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헨리를 건드리면 아주 (3)
푸르릉.
밤이 깊자 마구간지기는 말들을 큰 우리에 풀어놓았다.
밤새 혹시 모를 교배를 위해 일부러 같은 우리에 암수를 섞어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조금만 큰 마구간에 가도 이러한 행위는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절대 하지 않는 행동들 중 하나였으니까.
이것이야말로 그만큼 모리스 영지가 낙후된 곳이라는 사실과 마구간지기 또한 멍청한 늙은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었다.
마구간지기는 우리 속에 말들을 풀어놓은 뒤 낮에 시달린 기분을 풀기 위해 술집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가 떠난 뒤, 이제부터는 순전히 말들의 세상이 펼쳐졌다.
푸르릉.
모리스 마구간에는 수말 넷과 암말 셋이 있다.
말들의 스트레스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암수의 수를 맞춰야 했지만, 숫자를 맞추기엔 돈도 부족할 뿐더러 마구간도 비좁았다.
그래서 영주는 마구간지기에게 자신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헨리의 말을 시정마처럼 사용하라고 명했다.
그것이 헨리의 말이 가장 더러운 자리를 배정받은 이유였다.
시정마의 삶은 끔찍했다.
먹이도 잠자리도 다른 말들에 비해 형편없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고역은 다른 말들의 짝짓기를 돕는 데 사용된다는 것이었다.
발정기에 접어든 암말은 굉장히 예민했다. 그래서 시정마를 통해 암말의 힘을 충분히 빼놓지 않으면 수말들이 암말의 뒷발에 맞아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제이드는 헨리가 바뀌기 전까지 일생의 대부분을 시정마처럼 살았다.
물론 제이드의 품종은 시정마 따위가 아니었다.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살기를 강요받으니 어쩔 수 없이 고양이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푸르릉.
케빈의 말, 그랑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은 모리스 마구간에서 가장 힘이 센 녀석이었다.
아버지 한스의 말인 조셉과 다른 말인 홀터 또한 힘이 셌지만 그중에서도 그랑드가 가장 셌다.
또한 자신의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힘의 과시를 좋아했고 욕심이 많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주인이 헨리에게 그러하듯 그의 말인 제이드를 괴롭히기 좋아했다.
푸릉, 푸릉.
큰 우리에 들어온 그랑드는 한동안 우리를 돌며 다시 한 번 자신의 영역임을 과시했다.
조셉과 다른 수말은 귀찮음에 일찍이 잠들었고, 나머지 암말들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교미를 기다렸다.
푸르릉.
과시를 끝낸 그랑드는 제이드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마구간지기가 그랬던 것처럼 암말과의 교미를 위해 시정마의 역할을 종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제이드는 피곤했다.
군마로서 새롭게 개조되긴 했지만 개조 과정에서 누적된 대미지와 오랜만에 다녀온 출정에 피로했기 때문이다.
푸릉! 푸릉!
그랑드는 계속해서 코로 제이드를 밀었다. 필요하면 앞발로 툭툭 건드리기도 했다.
그러기를 몇 번, 그럼에도 제이드가 꿈쩍도 않자 결국 참지 못한 그랑드가 제이드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푸히히히힝!
말의 치악력은 대단했다.
살을 깨물린 제이드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뒷발로 그랑드를 걷어찼다.
퍽!
제법 큰 소리가 났다.
그랑드는 예상치 못한 저항에 당황했고, 곧바로 반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푸르릉?
자신에게 다가오는 제이드를 보며 그랑드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덩치가 작고 털이 듬성듬성 빠진 평소의 제이드가 아니었던 것이다.
푸, 푸릉?
본능적으로 힘의 차이를 깨달은 그랑드는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제이드는 이미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더불어 그동안의 설욕과 함께.
푸히히히힝!
그랑드의 비명 소리가 마구간 높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마구간지기는 이미 버터 맥주를 네 잔째 비우고 있는 중이었다.
* * *
“버, 버넌! 버넌 어디 있어!”
이른 아침. 헨리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케빈은 아픈 몸을 이끌고 일찍이 마구간을 찾았다.
그런데 마구간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 도련님? 스읍, 무슨 일이십니까?”
