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입대 (3)
이셀란의 주도하에 세 사람은 1층 복도 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집무실의 지하로 향하는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티니.”
“예.”
이셀란이 문을 향해 턱짓하자 티니가 짧은 대답과 함께 자물쇠를 열었다.
철컥!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지하에 도착하자, 티니가 벽면을 더듬어 무언가를 건드렸다.
화악.
주위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아마도 마법 도구를 이용한 것이리라.
‘설비에 신경 좀 썼나 보네.’
주위가 밝아지자 감추어져 있던 지하실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별다른 건 없었다.
정돈되어 있는 1층과는 달리 집무실의 지하는 울퉁불퉁한 벽면이 그대로 드러난 날것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곳에 무엇이라도 있습니까?”
“말했잖아, 최근에 재밌는 취미가 생겼다고. 티니.”
“예, 대장님.”
헨리의 질문에 이셀란이 흐흐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가 턱짓하자 티니의 손이 재빠르게 벽면을 더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그녀가 어떠한 장치를 만지자 평범한 벽면인 줄 알았던 곳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천장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장이 솟아난 직후, 그 자리에는 의외의 것이 드러났다.
보랏빛 피부에 사람만 한 덩치, 그리고 척추를 따라 듬성듬성 솟아 있는 큼지막한 뿔들.
‘마물?’
그것은 마물이 확실했다.
‘저놈이 아마…… 퍼플 게헨나였던가?’
헨리는 마물을 발견하자마자 녀석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녀석은 전생에 마왕을 잡으러 갔을 때 지겹도록 상대한 놈들 중에 하나였으니까.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마물이 이쪽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떠냐, 마물을 처음 본 소감이?”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이셀란은 흡족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미친놈.’
이젠 정말로 확신할 수 있었다.
이셀란, 그는 미친놈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자기 집무실 지하에 마물을 생포해 둘 생각을 다 했을까?
그러나 헨리는 짐짓 놀란 척, 그의 기대에 적당히 호응해 주었다.
“설마 마물을 생포하신 겁니까?”
“어때, 신기하지 않냐? 그건 그렇고, 마물을 처음 본 소감이 어때? 징그럽게 생겼지?”
“예, 확실히 기분 나쁘게 생기긴 했습니다.”
“크크크, 그거 잘됐네. 혹시라도 첫인상이 좋으면 어떨까 걱정했었거든. 그러면 죽일 때 좀 꺼림칙하잖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지막 시험이다. 저 녀석을 쓰러뜨린다면 내 확실히 너를 밀어주도록 하지.”
이에 헨리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진짜 미친놈이군, 원래 이렇게 무모한가?’
헨리는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이셀란, 그는 절대로 미친놈이 확실하다고 말이다.
확실히 시험을 한다는 방식이 너무나 무모했다.
마물은 일반적으로 제국 황정이 직접 관리해야 할 만큼 위험한 존재이고, 보통 사람들은 평생에 한 번 보기 힘들다.
그러나 보기 힘든 만큼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헨리는 이번 시험으로 그의 속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었다.
항상 유쾌하고 호탕한 척했지만 결국은 헨리의 가능성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곰인 척하는 여우였군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마물을 처음 본 인간에게 시험 상대로 내줄 수 있겠는가.
헨리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마물의 상대법은 일반 몬스터와는 확연히 달랐으니까.
‘여기서 확실히 끝내야겠어.’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시험이라는 생각은 가지지 않기로 했다.
저 변덕스러운 놈의 마음이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헨리는 이번 기회에 확실한 인상을 심어 주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저놈을 쓰러뜨리면 되는 거죠?”
“그래, 어디 한번 솜씨 구경이나 해 보자꾸나.”
시험이 시작되자, 이셀란과 티니 두 사람은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헨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헨리는 검을 뽑았다.
이셀란의 첫 번째 시험 때문에 그의 검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지만 마법으로 무장시킨다면 이번 시험까지는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헨리는 게헨나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리고 헨리가 네 번째 발걸음을 뻗은 순간이었다.
키릭?
세 번째 걸음 때까지만 해도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던 녀석이 네 번째 발걸음부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계가 있었군.’
특정 구역까지 게헨나를 가두는 결계가 있는 것 같았다. 네 번째 걸음에서 헨리는 그 결계 안으로 들어선 것이고.
