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입대 (2)
‘이런 미친!’
다짜고짜 휘둘린 검은 거대한 풍압을 일으키며 해일처럼 덮쳐 왔다.
이에 헨리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순식간에 마법 무장을 몸에 둘렀다.
그리고…….
쾅!
도저히 한 손으로 막아 낼 자신이 없어 검을 비스듬하게 눕혀 양손으로 검날을 떠받들었다.
엄청난 무게였다. 흡사 산사태를 온몸으로 막아 내는 기분이었다.
‘이 미친 영감탱이가!’
다리가 저릿했다.
한 줌의 오러도 없는 순수한 완력 그 자체의 내려치기였다.
변방의 소드 익스퍼트 따위가 아닌, 요새의 일대장씩이나 되는 소드 마스터의 내려치기였으니까.
헨리가 아무리 각성과 수련을 병행해 왔다지만 마법으로 몸을 무장하지 않았더라면 속절없이 두 동강 났을지도 모를 충격이었다.
‘호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이셀란의 입꼬리가 귓가를 향해 치솟기 시작했다.
“이걸 막아?”
“크흡……! 이제 됐습니까?”
헨리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이셀란에게 물었다.
“야.”
“예?”
“솔직히 막을 줄은 몰랐다. 한 번만 더 막아 봐라.”
“예?”
“간다.”
다시 검이 들어 올려졌다.
덕분에 일순간 엄청난 무게에서 해방될 수 있었지만 그것은 두 번째 여파를 위한 잠깐의 여유일 뿐이었다.
‘이런 미친놈이!’
그는 진심이었다.
헨리는 검이 들어 올려지는 것을 보자마자 다시 주문을 외울 수밖에 없었다.
콰앙!
다시 한 번 투핸디드 빅 소드가 떨어졌다.
충격은 첫 번째보다 훨씬 강했으며 이번에는 충돌로 인한 풍압까지 발생했다.
“허.”
후들후들.
한계였다.
아무리 마법으로 신체와 칼을 강화시킨다고 한들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았다.
헨리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다리를 정신력으로 붙잡아 버텼다.
그런데 그 끈질긴 버티기가 이셀란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간 모양이었다.
“한 번만 더…….”
구세주의 등장은 그때였다.
그의 보좌관이자 수행 기사인 티니가 세 번째 일격을 막아 준 것이다.
“대장님.”
“어, 왜?”
“그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쩝, 그래 보였나? 그래도 솔직히 놀랐어. 아직 오러도 익히지 못한 애송이가 내 일격을 두 번이나 막아 내다니.”
헨리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지 않았다면 볼썽사나운 광경이 연출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놀란 것은 티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러너급 검사가 대장님의 공격을 두 번이나 막았다고?’
소드 러너란 소드 익스퍼트 이전의 검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티니는 겉으로는 담담한 척했지만 몹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 또한 이셀란의 일격을 막아 보았는데, 오러를 두르지 않는 이상 그녀로선 한 번의 방어도 벅찼기 때문이다.
‘또 다른 괴물의 탄생인가.’
그녀는 이셀란의 업무 대부분을 대신 처리하는 유능한 수행 기사였다.
하지만 유능함과는 별개로 그녀는 요새의 그 어느 기사들보다도 똑똑하고 지혜로웠다.
특히 사람을 보는 눈이 탁월했는데, 그녀는 헨리에게 어마어마한 재능을 엿본 듯했다.
그녀의 만류에 이셀란은 검을 회수한 뒤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저 개자식이!’
헨리는 튀어나오는 욕을 집어삼켜야만 했다.
마법으로 무장한 검은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이 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다. 게다가 여전히 오금이 저릴 정도로 그 여운이 대단했다.
하지만 힘든 티를 낼 순 없었다.
이것은 그가 자신에게 내린 일종의 테스트였으니까.
그래서 헨리는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한 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것을 보던 이셀란이 물 한 모금을 마신 직후 헨리를 향해 말했다.
“이놈 이거 물건이네.”
헨리가 미래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셀란 그는 요새 내에서도 엄청난 괴짜로 통하던 사내였다.
