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서클 마법사의 환생-5화 (5/522)

# 5

헨리를 건드리면 아주 (2)

“헉!”

케빈은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자 옆에서 그를 간호하던 모리 부인이 눈물을 머금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케빈!”

“어머니? 이, 이게 무슨 일이죠? 아얏…….”

잠에서 깨어난 케빈은 그제야 자신의 몸에 온갖 약품들이 발려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찌릿한 상처의 고통 덕분에 떠올릴 수 있었다. 아침 식사 후에 나누었던 적자와의 대련을 말이다.

“마, 말도 안 돼…… 내가 정말로?”

좀처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것은 지독한 현실이었다.

케빈이 자조적인 어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모리 부인이 그를 꾸짖었다.

“이놈아! 너는 대체 여태껏 어떻게 수련했길래 그놈에게 쪽도 못 쓰고 지는 것이냐! 아이고, 분해라! 아이고!”

아들을 꾸짖는 듯 보였지만 그녀의 속내는 아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대로라면 아카데미를 수료한 후 케빈이 자연스럽게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이어받는 것이 모리 부인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절대로 그럴 리가…….”

케빈은 쓰라린 상처들을 감싸 쥐며 자신의 노력들을 회상했다.

형님에게 다소 무례하게 행동하긴 했어도 게으른 적자와는 달리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같이 수련해 온 성실한 자신의 과거를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과거를 되짚어도 대련을 했을 때 겪었던 헨리의 힘은 가히 파도와도 같았다.

“이럴 수는 없어…… 절대로…….”

현실을 부정하는 케빈의 눈동자에 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 * *

“그럼 이제 이것들을 다시 돌려놓고 오겠습니다.”

“빼먹은 거 없지? 횡령하면 안 된다.”

“안 합니다, 안 해요!”

저택으로 돌아온 헨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복귀했다.

사실 원래부터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헨리가 영지를 나갔다가 온 것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헨리는 코홀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제이드를 맡기기 위해 마구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머리가 벗겨진 늙은 마구간지기가 헨리에게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말을 반납하러 왔는데 잠깐 마구간을 보고 가겠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보통의 말이었다면 마구간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이드는 이제부터 자신이 책임져야 할 반려마였기 때문에 헨리는 마구간을 살피기로 했다.

마구간에 발을 들인 헨리는 유독 눈에 띄는 말 한 필을 가리키며 마구간지기에게 물었다.

“저 말은 뭐지?”

“영주님의 말입니다. 각별히 신경 써서 돌보고 있습죠.”

“그럼 저건?”

“저건 케빈 도련님의 말입니다.”

영주 일가가 타는 말들이니만큼 하나같이 상태가 훌륭했다.

그리고 말들의 상태가 훌륭할수록 헨리는 더더욱 괘씸함을 느꼈다.

“그럼 이 아이의 자리는 어디지?”

“이 아이는…… 저기입니다.”

마구간지기는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한쪽 구석을 가리켜 보였다.

그가 가리킨 곳은 다른 곳보다 짚더미가 적고 습한 부위가 많아 곳곳이 눅눅한 자리였다.

제이드의 자리를 본 헨리는 눈썹을 한번 꿈틀거린 뒤 마구간지기에게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앞으로 제이드다. 이번에는 실수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겠지만 앞으로는 각별히 유념하도록 해라.”

“무, 물론입니다! 앞으로는 각별히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마구간지기는 허리가 부러져라 고개를 숙여 보였다.

헨리는 예정대로 그를 혼내려다가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물론, 조건이 붙는 기회였다.

“아, 참!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 건데 아버지와 케빈의 말은 더더욱 각별히 관리해야 할 것이다. 만약 다음번에 왔을 때 이 세 마리의 상태가 좋지 않다면 그때는 좀 더 많은 각오가 필요할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말을 마친 헨리는 마지막으로 제이드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다음 몇 마디의 말을 나눈 뒤 씨익 웃어 보인 후 마구간을 벗어났다.

* * *

저녁이 되었다.

케빈은 무슨 이유에선지 식당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진행되었다.

식사는 금방 끝나 곧 식후 차가 나왔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가주가 헨리에게 말했다.

“헨리.”

“예, 아버지.”

“아침에 있었던 대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는 괜찮습니다만, 모리 부인은 어떠십니까?”

한스의 제안에 헨리는 일부러 모른 척하는 모리 부인을 콕 집어 물어보았다. 순전히 그녀를 약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한스가 그녀에게 물었다.

“부인은 어떻소?”

“제 의견이 뭐가 중요한가요. 말씀들 나누시죠.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모리 부인의 얼굴이 벌게졌으나 한스는 굳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사라지자 한스는 전에 없던 기대에 찬 눈빛을 보이며 헨리에게 물었다.

“검술은 언제부터 배운 거냐? 여태 그런 모습은 전혀 보여 주지 않았잖아?”

두 사람만 남게 되자 한스의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검술이랄 게 있습니까, 그냥 버릇없는 동생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 주었을 뿐입니다.”

“녀석, 겸손하기는……. 그래, 그럼 아침에 말했던 대로 검술 아카데미는 네가 가는 것이냐?”

그의 눈동자에 기대가 부풀었다.

여태껏 석탄인 줄로만 알았던 적자가 알고 보니 가공되지 않은 원석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한스의 의도를 알고 있는 헨리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검술 아카데미는 케빈이 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뭐, 뭐라고? 갑자기 또 왜 그러는 것이냐?”