잠에서 덜 깬 마구간지기, 버넌 영감은 입에 묻은 침을 닦으며 마구간으로 달려왔다.
버넌은 어젯밤의 폭음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랑드 상태가 왜 이래? 지금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거지? 그렇지?”
케빈의 호들갑에 버넌은 뻑뻑한 눈꺼풀을 비비고 그랑드를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입에 거품을 물고 빈사 상태의 그랑드가 있었다.
“이, 이, 이, 이놈이 왜 이러지? 뭐, 뭐야, 왜 이러지?”
그랑드는 모리스 마구간에서 가장 튼튼한 놈이었다.
그런 그랑드가 빈사 상태에 있었으니 버넌 영감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
그러나 케빈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구간지기인 당신이 모르면 대체 어쩌자는 거야!”
“이,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도, 도련님! 살려 주십시오! 저는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분명히 어제도 여느 때와 같이 우리에 몰아 놓고…….”
“시끄러! 그럼 지금 당장 다른 말이라도 꺼내 와!”
버넌을 문책할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지 않으면 헨리가 말한 기일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케빈은 성을 내며 마구간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가까운 곳에 처음 보는 튼튼한 말이 떡하니 여물을 씹고 있었다.
“저놈으로 하겠어.”
“도, 도련님! 저 말은……!”
“시끄러!”
검술 아카데미 입학권이 걸린 문제였다.
이미 출발 준비를 끝냈는데 고작 말 한 마리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게 할 순 없었다.
케빈은 씩씩거리며 말 앞으로 다가갔다. 제이드였다.
“나와!”
시간도 촉박한데 아끼던 말까지 죽어 가니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케빈은 신경질적으로 제이드에게 재갈을 물리려고 했다.
그러나……!
히히히힝!
“어, 어?”
“도련님!”
순간, 제이드가 거친 반응을 보이며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본 버넌 영감이 재빨리 몸을 날렸고, 덕분에 케빈은 말의 앞발에 걷어차이는 최악의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허, 저, 저놈의 말 새끼가!”
“도, 도련님! 진정하십시오. 저 말은 헨리 도련님의 말입니다!”
“뭐, 뭐? 혀, 형님의 말이라고? 하지만 형님의 말은 분명히……?”
“사정이 어찌 됐든 저 말은 헨리 도련님의 말입니다. 급하신 대로 비상용 말인 홀터를 타시지요.”
“제기랄!”
섣불리 행동한 본인의 잘못이었지만 답답함에 주먹을 내리쳤다. 이번에도 헨리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최악이었다.
게다가 남는 말인 홀터는 일등마도 아니고, 잡다한 행사에나 이용되는 이등마였다. 그랑드와는 질적으로 다른 잡놈인 셈.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홀터에게 재갈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 * *
아침 일찍 케빈이 저택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헨리는 개운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기다릴 일만 남은 건가?’
미러클 블루의 복용.
아무리 급하다고 한들 자신이 내놓은 해결책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 조바심이 나더라도 충분한 인내를 가지고 케빈을 기다리기로 했다.
아침 식사를 끝낸 후 코홀에게 말했다.
“코홀.”
“예, 도련님.”
“치안 지휘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예, 알겠습니다.”
최근 몇 가지 사건들을 경험한 뒤, 코홀은 더 이상 명령을 되묻는 어리석은 짓 따위는 하지 않게 되었다.
코홀은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인 뒤 치안 지휘대 본부가 있는 곳으로 헨리를 안내했다.
‘대장이 소드 익스퍼트라고?’
족보에 따르면, 모리스 가문에는 두 명의 소드 익스퍼트 유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영주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한스 모리스이고 나머지 하나는 영주의 권속이자 영지의 치안을 담당하는 치안 지휘대 대장, ‘베른’이었다.
헨리는 검술을 배우고자 하는 스승으로 한스가 아닌 베른을 택했다.
어차피 둘 다 비슷한 실력일 테니 심적 부담이 덜한 아랫사람을 택한 것이었다.
‘제대로 된 놈이어야 할 텐데.’
새로운 육체로 빙의한 직후, 헨리는 기사들을 무시하던 자신의 생각의 맹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강인한 육체.