그는 힘과 능력을 최고로 칠 만큼 깐깐한 능력주의자였으며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능력이 부족하다면 가차 없이 내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정치와 줄타기가 아닌 순수한 무력만으로 일대장 자리를 꿰찬 사내였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장난처럼 내린 시험에 통과하였으니 그가 관심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가 흐뭇한 시선으로 헨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크크, 최근에 청탁하러 온 놈들은 죄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녀석들이었는데 간만에 진짜배기가 들어왔어.”
“감사합니다.”
“그래도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핏줄이군. 너!”
“예, 일대장님.”
“세상 돌아가는 건 좀 아냐?”
“어떤 세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치 같은 것들 말이야.”
의외였다.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은 인물이 정치 같은 머리 아픈 이야기를 꺼낼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소식지는 꾸준히 챙겨 보고 있습니다.”
소식지는 값비싼 신문과는 달리 저렴한 가격에 수많은 정보를 알 수 있는 한 장짜리 신문이었다.
그리고 헨리는 부활한 직후부터 수도의 소식지를 꾸준하게 구독해 왔다.
‘소식은 좀 느렸지만.’
소식지와 신문은 수도와 가까울수록 정보의 질이 최신식이다.
그러나 모리스 영지는 대륙의 동쪽 끝자락에 걸쳐져 있기에, 지나치게 먼 거리 때문에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지나야 최신 소식지를 받아 볼 수 있었다.
그마저도 철 지난 것이었지만.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헨리는 이셀란의 느닷없는 정치 이야기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정치 바닥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사실 흔한 일이지, 자작 이하의 떨거지 귀족 놈들이 자원입대를 하는 경우는 말이야. 너도 출세가 목적이잖아?”
보통의 자원입대자들은 출세를 목적으로 명예 입대를 택하기에 이셀란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날카로운 지적이었으나 이는 빗나간 추리였다. 헨리는 출세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
헨리가 말을 아끼자 그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괜히 숨길 필요 없다. 내 앞에선 솔직해도 돼. 그리고 출세를 위해 자원입대를 한 점은 칭찬해 주지. 한스 그놈이 하고 있는 영주 놀이 따위로는 절대 출세가 불가능할 테니까 말이야. 너, 검술 아카데미 출신도 아니라며?”
“예.”
“왜 적자인 네가 안 가고 서자를 보냈지? 그것도 네 아이디어냐?”
열어 보지는 않았지만 한스의 추천서는 분명히 추천서를 가장한 안부 편지일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으면 헨리의 속사정들을 알고 있을 수가 없을 테니까.
헨리는 이번에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흐흐, 영리한 놈.”
이셀란은 점점 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기특한 손주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같았다.
“왜 서자에게 양보했느냐?”
“가망이 안 보여서요.”
“무슨 가망?”
“얼마 전에 마지막 남은 제국의 영웅, 헨리 모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런데 그게 왜?”
“그는 제국에 남은 마지막 정의였습니다. 그런 그가 죽임을 당했으니 앞으로의 제국은 청탁과 비리가 넘쳐 나는 곳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본인이 스스로를 칭찬하는 내용이었지만 적어도 헨리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자신을 음해한 귀족 놈들은 죄다 썩어 빠진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겨우 일대장밖에 안 되는 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의 명예를 팔고 싶지도 않았다.
헨리가 대답을 마치자 미소 짓던 그의 표정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헨리 모리스, 위대한 마법사였지. 혹시 그의 죄명을 알고 있나?”
“반역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놈을 두둔해?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두둔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또한 머리가 있으니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제 가치관에 맞게 판단한 것뿐입니다.”
“하하, 이놈 봐라?”
웃음이 사라진 그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기사이자 군인이다. 그런 내 앞에서 반역자를 두둔하다니, 이거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군.”
분노한 듯, 그가 자신의 투핸디드 빅 소드를 움켜쥐며 으르렁거렸다.
굉장한 위압감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기세쯤은 전생에서도 얼마든지 겪어 본 것이었다.
헨리는 여전히 무표정함을 고수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저 또한 제국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충성한 것은 사람이 아닌 제국입니다. 저에겐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제국의 안위가 더 중요합니다.”
대답을 마친 직후였다.
