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검왕의 재래 (1)
“스승님께 도전하러 왔습니다.”
“벌써 말입니까?”
“예.”
대낮부터 도전장을 내미는 제자를 보며 베른은 잠시 동안 헛웃음이 났다.
‘설마 벌써 서클 스텝을 마스터했다고?’
보법의 수련에 마스터라는 경지는 없다. 보법 또한 검술처럼 오로지 정진만이 있을 뿐.
게다가 불과 며칠 전에 내걸었던 조건이다.
그래서 베른은 조급함을 내비치는 제자에게 진짜가 무엇인지 알려 주기로 했다.
“좋습니다. 약속대로 보법만을 이용해 제 몸에 손을 대신다면 바로 검술 수업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베른이 도전을 받아들이자 헨리의 눈빛에 자신감이 어렸다. 영락없는 열혈 학생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곧 모래가 깔린 연무장 무대 위에 섰다.
“시간은 3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모래시계 안의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저를 잡지 못하신다면 도련님의 패배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도련님.”
“예?”
“만약 이번 도전에서 승리하지 못하신다면 약간의 벌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베른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한편으로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의욕이 더욱 불타올랐다.
‘이참에 각성 효과도 시험해 봐야겠어.’
의욕이 불타오른 헨리는 마법 무장을 하지 않기로 했다.
순수하게 성장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탁.
베른이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은 순간이었다.
헨리는 단 1초도 허비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흡!”
재조립된 골격과 커진 덩치는 헨리의 리치를 길어지게 했다.
이제는 베른과 덩치가 비슷해진 헨리는 한층 더 유리해진 조건으로 베른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확실히 몸놀림이 좋아지셨군.’
두 사람은 원을 그리며 자그마한 교집합 사이에서 춤을 췄다.
이것이 서클 스텝을 이용한 대련 방식이었다.
베른은 헨리의 공격을 끊임없이 회피하면서 달라진 헨리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자신감을 내비칠 만도 해. 엄청난 성장을 이루셨어.’
말 그대로였다. 헨리의 실력이 말도 안 되게 좋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전에 비해서다.’
헨리의 손이 베른의 가슴께로 날카롭게 뻗어졌다.
하지만 손을 뻗은 그 순간, 베른은 헨리의 손목을 붙잡아 당기며 저만치 뒤로 던졌다.
“큭!”
예상치 못한 반격에 헨리의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그 모습을 본 베른이 말했다.
“조건에는 제가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것이 방아쇠가 되어 베른의 공격이 수차례 이어졌다.
“큽!”
베른의 손바닥이 헨리의 목덜미와 가슴께, 복부를 연달아 가격했다.
강하게 내려친 것은 아니었지만 급소에 해당하는 부위이다 보니 잠시 숨이 멎었다.
베른의 조롱은 계속되었다.
일부러 헨리의 손등에 맞춰 어깨를 밀어내는 등 어떡해서든지 헨리의 손아귀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게 했다.
그렇게 마지막 모래알이 떨어지려던 찰나였다.
“크헉!”
척 보기에도 헨리가 조급해진 것이 눈에 보였다.
베른은 그런 헨리의 아랫배를 향해 두 손바닥을 모아 강하게 쏘아 보였다.
털썩.
이번에는 힘을 실은 공격이었다.
아랫배를 공격당한 헨리가 자리에 주저앉아 부들거리자 베른이 모래시계를 주워 들며 말했다.
“시간이 다 됐군요. 도련님의 패배입니다.”
“크읍, 크흑…….”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단기간에 이렇게 빠른 성장을 이루실 줄은 몰랐거든요.”
칭찬으로 헨리의 기개를 포장하려 했지만 헨리의 귀에는 그저 조롱처럼 들릴 뿐이었다.
“오늘부터 열흘간 체력 단련을 두 배로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다음번에는 신중하게 결정하신 뒤 도전하여 주십시오.”
“쿨럭, 쿨럭!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베른이 연무장을 벗어났다.
* * *
그날 헨리는 지옥을 경험했다.
각성 덕분에 신체적 조건이 좋아지자 베른이 체력 단련의 난이도를 세 배나 올려 버렸기 때문이다.
더불어 벌칙으로 받은 두 배가 넘는 운동량에 온몸이 혹사되었다.
방으로 돌아온 헨리는 치유 마법을 사용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크윽, 망할 꼬맹이 같으니. 이것도 경험 부족이다 이건가?’
헨리는 실패의 원인으로 경험의 부족을 꼽았다.
하지만 요 며칠 새 잠도 자지 않고 서클 스텝을 연습했던 그였다.
뒷산에서 엄청난 양의 고드름을 회피한 것은 물론이고 들짐승들을 상대로 회피 연습까지 했다.
하지만 단기간에 성장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듯했다.
“힐.”
손가락 하나 들 힘조차 없는 헨리는 나지막이 힐을 시전했다.
따뜻한 빛이 몸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워낙에 혹사당한 탓에 누적된 피로가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이렇게 보법 연습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신이 지키던 사람들은 어디선가 고통과 탄압을 받고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헨리는 이런 식으로 한가하게 힘을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편법이 필요해.’
편법을 활용하는 것. 실로 마법사다운 사고였다.
실제로 마법은 편법을 통해 발전한 학문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마법을 부리고 소모되는 마력량을 줄일 수 있는지가 편법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대책을 세우더라도 순수한 보법 내에서 세워야만 한다.’
편법에도 급과 종류가 있다.
한순간을 넘기기 위한 편법은 결국 미래에 또 다른 편법이 필요해지기 마련.
헨리가 원하는 편법은 상황을 타개함과 동시에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적과도 같은 편법이었다.