일정 수준 이상 도달하게 되면 맹독마저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육체의 소중함을 헨리는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강인함의 근본에는 오러가 있었다.
오러.
무인들의 마나라고도 불리며, 심장에 서클을 쌓아 사용하는 마법과는 달리 오러는 신체 전체에 마나를 둘러 사용하는 것이었다.
오러의 터득법은 간단했다.
단련된 무인이 스스로를 한계치까지 몰아붙이면 어느 순간 깨달음처럼 오러를 얻는다고 했다.
헨리는 문득, 마법사의 약점인 나약한 육체의 보완을 위해 항상 검술 같은 무예를 익히라던 선대 황제가 떠올랐다.
‘하여튼 재수 없는 놈 같으니.’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스스로 맹독을 마시던 날, 헨리는 골든 잭슨이 현명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헨리는 수많은 무예들 중 그가 권유했던 검술을 익히기로 했다.
물론 골든에 대한 향수 때문에 검술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이유 중에서도 그나마 가장 배우기 쉬운 무예라는 점에서 택한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도련님.”
“수고했다. 점심 식사가 준비되면 다시 나를 데리러 오너라.”
“예,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코홀은 고개를 조금 숙여 보인 뒤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럼 얼마나 뛰어난지 한번 확인해 볼까?’
헨리는 조용히 치안 지휘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 * *
지휘대의 내부는 생각보다 적막했다. 모두들 근무를 서기 위해 성벽으로 출근했기 때문이다.
헨리는 지휘대 내부를 돌아다니던 중 빨랫감을 가지러 온 시녀 한 명과 마주칠 수 있었다.
헨리를 발견한 시녀가 즉시 알은체를 했다.
“도련님 아니십니까?”
“인사는 됐다. 그건 그렇고, 지금 베른 경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
“베른 경이라면 지금 지휘대 뒤뜰의 연무장에 있습니다.”
“알겠다.”
뒤뜰에 마련된 연무장에는 정말로 베른이 있었다.
헨리를 발견한 베른이 말했다.
“오, 도련님 아니십니까? 이 누추한 곳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반갑네. 다름이 아니라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네만.”
“부탁요?”
“그렇네. 혹시 나에게 검술을 가르쳐 줄 수 있는가?”
“……예?”
헨리는 인사를 나누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그리고 헨리의 부탁을 들은 베른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놀라긴. 오늘부터 검술 수련을 하고 싶어서 말이야.”
“하, 하지만 도련님께선 분명히 검술에는 뜻이 없다고…….”
“마음이 바뀌었네. 그래서 가르쳐 줄 수 있는가, 없는가?”
괜히 구구절절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헨리가 간결하게 의견을 묻자 베른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련님께서 드디어 검술에 관심을 보이시다니…… 저, 베른! 몹시 기쁩니다! 드디어 도련님께서도 영주님의 후계를 준비하시는 겁니까?”
“뭐…… 꼭 그런 건 아닌데.”
“하하,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 참! 그런데 도련님. 궁금한 것이 하나 있사온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물어보게.”
“듣기로는 케빈 도련님과의 대련에서 도련님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던데…… 혹 사실입니까?”
“그렇다면?”
“……혹시 제가 모르는 다른 곳에서 검술을 배우셨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황당한 대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케빈의 검술 스승이 바로 베른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부터라도 검술에 뜻을 두기로 했으니 잘 부탁하네.”
“도와드리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이것 참…….”
검술을 가르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다. 그것은 자신이 매일 하는 업무 중의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검술이라면 거들떠도 안 보던 장남이 그 케빈을 제압했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뭐, 차근차근 알아보면 되겠지.’
확신이 안 설 땐 직접 확인해 보면 될 일이다.
“그럼 먼저 저와 가볍게 대련 한판 어떠십니까?”
“자네와 대련을?”
“예. 원래는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가르치려 하였으나 케빈 도련님을 이기셨다고 하니 실력을 가늠키 어려워서 그럽니다.”
베른은 자신의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헨리 또한 베른의 제안을 가볍게 수락했다.
“그러지.”
헨리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렇잖아도 베른의 실력이 궁금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