 부를 필욘 없어. 그냥 티니 님이라고 불러.”
“알겠습니다.”
“어서 타, 대장님께서 기다리셔.”
마차가 출발한 뒤, 그녀는 이동하는 동안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교육대는 지낼 만했어?”
“신경 써 주신 덕분에 편히 지냈습니다.”
“신경은 무슨, 이미 다 들어서 알고 있어. 역대 훈련 생도들 중에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지? 이거 질투 나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도 교육대 수석 출신이거든. 어떻게 보면 내 후배네?”
그녀 또한 뛰어난 재원이라는 사실을 교육 장교들에게 들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또한 수석 출신일 줄은 몰랐다.
“대장님께서도 몹시 흐뭇해하셔. 그리고 이건 혹시나 해서 알려 주는 건데, 지금 네가 대장님의 호출을 받은 건 네가 대장님의 비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야.”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원래 매 기수마다 수석은 따로 불러내서 개인적으로 공을 치하하시거든. 그런데 마침 네가 수석이라 더 기뻐하시는 거야.”
“그렇군요.”
“아, 참! 그리고 선배로서 미리 팁을 말해 주자면, 대장님은 매 기수 수석의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주셔.”
“소원을 말입니까?”
“응. 이셀란 대장님이 요새에서 서열 3위라는 건 잘 알고 있지? 웬만한 소원은 거의 다 들어주시니까 잘 한번 생각해 봐.”
뜻밖의 정보였다.
이번에도 적당한 칭찬과 함께 밤새 술이나 퍼마시려는 건 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도 고생 좀 해야 할 거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거 말이야, 이거.”
그녀가 술잔을 들어 손가락을 꺾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하……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흐흐, 고생 좀 해.”
역시나는 역시나였다.
* * *
얼마 뒤 마차가 멈춰 섰다.
그러나 마차가 도착한 곳은 집무실이 아닌 이셀란의 관사였다.
헨리가 마차에 내린 직후, 티니가 마차의 문을 닫기 전에 말했다.
“아, 참! 그리고 말이야.”
“예?”
“오늘 안 자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내가 필요할 때 병사를 시켜서 날 불러. 그럼 내가 관사로 올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건 좀 있으면 알게 될 거야.”
헨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된다고 하니 잠자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럼 수고해.”
“티니 님도 고생하십시오.”
그녀가 떠난 후, 헨리는 곧 있을 술자리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뒤 관사 안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관사에 들어서자 젖은 머리에 가운 차림의 이셀란이 헨리를 맞아 주었다.
그는 한 손에 거대한 맥주잔을 쥐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드워프를 연상케 했다.
“오, 왔냐?”
“……혹시 목욕하셨습니까?”
“퇴근 후엔 목욕이 제격이지.”
“티니 님께선 아직 퇴근 안 하신 것 같던데요.”
“일이 좀 남았나 보지. 너도 목욕할 테냐?”
“……됐습니다.”
“수석으로 수료했다면서?”
“그렇습니다.”
“하긴 역대급 점수를 기록했는데 수석이 아닌 게 이상한 거지. 어때, 교육대 생활은 할 만했냐?”
“좀 지루했던 것만 빼면 괜찮았습니다.”
“크크크, 미친놈. 교육대에 있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걸 곧 알게 될 테지. 어이, 식사 준비해.”
“옙! 알겠습니다!”
가볍게 안부를 나눈 후, 두 사람은 관사병이 차린 음식들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식탁이 부러져라 차린 음식들이었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다.”
“감동입니다.”
“그렇지? 그럼 일단 밥 먹기 전에 가볍게 축배부터 들자고.”
쿵!
축배를 제안한 이셀란은 식탁 밑에서 거대한 술통을 들어 올려 식탁 위에 얹었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주문했지. 막거스의 불타는 위스키, 드럼통 에디션이다!”
‘이런 미친.’
막거스의 불타는 위스키.
조주 장인 막거스가 만든,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독한 위스키의 일종이었다.
‘저걸 드럼통으로 갖고 오다니…….’
막거스의 위스키는 특유의 높은 도수를 자랑한다. 그 때문에 아무리 술에 강한 주당들이라도 한 병을 채 마시지 못한다는 게 그의 위스키였다.
그런데 이셀란은 그런 위스키를 드럼통째로 준비해 둔 것이다.
“한 잔 받지.”
큼지막한 잔에 짙은 갈색 물결이 가득 채워졌다.
이 정도 도수라면 마나로 알코올을 분해하는 데에도 시간이 꽤나 걸릴 것이다.
그리고 알코올을 분해하는 걸 떠나…….
‘이걸 원액으로 마신다고?’
유리잔 가득 부어진 위스키에는 아이싱을 위한 얼음 두어 개가 전부였다.
즉, 맛을 위한 온더록스는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
“자, 자! 우리 잘난 한스 놈의 성공적인 자식 농사를 위하여, 건배!”
짠!
헨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안으로 불타는 위스키를 들이붓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너무 독한 나머지 혀가 마비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맛은 또 어떠한가?
이것은 축배가 아니라 벌칙이 분명했다.
“맛있지?”
“……예, 최곱니다.”
조그마한 잔에 먹는 것이 정석인 술을 맥주잔에 들이부어 마셔 댔으니 식도가 화끈거리다 못해 불이 붙는 것만 같았다.