“아침 대련 이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그리고 검술 아카데미라 하면 무릇 검술을 배우는 곳, 저보다는 부족한 케빈이 가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아침과는 다른 핑계를 대는구나. 그때는 케빈이 부족해서 보내지 못하겠다고 그러지 않았느냐?”

“그때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 물론 그냥 보내겠다는 건 아닙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예. 아무리 제가 아카데미를 양보했다지만 이렇게 큰 기회를 그냥 넘겨주고 싶지는 않아서요.”

“그럼 어찌하겠다는 말이냐?”

“그냥 가볍게 그 아이를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케빈이 아버지께 불만을 제기하러 오거든 저에게 좀 보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참 알다가도 모를 놈이구나, 너는. 알겠다, 그리하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아, 참!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교역로의 도적들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헨리는 가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일부러 도적 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뭣! 그놈들이 말이냐?”

“예. 누가 교역로에 들짐승 먹이가 되어 처참하게 죽은 수십의 남자들을 보았다고 해서 말입니다.”

“허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사람을 보내 확인해 봐야겠다.”

“그러시죠. 그럼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물러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식당을 벗어난 헨리가 생각했다.

‘설마 그 녀석, 이대로 아카데미를 포기하는 건 아니겠지?’

얼굴만 봐도 욕심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녀석이었다.

헨리는 어서 빨리 케빈이 한스에게 불만을 제기하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똑똑-.

“누구십니까?”

야심한 밤, 헨리는 노크를 청한 방문자에게 들어올 것을 허락했다.

끼이익-.

방문자는 다름 아닌 케빈 모리스였다.

“형님…….”

고개 숙인 케빈의 목소리가 모기처럼 기어들어 갔다.

헨리는 그 모습을 보고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하였으나 일부러 밋밋한 표정을 유지한 채 차갑게 대꾸했다.

“무슨 일이지?”

“저, 그게…….”

녀석이 이곳에 온 이유는 뻔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케빈을 잔뜩 골려 주고 싶었다.

“저, 그…… 아버지께서 이곳으로 가라고…… 아카데미 때문에…….”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군. 너는 원래 그렇게 계집애처럼 옹알거렸나?”

“아, 아닙니다!”

헨리의 꾸지람에, 케빈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군기가 바짝 든 군인처럼 행동했다.

그 모습을 본 헨리가 옅은 조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 다시 한 번 말해 봐. 아버지가 뭐 어쨌다고?”

차갑고 단호한 모습.

케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님의 차가운 모습에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구구절절한 사족 대신 짧고 간결한 말을 택하기로 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형님.”

“무엇을 말이냐?”

“그동안 형님에게 무례했던 것, 그리고 형님에게 분수도 모르고 대들었던 것 전부 말입니다.”

케빈은 여전히 두들겨 맞은 곳이 쑤시고 저렸지만 감히 형 앞에서 아픈 내색을 보일 수 없었다.

‘드디어 정신 차린 모양이군.’

잃어버렸던 적자의 위엄이 다시 돌아온 것을 느낀 헨리는 이쯤에서 장난을 그만두기로 했다.

사실, 시험을 핑계로 케빈을 이곳으로 보내 달라 한 것에는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좋다. 들었을진 모르겠지만 나는 아카데미를 포기하기로 했다.”

포기라는 말에 순간, 케빈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러나 내가 포기했다고 해서 너에게 기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둘 다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하는 이유는 순전히 값비싼 학비 때문이니까.”

헨리의 말은 사실이었다.

가문의 형편이 넉넉했다면 애초에 입학 문제로 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네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니 내 너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다. 대신, 조건이 있다.”

“말씀만 하십시오. 어떤 조건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호들갑 떨 건 없고…… 너는 혹시 번햄이라는 영지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번햄이라면…… 북쪽에 있는 그 번햄 영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번햄 영지. 그곳 또한 준남작이 운영하는 작은 영지였다.

그러나 그곳은 모리스 영지에서부터 사흘 밤낮을 말을 타고 가도 도착할 수 없을 만큼 멀리 있었다.

“잘 알고 있구나. 내가 그곳에 볼일이 있는데 네가 대신 다녀왔으면 해서 말이다.”

“볼일이라면……?”

“번햄의 특산품 중에는 녹까마귀꽃이라는 게 있다. 교역상을 통해 이곳에도 들여오긴 하지만 최근 도적 떼가 기승을 부려 교역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말인데, 네가 좀 다녀왔으면 해서 말이다.”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입고될 재료였다.

하지만 여유를 가지기엔 황제에 대한 분노가 컸다.

헨리는 하루빨리 황제와 귀족 놈들을 처죽이고 싶었다.

‘게다가 멀기도 하고 말이야.’

또한 번햄 영지까지는 거리도 굉장히 멀기 때문에 체력적인 소모도 상당할 터, 현재의 비루한 육신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헨리는 케빈을 보내기로 했다.

간절한 사람만큼 믿음직스럽고 서두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케빈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저 오랫동안 승마술을 펼치면 될 일이었다.

“당연하죠! 그 정도야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잠깐, 잠깐! 아직 말이 덜 끝났다.”

“예, 예?”

그러나 헨리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것은 심부름이기도 했지만 케빈의 무례함에 대한 추가적인 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엿새를 주겠다. 그 안에 다녀와야만 한다.”

“여, 엿새라면…….”

그야말로 자는 시간을 빼면 오롯이 말을 모는 것에만 집중해야 가능할 시간.

케빈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힘들면 말고.”

“아니,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

케빈의 기백 넘치는 대답에, 헨리는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 사고는 그날 밤에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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