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같은 이름, 다른 삶 (3)
케빈의 어미 되는 모리 부인은 너무 웃어 젖힌 나머지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형님, 농담이 너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그렇게 묻는 케빈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에 헨리가 되물었다.
“내가 너와 농담을 섞을 만큼 각별한 사이는 아닐 텐데.”
“헨리, 케빈 말대로 농담이 지나치구나.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말 그대로입니다, 아버지. 케빈이 정말로 자신 있다면 저의 제안대로 대련을 해 보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렇긴 하다만…… 정말 괜찮겠느냐?”
호기심을 떠나 약간의 걱정이 담긴 물음이었다.
헨리가 케빈보다 뒤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실관계를 떠나 어찌 됐든 헨리의 자존심에 상처가 남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오전 일과가 바쁘신 게 아니라면 대련의 입회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좋다. 둘 다 단련장으로 가자.”
미덥지 못했으나 저토록 자신감을 보이는데 자신이 방해할 권리는 없었다.
이에 케빈은 여전히 헛웃음을 터뜨렸고, 모리 부인 또한 헨리의 도발이 같잖았던지 혀를 차 보였다.
이윽고 수행 시종을 포함한 십여 명의 사람들이 단련장의 대련 무대에 서게 되었다.
“형님, 받으시죠.”
케빈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목검 한 자루를 헨리에게 던졌다.
묵직한 느낌의 목검이었다.
아무래도 수련을 목적으로, 진검과 비슷한 무게로 만든 듯했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헨리는 목검을 막대기처럼 빙빙 돌려 보인 후 가볍게 오른손에 안착시켰다.
구경꾼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을 테지만 오랜만에 볼만한 구경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어젯밤 헨리에게 두들겨 맞았던 시종, 코홀의 눈빛은 더더욱 반짝였다.
‘흥! 그깟 눈빛 좀 바뀌었다고 케빈 도련님을 이길 수 있을 줄 알고?’
코홀은 붕대를 감은 턱을 어루만지며 케빈을 응원했다.
이처럼 헨리의 집안 내 위치는 시종에게까지 무시당할 만큼 최악이었다.
“규칙은 상대를 굴복시킬 때까지다. 하지만 형제이니만큼 적당히 해라. 그럼 대련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한스가 손을 아래로 그어 보인 뒤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케빈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헨리에게 말했다.
“선공은 양보하겠습니다.”
하수에게나 양보하는 것이 선공이다.
이것은 케빈이 헨리를 완벽하게 하수로서 얕잡아 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에 헨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제안에 응했다.
“그러지.”
쿵.
발을 내딛기 전, 헨리는 선 채로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헨리의 발 밑바닥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마나가 솟구쳐 올라 헨리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근력 강화, 민첩성 강화, 반사 신경 강화…….’
스트렝스와 헤이스트, 거기다 리플렉스까지.
전생에서 헨리가 애용하던 자기 무장 마법들이었다.
물론 전생에 비해 효과는 떨어질지 몰라도, 오러도 다루지 못하는 애송이를 혼내 주기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이윽고 마법 무장을 마친 헨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닥- 부웅!
“어, 어?”
딱!
꽤 벌어진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두어 걸음 만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헨리는 거리를 좁히자마자 아래에서 위를 향해 목검을 올려쳤다.
이에 자세조차 제대로 잡지 않고 있던 케빈은 황급히 공격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공격에는 무게가 그다지 실려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힘은 무장된 마법 덕분에 대단했다.
케빈의 표정에 다급함이 어렸다.
그러나 사태를 수습하려면 처음부터 자세를 잡았어야만 했다.
헨리는 몸이 살짝 기울어진 케빈의 목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커헉!”
강한 악력이 그의 울대를 움켜쥐자 숨구멍이 비틀어지는 소리가 났다.
헨리는 연달아 케빈의 오른쪽 복숭아뼈를 걷어차 그를 바닥으로 넘어뜨렸다.
콰당!
체격 차이가 두 체급이나 남에도 불구하고 케빈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헨리는 넘어진 케빈이 놓친 목검을 발로 차 대련장 구석으로 밀어 보냈다.
그리고…….
빡! 빡! 빡!
볼품없이 넘어진 케빈을 향해 소나기 같은 매질을 퍼부었다.
‘별것도 아닌 놈이.’
대마법사를 능멸한 대가는 혹독했다.
헨리는 목검을 몽둥이 삼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느 곳 하나 가리지 않고 골고루 매질을 퍼부었다.
모두가 경악했다.
사실 경악은 헨리가 멋지게 선공을 넣었을 때부터였지만,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이 더 충격적이라 할 말을 잃었던 것이다.
“어허, 그렇게 막으면 뼈 맞는다.”
빡! 빡! 빡!
이제 헨리는 아예 한 손으로 뒷짐을 지고 빨래를 털듯이 매질을 퍼부었다.