그리고 게헨나가 헨리에게 관심을 가진 순간, 시험은 시작되었다.
키르륵.
웬만한 성인 남성만큼의 신장을 가진 퍼플 게헨나는 몬스터로 치자면 오크에 가까운 놈이었다.
마물들 중에 가장 개체 수가 많고 번식력이 뛰어난 게헨나들은 보통은 초록빛을 띠고 있지만, 이따금씩 변이종으로 보라색 피부를 가진 놈들이 있었다.
그리고 변이종은 보통, 평범한 것들에 비해 훨씬 강력한 것이 특징이었다.
키에에엑!
“헤이스트.”
후들거리던 다리가 제 기능을 되찾으면서 헨리는 재빨리 신속의 주문을 외웠다.
게헨나는 순식간에 헨리와 거리를 좁혀 왔지만 주문을 외운 헨리의 속도가 한층 더 빨랐다.
헨리는 순식간에 검을 역수로 쥔 다음 아래에서 위로 뻗어 게헨나의 목을 노렸다.
챙캉!
단단한 바위에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게헨나의 단단한 피부가 헨리의 공격을 방어해 낸 것이다.
‘연기는 이쯤이면 되겠고.’
언뜻 보면 선제공격을 회피하고 순식간에 급소를 노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모두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헨리는 게헨나의 공략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공략법대로 녀석을 쓰러뜨린다면, 헨리가 마물을 처음 본다고 생각하는 이셀란이 의심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헨리는 일부러 쓸데없는 탐색전을 연기해 가며 충분한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파쇄음이 들린 직후, 헨리의 검은 게헨나의 목에서 미끄러졌다.
영리한 게헨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연계 공격을 시전했다.
키악!
게헨나가 얼굴을 뻗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하마터면 물릴 뻔하였지만 헨리는 일부러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 다음 발끝으로 원을 그리며 부드럽게 녀석의 뒤를 확보했다.
지난 몇 달간 죽도록 연습했던 서클 스텝을 응용한 것이다.
‘끝이다!’
척추를 따라 듬성듬성 뻗어 있는 게헨나의 등 뿔. 헨리는 그 뿔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동작은 짧고 간결하게.
순식간에 게헨나의 뿔을 잘라 낸 헨리는 잘라 낸 녀석의 뿔을 결계 밖으로 집어 던졌다.
데구루루.
뿔이 잘린 게헨나는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자신의 뿔을 찾기 시작했다.
등의 뿔이 바로 게헨나의 약점이었기 때문이다.
‘끝났네.’
게헨나의 공략법은 간단했다.
외피가 단단한 게헨나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등에 돋아난 뿔을 이용해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에, 그 뿔을 자르면 되는 것이다.
퍼플 게헨나의 눈앞이 핑핑 도는 것은 당연했다.
‘끝났네.’
헨리는 일부러 가장 큼지막한 뿔을 잘랐다.
게다가 잘린 뿔이 결계 밖으로 던져졌으니 아무리 용을 써도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헨리는 휘청거리는 게헨나를 보며 왜 저러는지 알 수 없다는 듯 의아한 연기까지 해 보였다.
그리고 얼마간 게헨나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더 지켜본 후 결계 밖의 이셀란을 쳐다보며 물었다.
“처리할까요?”
“크크크, 저 미친놈. 정말로 제압할 줄이야.”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저 킬킬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티니가 헨리에게 바깥으로 나오라고 손짓했다. 시험의 종료였다.
헨리는 시킨 대로 게헨나를 죽일까도 싶었지만 ‘최근에 생긴 취미’라고 하였으니 굳이 죽이지는 않기로 했다.
그편이 점수 따기에는 훨씬 용이할 테니까.
헨리가 결계 밖으로 나오자 이셀란이 뿔을 걷어차 결계 안으로 집어넣었다.
“어떻게 알았나, 저놈의 약점이 뿔이라는 것을?”
“그냥 감이었습니다. 외피가 단단하길래 혹시 뿔은 무르지 않을까 싶어 공격해 본 게 전붑니다.”
“그냥 감이었다고?”
“예.”
“크크크, 이놈 이거 감까지 좋은 놈이었네?”
“혹시 다른 시험도 남았습니까?”