“그흐흐흐, 자! 그럼 내가 취해 버리기 전에 우리 수석님에게 상을 한번 내려 볼까? 어이, 그거 가져와 봐.”
그 또한 불타는 위스키 앞에선 자신의 주량을 장담할 수 없었던지 서둘러 상부터 내렸다.
이윽고 병사가 가져온 것은 검집에 담긴 한 자루의 칼이었다.
“받아라.”
그가 검을 선물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평생을 마법사로 살아오다 보니 검을 선물받은 것은 이번이 난생처음이었다.
검을 받아 든 헨리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과거였다면 절대로 흥미가 없었을 선물이다.
그러나 이제는 검술도 함께 익히는 처지이다 보니 검에 대해 관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슬그렁.
헨리는 위스키 때문에 화끈해진 얼굴로 검집에서 검을 뽑아 보았다.
“어떠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검에 대해 잘 모르는 헨리가 보아도 몹시 아름다운 검이었다.
헨리는 한동안 미녀의 자태를 구경하듯 검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그거 성검이다.”
“예?”
“우리 요새 최고의 사제님께서 축복을 내려 주신 검이거든. 그럼 그게 성검이 아니면 무엇이겠냐?”
사제의 축복은 신의 권능을 빌려 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영구적인 축복을 내리는 것은 웬만한 신성력이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어때? 마물을 상대하기엔 제격이겠지?”
“너무 멋집니다. 이런 검을 선물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럼 일단 한 잔 더 들어 볼까?”
“예!”
선물을 받고 이토록 기뻤던 적이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한때는 고작 날붙이에 불과한 검에 열광하는 기사 놈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검을 직접 다뤄 보며 헨리는 똑똑히 깨달았다, 기사에게 훌륭한 검만큼 더 소중한 보물은 없다는 것을.
헨리는 흡족한 마음으로 불타는 위스키를 비워 냈다.
“크으.”
분명히 쓰디쓴 위스키였음에도 불구하고 첫 잔과는 확연히 다른 맛이었다.
헨리는 얼굴이 화끈해지면서 기분이 얼큰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잘 마실 줄 알았다. 너 임마, 나 아니면 요새에서 이런 술은 구경도 못 해!”
“그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크크, 그래. 그럼 이제 두 번째 상을 받아 보실까?”
“상이 또 있습니까?”
아직 티니가 말한 그 상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헨리는 짐짓 모르는 척 태연스럽게 대꾸했다.
“당연한 소릴! 나 이셀란, 겨우 칼 한 자루 주고 생색낼 사람이 아니란 말씀!”
그가 다시 한 번 턱짓해 보이자 이번엔 두 명의 병사가 거대한 게시판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이건…….”
“다른 놈들은 이미 보직과 근무지가 정해졌다. 하지만 우리 헨리 생도가 누구냐? 무려 역대급 훈련 생도란 말씀! 자, 이건 우리 칼리번 요새의 조직도다. 네가 원하는 곳이 있으면 말해 봐라. 내 어디든 보내 줄 테니.”
이건 정말로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하긴 역대급 성적을 기록했으니 과연 어떤 근무지에 배정받을지 몹시 궁금하던 차였다.
그런데 본인이 직접 병과를 선택할 수 있다니?
요새에 볼일이 많은 헨리로서는 최고의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당장 정하지 않아도 된다. 머리 아픈 고민은 회포가 끝난 뒤에나 하자고! 그럼 다시 잔 들어!”
이셀란은 헨리가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물론 그의 주사가 시작된다면 마음 편히 고민하지는 못할 테지만.
‘하지만 이건 정말로 큰 기회다!’
얼마 뒤면 그의 끔찍한 주사가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기쁜 마음으로 그의 주사를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그리고 몇 시간 뒤.
“눼가 그래서 임마! 어! 그때 카를 딱 뽑아 들고! 어! 이러케 높이, 어!”
과연 막거스의 불타는 위스키였다.
두 사람이 드럼통을 대부분 비워 갈 때쯤, 이셀란은 전보다 훨씬 더 심하게 취해 있었다.
물론 헨리 또한 독한 술을 체내에서 분해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이씌…… 여윽씨 막거쓰야…… 내가 꼼짜글 모타겐네…….”
혀가 풀리다 못해 지렁이가 되어 기어가는 발음이었다.
그런 이셀란을 보며 헨리는 생각했다.
‘휴, 차라리 이번이 낫군. 술은 좀 독하지만 술자리는 빨리 끝나니.’
독한 만큼 자신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의 주사를 듣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촴, 그리고 너…… 혹시 가꼬 시픈 거나, 하고 시푼 거 인냐?”
술에 취했지만 분명했다. 티니가 알려 준 그것이었다.
“혹시 소원이라도 들어주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뤠, 임마! 내가 어! 수석들한퉤만 매번 소워늘 드뤄줜는데, 너도 드뤄줘야지…… 안 구뤠?”
“정말 어떤 소원이든 상관없습니까?”
“그뤰마!”
“감사합니다, 일대장님. 그럼 제 소원은…….”
마차에서부터 쭉 고민해 온 소원.
헨리는 곁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을 증인으로 세운 뒤 고민했던 소원을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