‘젠장, 골든 그놈은 왜 이런 걸 만들어 가지고…… 잠깐, 골든이 만들어?’
오랫동안 고민하던 끝에 결국 보법의 창시자인 골든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그런데 그 순간, 헨리의 머릿속에 번개 같은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 맞아. 이 보법, 골든 그놈이 만든 거였지? 그렇다면 골든보다 더 강한 놈의 보법이라면?’
제국 검술의 창시자이자 제국 최고의 검사였던 골든 잭슨 에드워드.
그가 최고의 검사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무패의 기사는 아니었다.
‘그놈 이름이 뭐였더라? 그, 그, 그…… 아, 그래! 헥터 마이어!’
검왕 헥터 마이어.
그의 존재를 아는 헨리의 동료들은 그를 검왕이라고 불렀다. 그는 검술로 골든을 굴복시킨 유일한 검사였으니까.
‘그래, 맞아. 그놈 발재간이 하도 희한해서 골든이 애를 먹었었지. 그때 우리가 제안한 대로 우리와 함께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헥터 마이어는 이제는 사라져 버린 왕국의 마지막 검사였다.
그는 왕국의 기사단장이자 왕녀의 약혼자, 그리고 왕의 사위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헨리의 일행과 맞서 싸웠다.
그는 비록 골든과의 대결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헨리의 동료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회상을 끝마친 헨리는 생각을 굳혔다.
‘놈에게 도움을 청해야겠어.’
전생의 헨리였다면 결코 떠올리지 못했을 발상이다. 하지만 현재의 헨리에게는 전생에 없던 물건이 있었다.
‘여기 있군.’
자리에서 일어난 헨리가 책장에서 가져온 것은 낡은 고서였다.
고서의 이름은 강령술. 헨리를 이 세상에 다시 있게 해 준 흑마술서였다.
‘내 살아생전 흑마술에 손을 댈 줄이야.’
제국에서 흑마술은 금지된 힘에 속했고 흑마술의 힘은 대부분이 윤리에 어긋났다.
왜냐하면 마법이나 검술보다 익히기 쉬운 데 반해 그 힘이 막강하여 아집에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술서를 집어 든 헨리가 천천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역시 오탈자투성이로군.’
책자에는 오탈자가 가득했다.
엉뚱한 공식이 존재함은 물론이고 필요하지도 않은 숫자가 대입되어 있는가 하면 훼손된 부분도 상당했다.
하지만 원래부터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책은 아니었을 것이다.
흑마법이 금지된 만큼 마술서 또한 금서에 해당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임의로 훼손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찢어진 곳이 없는 게 다행이야.’
확인을 끝마친 헨리는 책자를 덮었다.
이 정도 훼손이라면 자신이 복구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는 펜을 꺼내 든 뒤 책자의 겉표지 위에 아주 긴 문장들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악을 처벌하는 기요틴과 거짓을 가려내는 진실 재판, 그리고 첩자를 솎아내는 마녀사냥의 공식, 그리고…….’
사용된 공식들은 다양했다.
이 조합은 책자를 원래대로 복구시키기 위해 헨리가 직접 만든 독자적인 마법이었다.
얼마 뒤, 거짓 오탈자를 추려 내고 사라진 문장을 복원해 내는 마탑 유일의 문장 복원 마법, ‘글자 재판’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필기를 마친 헨리가 주문을 시전했다.
“글자 재판, 발동.”
부우웅!
마법이 발동되자 헨리의 마력을 머금은 글자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색적인 광경이었다.
살아난 글자들은 마치 하나의 조직체 같았다.
그들은 그들끼리 자체적인 마녀사냥을 시작했고 거짓된 정보들을 솎아 내며 진짜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역시.’
솎아 낸 오탈자들은 그들만의 방식대로 책자에서 지워졌다.
또한 일부러 지워진 글자들은 자기 몸에 있는 잉크들을 떼어 내 자체적으로 복원하는 등,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들을 일구어 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오탈자가 막 처형된 순간이었다.
마지막 오탈자가 지워지자 글자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자기들 스스로가 만족할 만큼 충분한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끝났나?’
헨리는 글자 재판이 끝난 복원된 강령술서를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잘 복원했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다.
헨리는 일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흑마술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참 뒤,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직후였다.
“완벽한 강령은 힘들다는 얘기군.”
헨리는 복원된 강령술서를 통한 완전한 부활을 기대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의 부활은 정말로 기연에 가까운 일이었다는 걸 독서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럼 어디 보자. 정리하자면 보름달이 뜨는 날만 명계의 문을 열 수 있고 특정 영혼을 불러들이기 위해선 그 영혼의 강력한 감정이 녹아 있는 물건이 필요하다, 뭐 이 정돈가.”
깔끔한 정리였다.
“그럼 문제는 하나뿐인 건가?”
마침 보름달이 뜬 밤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헥터 마이어의 유품을 준비하는 것뿐.
하지만 검왕의 물건 따위, 당연히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헨리는 문을 잠갔다.
그런 다음 방 안의 가구들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뒤 거대한 빈 공간을 확보했다.
공간을 확보한 헨리는 이윽고 텅 빈 방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꽤 복잡한 문양이었지만 몇십 번이나 그려 본 마법진이기도 했다. 그만큼 자주 애용하던 마법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마법진이 완성되자 헨리는 술식의 핵에 해당하는 곳으로 다가가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라거오나 리이.”
우웅!
정확한 마법진과 정확한 주문, 그리고 헨리의 방대한 마력.
이 세 가지가 맞물리는 순간 마법진의 위로 이계의 존재가 소환되었다.
마법진이 소환한 존재.
그는 바로 이계의 정령들 중 하나인 ‘교환의 스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