“아니, 됐다. 더 이상 시험해 봤자 재미없을 것 같거든.”
모든 시험은 도전자가 고전해야 재밌는 법이다.
하지만 헨리는 고전하는 기색이 없으니 금세 흥미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헨리는 그제야 미소를 띨 수가 있었다.
* * *
“잡다한 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너는 내일부터 교육대로 가서 한 달간 기초 훈련부터 받아라.”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더 이상의 추가적인 시험은 없었고, 헨리의 배경이 되어 주기로 한 이셀란은 본격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사실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누구든 제도를 통해 입대를 하게 될 경우 기초 군사교육을 거친 뒤, 하급 장교부터 시작하는 것이 관례였으니까.
하지만 이번 경우엔 좀 달랐다.
“대장님.”
“오, 그래, 티니. 무슨 일이야?”
“말씀 중에 끼어들어 죄송합니다만 현재 교육대에선 이번 기수들의 교육이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
“예?”
“아까 말했잖아, 잡다한 건 내가 알아서 처리한다고? 오히려 잘됐네, 한 달이나 시간을 축내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교육이 시작된 지 얼마나 됐지?”
“이제 2주 차에 막 접어들었습니다.”
“딱 좋군. 이 녀석은 중간에 끼워 넣고, 부족한 건 야간 교육을 시키든지 해서 알아서 가르치게 해.”
“예, 알겠습니다.”
유능한 수행 기사는 누구처럼 구구절절한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상관의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셀란이 이곳에서 가지는 힘이기도 했다.
이에 헨리가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려는 무슨, 이건 시험을 통과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보통 놈들은 상상도 못 할 그럴 특권이지.”
이셀란은 약속한 것을 확실히 지켰다.
특히나 지독한 능력주의자인 그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에 특권은 더더욱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막 도착한 사람한테 내가 너무 가혹하게 굴었나?”
“아닙니다. 견딜 만했습니다.”
“크크크, 당연히 그래야지! 겨우 그 정도 갖고 엄살 피우면 안 될 말이지. 그래도 긴 여독에 지쳤을 테니 오늘 밤은 내 관사에서 머무르는 걸로 하지. 티니! 나는 그만 퇴근할 생각인데 네 생각은 어때?”
“저는 일이 남아서, 좀 더 남아 있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티니야. 책임감이 강해. 이러니 내가 이뻐할 수밖에.”
벌써부터 퇴근하기에는 분명히 이른 시간이었다.
게다가 깔끔하기 그지없는 이셀란의 책상에 비해 티니의 책상에는 온갖 서류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악덕 상관이로군.’
그녀의 책상 한편에 대리 결재를 위한 이셀란의 도장이 보였지만 헨리는 못 본 척하기로 했다.
이셀란이 말했다.
“헨리, 자네 술은 좀 하나?”
“아주 못하진 않습니다.”
“역시 여독을 푸는 데에는 술이 최고지. 관사로 가자! 한동안 음식만도 못한 것들만 먹었을 테니 내가 제대로 대접해 주마.”
“감사합니다, 대장님.”
* * *
극진한 대접이었다.
헨리는 모리스 영지에서는 구경도 못 해 본 술들은 물론이거니와 고관 특유의 권한 덕분에 각종 진미들을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맛볼 수 있었다.
또한 이셀란은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주량 또한 어마어마했는데, 독한 독주를 벌써 두 병이나 비웠음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크하하! 설마설마했는데 주량까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만!”
낮부터 계속된 술자리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그리고 그 술자리가 마침내 반나절을 경과했을 무렵, 헨리는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후…… 역시 기사 놈들은 다 똑같구먼, 정말.’
마력을 순환시킴으로써 알코올을 분해시키기 때문에 마도사는 결코 취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힘들었다.
이셀란이 눈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몇 시간이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끔찍한 주사를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셀란의 횡포를 견딜 수 없었던 헨리는 마법으로 그를 잠재우고자 했다.
‘슬립!’
마도사급의 힘이 담긴 수면 마법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이셀란은 잠들기는커녕 여전히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서, 설마?’
설마는 사실이었다.
최악의 사선이라 불리는 칼리번 요새 관사에는, 대장급 지휘관의 보호를 목적으로 온갖 저주와 마법을 차단하는 강력한 보호 마법이 설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