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첫 번째 각성 (2)
“크흑.”
헨리는 이를 부득 갈며 팔굽혀펴기를 했다.
팔이 후들거리고 팔근육이 터질 것 같았지만 어떡해서든지 하루 할당량을 채워야만 했다. 그렇게 하기로 스스로와 약속했으니까.
털썩.
할당량을 채운 헨리가 바닥에 쓰러졌다.
전생에서도 체력 단련을 전혀 하지 않았던 헨리였기에 보법 연습보다 체력 단련이 더 고역이었다.
그래도 헨리의 체력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느는 중이었다.
근육이란 놈은 혹사시킨 만큼 충분히 쉬게 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찢어진 근육이 붙으면서 더욱 커지니까.
그래서 운동만큼 충분한 휴식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헨리는 그 과정을 마법을 통한 자가 치유로 일축시켜 버렸다.
어떻게 보면 마법사들은 최고의 근육맨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힐.”
자가 치유로 휴식을 마친 헨리는 곧바로 다시 일어나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래도 적자는 적자란 건가.”
헨리를 지켜보던 베른이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의 예상대로 헨리는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난 천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체력 단련이면 체력 단련, 보법 훈련이면 보법 훈련. 영주님이 아주 좋아하시겠어.”
베른은 미래에 훌륭하게 성장해 있을 헨리를 상상하며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훈련은 계속되었다.
달리기를 마친 헨리는 다시 한 번 치유를 거친 뒤 목검을 집어 들어 정면 베기를 시작했다.
이것은 균형 감각과 팔근육을 위한 훈련이었다.
‘빌어먹을 황제 놈!’
헨리는 목검을 집어 던지고 싶을 때마다 황제를 떠올렸다.
그 어리석은 황제 놈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마탑에 처박혀 못다 한 마법 연구나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헨리는 분노를 원동력 삼아 끊임없이 체력 단련과 보법 연습을 병행했다.
* * *
“후우, 오늘 하루도 끝이군.”
마법으로 땀을 씻어 낸 헨리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벌써 며칠째 같은 생활의 반복이었지만 케빈이 돌아오지 않은 현재로썬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헨리는 얼마간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았다.
‘어디 보자, 어제 어디까지 썼더라?’
책상 위에는 가죽 커버로 된 깨끗한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헨리는 백지장 같은 그 책 속에 수많은 이름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것은 바로 살생부였다.
전생에 자신과 동료들을 음해한, 온갖 귀족 놈들의 이름을 기록한 살생부.
헨리는 제국 제일의 기억력을 바탕으로 한 명도 빠짐없이 그놈들의 이름을 차곡차곡 써 내려갔다.
“오늘 치 이름은 이 정도면 된 것 같고…… 그다음엔.”
살생부를 작성할 땐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혹시라도 작은 이름 하나라도 놓칠까 봐서였다.
오늘 치 이름을 모두 작성한 헨리는 이번엔 지도를 펼쳐 들었다.
촤르륵.
둥근 보관함에 말려 있던 대륙 지도가 곧게 펼쳐졌다.
서대륙 유라시아.
큼지막한 유라시아를 최초로 통일한 직후, 선대 황제는 제국의 이름을 유라시아 제국으로 명명했다.
‘어처구니없는 네이밍 센스였지.’
하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대륙이 곧 제국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으니까.
지도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표식들과 그것을 설명하는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오늘은 서쪽 위주로 가 보자.’
펜을 집어 든 헨리는 대륙의 서쪽으로 손을 뻗었다.
헨리는 이것을 보물 지도라고 불렀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제작한 보물 지도 말이다.
이것이 보물 지도가 된 까닭은 간단했다.
전생에 헨리가 대륙을 누비면서 각종 보물과 아티팩트를 지역 곳곳에 숨겨 두었는데, 원래대로라면 이것 또한 미러클 블루처럼 자신의 유산이 될 터였다.
그런데 황제와 귀족 놈들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해 버렸으니 이제는 잊힌 보물이 된 셈이었다.
그래서 헨리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김에 그 보물들을 자신이 직접 수거하기로 결정했다.
현재의 자신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헨리는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많은 양의 보물들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사각사각.
생각이 나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헨리의 손은 끊임없이 펜대를 놀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끼이익-.
노크 없이 열리는 문. 코홀이었다.
헨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들어 올려 코홀에게 다가오지 말 것을 명령했다.
“무슨 일이냐?”
“도련님, 케빈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케빈이?”
급보를 들은 헨리는 달력을 확인했다.
이제 겨우 닷새가 지난 참이었다. 그런데 벌써 돌아오다니?
믿기 힘든 소식이었다.
“내려가 보자꾸나.”
코홀의 안내를 받아 케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케빈의 방이었다.
겨우 심부름을 다녀온 건데 이렇게까지 몰릴 이유는 없건만, 이상하게도 방 앞은 이미 여러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흠흠.”
코홀이 대신 헛기침을 하자 헨리를 발견한 사람들이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 있는 거지?”
그러자 한 시녀가 대답했다.
“그게, 케빈 도련님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케빈이?”
“예. 자세한 건 도련님께 직접 들어 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돌아오시는 길에 도적 떼라도 만나신 것 같습니다.”
“음, 그래?”
교역로의 도적 떼는 헨리 자신이 직접 처리했다. 그런데도 도적 떼를 만났다는 건 또 다른 도적 떼가 있다는 말이었다.
헨리는 사람들을 물린 후 코홀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모리 부인과 함께 저택에 기거하는 의사 한 명이 케빈을 간호하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헨리가 가볍게 예를 올려 보였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모리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헨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너 이 자식! 너 때문에 우리 케빈이……!”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헨리는 그런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두지 않고 어깨 너머로 보이는 케빈을 살펴보았다.