헨리의 대답은 잠깐의 침묵을 불러일으켰고, 조용한 집무실 속에는 긴장이 끓어 넘치는 듯했다.
티니 또한 두 사람 사이에 몰아치는 보이지 않는 태풍이 느껴졌다.
그러나…….
“크하하하하!”
침묵을 무너뜨린 것은 이셀란의 웃음이었다. 그것도 아주 큰.
그는 눈가에 약간의 물기가 맺힐 정도로 웃어 젖혔고, 얼마 뒤 웃음이 멎을 때쯤 그가 배를 붙잡으며 말했다.
“이야, 이거, 이놈 진짜 물건이네.”
일그러졌던 그의 표정에 다시 한 번 잇몸 미소가 만개했다. 그가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이 자식 이거 재능도 출중한데 신념까지 확실하구만. 무엇보다 간땡이가 부어터진 반골이란 점이 마음에 드는군. 네 이름이 뭐라고?”
“헨리 모리스입니다, 대장님.”
“그래, 헨리. 네 말대로 지금 제국은 혼란 그 자체지. 선대 폐하께서 작고하시고 망나니 같은 아들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까.”
사실 이런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하고 던진 말이었다.
그는 러너급 검사를 자신의 힘으로 시험해 볼 만큼 호전적이고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백 년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좋든 싫든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기게 되는데, 헨리는 유독 선구안이 강했다.
그러나 의외의 대답은 이후에 벌어졌다.
“근데 더 엿 같은 건 그 아들놈을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조종하고 있다 이거야.”
그가 욕하고 있는 자들은 다름 아닌 자신을 음해했던 귀족 세력의 이야기였다.
그는 생긴 것과는 달리 시국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검술 아카데미를 포기한 건 잘한 일이다. 윗물이 썩으면 가장 먼저 더러워지는 건 그런 곳이거든. 아마 아카데미 쪽은 포람 가문이 꽉 잡고 있을걸.”
‘포람? 설마 그 킹턴 포람?’
킹턴 포람.
포람 가문의 가주이자 제국 십검들 중 이인자로 일인자인 바할드 다음으로 강한 사내였다.
“킹턴이라면 이인자가 아닙니까? 어떻게 바할드 경을 두고 이인자가 아카데미를 쥘 수 있습니까?”
“소식이 늦군. 킹턴이 그랜드 마스터가 된 지 오래야. 바할드는 은퇴했지.”
“그 바할드 경이 말입니까?”
불과 몇 달이었다.
그 몇 달 사이에 바할드 경이 은퇴했다는 건 믿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설마 나 때문에?’
말이 없고 성품이 올곧은 사내였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그랜드 마스터로서 이따금씩 술잔을 나누던 술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헨리가 처형을 당하던 날, 직접 자신의 목을 치면서 헨리에게 사과를 하던 남자였다.
‘바할드가 은퇴라니.’
제국의 무력 순위가 바뀐 이 엄청난 사실을 소식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헨리는 그의 은퇴 소식에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거 할 일이 늘었군.’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었다.
이것이 희소식이 될지 나쁜 소식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지만.
“어찌 됐든 포람 그놈이 아카데미를 쥐게 되면서 기사단 입단을 위한 창구였던 아카데미는 벌써부터 청탁으로 더러워졌지.”
이후, 그는 제국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는지에 대해 열띤 설명을 늘어놓았다.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마지막 정의였던 자신이 죽었으니 이러한 결과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설명하던 끝에 이셀란이 다시 한 번 잇몸을 드러내 보이며 헨리에게 말했다.
“흐흐흐, 너, 정말로 출세하고 싶으냐?”
“그렇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재능과 신념, 용기까지 인정받았으니 그의 말에 호응만 해 주면 될 일이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모름지기 사내놈으로 태어났으면 세상에 이름 정돈 남길 수 있어야지. 칼리번 요새에 온 것을 환영한다. 너는 내가 책임지고 확실하게 밀어주마.”
“감사합니다, 대장님.”
“그럼 이제 다음 테스트를 한번 받아 보실까?”
“시험하실 게 또 있습니까?”
“크크크, 내가 새로운 취미가 생겼거든.”
음흉하게 웃는 이셀란의 얼굴에, 헨리는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