‘시녀가 말한 대로군.’
둘린 붕대를 보아하니 급한 대로 응급처치는 끝난 모양이었다.
헨리는 모리 부인을 다독인 후 의사에게 물었다.
“왜 이런 거지?”
“아무래도 들짐승 무리와 마주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날붙이에 의한 상처가 아닙니다. 발톱에 쓸린 것과 이빨 자국이 발견되었습니다. 타고 오신 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위독한가?”
“지독한 피로가 누적되어 있습니다. 저택을 나서기 전에도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는데 오랜 승마술로 인해 건강이 더 악화된 것 같습니다.”
“진단해 주어 고맙네. 혹시 더 손볼 곳이 있는가?”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조치했습니다.”
“그럼 잠깐 자리를 좀 비켜 주겠나? 아, 모리 부인도 함께 말이야.”
“어림없는 소리! 또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코홀.”
“예, 알겠습니다.”
코홀은 의사와 함께 버둥거리는 모리 부인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이윽고 방 안에는 헨리와 케빈,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케빈이 헨리를 발견하자 몸을 일으키려 했다.
“혀, 형님…….”
그러자 그 모습을 본 헨리가 손을 뻗어 그를 저지했다.
“일어날 것 없다.”
오랜 승마술로 인해 엉덩이가 물러 터진 것은 물론이고 들짐승에 의한 상처가 곳곳에 보였다.
또한 실컷 두들겨 맞은 직후에 무리를 했으므로 케빈의 몸 곳곳은 멍투성이였다.
그러나 케빈은 그런 상처들을 딛고서 훌륭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냈다.
그것이 비록 무례하게 군 것에 대한 처벌 때문이었어도.
‘흠, 제법 끈기는 있군.’
헨리는 그렇게 케빈을 평가했다.
“혀, 형님…… 말씀하신 대로 녹까마귀꽃을 구해 왔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너는 훌륭히 약속을 이행했다. 검술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건 바로 너다.”
“감사……합니다…….”
“푹 쉬어라.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져 있을 것이다.”
헨리는 왼손으로 케빈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헨리의 왼손을 통해 미약한 마나가 뿜어졌다. 슬립이었다.
케빈이 잠든 후 헨리는 방 한편에 놓인 녹까마귀꽃 한 묶음을 보았다.
번햄에서 갓 캐낸 싱싱한 상태 그대로였다.
헨리는 녹까마귀꽃을 챙긴 뒤 다시 케빈 앞으로 다가갔다.
“힐.”
파아앗!
헨리는 근육통을 치료할 때처럼 케빈의 몸 곳곳에 힐을 사용했다.
비록 사제들의 기적처럼 살을 아물게 할 순 없었지만 누적된 피로와 갖가지 내상 정도는 어느 정도 치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치료를 받은 케빈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치료를 마친 헨리는 케빈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뀐 것을 확인한 뒤 방을 나섰다.
‘이로써 모든 재료가 갖추어졌다.’
* * *
헨리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모리 부인을 뒤로한 채 방으로 돌아와 즉시 미러클 블루를 만들 준비를 했다.
“너는 가서 큰 냄비 하나와 빈 병 몇 개만 가져오너라.”
“예, 알겠습니다.”
냄비와 빈 병을 받아 든 헨리는 코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방 안에 들어오지 말 것을 명령했다.
준비를 마친 헨리는 책상 위의 지도를 치운 뒤 준비한 재료들을 놓고 마법으로 갈아 냈다.
그런 다음 그것들을 냄비에 넣고 마법으로 냄비를 가열하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물 한 방울 넣지 않은 냄비였으나 재료가 가진 진액들이 바깥으로 나오면서 걸쭉한 용액이 되었다.
헨리는 마법으로 그것들을 계속해서 저어 주었다.
‘이 냄새도 참 오랜만이군.’
탑의 어린 제자들을 위해 매년 연례행사처럼 만들어 온 영약이었다.
이제는 헨리가 죽어 그 맥이 끊겼을 테지만, 다른 마법사들이 비슷한 영약을 만들어 낼 게 분명했다.
‘그래 봤자 짝퉁일 테지만.’
미러클 블루의 원액을 만들어 낸 헨리는 이번엔 그것들을 얼리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얼린 원액을 마법으로 갈아 낸 다음 다시 한 번 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얼마 뒤 진액의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 풍겼던 냄새와는 확연히 다른 냄새였다.
계속된 작업으로 인해 용액의 성질이 변한 것이었다.
남은 것은 자신의 몸에 맞게끔 농도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미러클 블루를 희석시키는 까닭은 간단했다.
순수 원액을 그냥 섭취하기엔 그 농도가 매우 짙어 자칫하면 섭취자의 마력이 폭주해 심장이 터져 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먹는다.’
왜냐하면 원액의 부작용인 마력의 폭주는 섭취한 원액의 효과를 섭취자가 제어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소화력의 차이란 말이지.’
헨리는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마력의 폭주란 본디, 마법사들이 갑작스럽게 많은 마력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그 마력을 소화할 수 없어 배탈이 나는 현상을 말했다.
게다가 본디 마력의 컨트롤은 신체 문제가 아닌 정신력과 감응력이 바탕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새로운 육체를 가졌다고 한들 이미 8서클 분량의 마력을 소화해 본 경험이 있는 헨리에겐 해당되지 않는 사항.
헨리는 마른침을 한번 삼킨 후 식힌 냄비를 집어 들었다.
‘그래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구만.’
이론상으로는 완벽했다.
하지만 그 이론을 실전에 대입해 보는 것은 마탑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리라.
헨리는 몇 번의 심호흡 끝에 두 눈을 질끈 감고 원액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꿀꺽- 꿀꺽-.
짙은 원액이 헨리의 울대를 타고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