결국 보다 못한 모리 부인이 다급한 표정으로 한스 남작을 종용했다.
“여, 여보! 빠, 빨리 중지를!”
“어, 어, 그래! 헨리! 이제 그만하거라! 결판이 나질 않았느냐?”
빡! 빡! 빡!
그러나 한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헨리의 매질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 체벌이 덜 가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보다 못한 한스가 소리를 질렀다.
“헨리!”
콰직!
외침과 동시에 헨리는 목검을 대련장 바닥에 힘껏 내리꽂았다.
목검이 케빈 앞에 세워졌다. 그것은 마치 패배자의 묘비를 연상케 했다.
체벌을 마친 헨리가 한스와 모리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하실 말씀이라도?”
“아, 아니, 괜찮다. 네 말이 맞구나.”
“아카데미 입학 건은 내일쯤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럼 저는 피곤해서 이만.”
볼일을 마친 헨리는 유유히 대련장을 벗어났고, 코홀은 황급히 헨리의 뒤를 따라나섰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혹독한 매질에 케빈은 바닥에서 꿈틀거렸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내가 봤다니까, 글쎄!”
주인들의 식사가 끝난 후 시종들이 늦은 아침을 챙겨 먹을 때, 코홀이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게 말이나 되냐? 어떻게 헨리 도련님이 케빈 도련님을 이겨? 수련한 햇수가 다른데.”
“그러니까 말이야! 어어, 볼튼! 너도 봤지? 너도 그 자리에 있었잖아!”
“코홀의 말이 사실이다. 아주 일방적인 승리였다.”
오전에 있었던 대련 소식은 빠른 속도로 저택에 퍼졌다.
어떤 이는 그동안 장남이 힘을 숨긴 것이라 말했고, 어떤 이는 케빈이 아카데미에 가기 싫어 연극을 꾸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상한 소문이 돌 때마다 코홀이 직접 나서서 증언했고, 헨리의 압도적인 승리는 기정사실화되어 갔다.
한편.
‘아주 나쁜 몸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딱히 할 일이 없었던 헨리는 아침부터 목욕물을 받아 몸을 데우고 있었다.
이것은 전생에서 헨리가 자주 하던 피로 회복법으로, 딱히 피로하지 않아도 곧잘 즐기던 여가 생활 중 하나였다.
그동안 헨리는 새로운 몸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했다. 이제는 평생 동안 써야 할 몸이니 자세히 알아 두는 편이 좋았기 때문이다.
‘마법에 대한 감응력도 나쁘지 않고 골격도 나쁘지 않다. 단지 주인이 게을러서 아무것도 못 했을 뿐……. 하지만 벌써 스무 살이나 됐는데 아무 기반도 없다는 건 위험하다. 어서 조치를 취하든지 해야겠어.’
제국의 남자들은 보통, 나이가 두 자릿수가 될 때쯤부터 검을 들기 시작한다.
또한 열 살이 되는 해에 각 영지에 있는 마법사들에게 검사를 받아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있는지도 감별을 받았다.
그런데 이 몸뚱아리의 주인은 두 가지 모두 하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남들보다 10년이나 출발 시기가 늦은 만큼, 서둘러 기반을 다질 필요가 있었다.
시종은 이미 물렸으니 욕탕에는 헨리 혼자뿐이었다. 헨리는 욕조 안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한 번만 더 해 보자.’
3서클까지는 자력으로 이루어 냈다.
하지만 4서클부터는 마법을 깊이 안다고 해서 터득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이유는 바로 심장에 누적된 마력의 양 때문이었다.
그래도 헨리는 부족한 자원을 테크닉으로 극복해 보고자 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네 번째 고리를 그리려고 할 때였다.
파지지직!
“으윽.”
억지로 네 번째 고리를 그리려 하자 심장이 짜릿해지며 무리가 갔다.
헨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부좌를 풀었다.
‘결국 문제는 누적된 마력량이라는 건데…….’
8서클 대마법사라도 안되는 건 안되는 문제였다.
헨리는 단기간에 마력을 늘려 줄 방법에 대해 한참 동안이나 고민했다.
그리고 얼마 뒤였다.
‘그래! 그게 있었지!’
촤르륵.
고민 끝에 시원한 해결책이 떠올랐다.
헨리는 방법을 깨닫자마자 욕조에서 일어났다. 그 때문에 물이 욕조 밖으로 넘쳤다.
“클린.”
마법으로 몸의 물기를 닦은 헨리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뒤 코홀을 찾았다.
“코홀!”
“예, 도련님!”
하루아침 새에 코홀의 태도가 부쩍 충성스러워졌다.
간밤에 얻어맞은 매보다 아침에 선보인 압도적인 실력이 헨리를 더 위엄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종이와 펜을 가지고 와라.”
“예, 여기 있습니다.”
코홀이 센스 좋게 미리 챙겨 둔 필기구를 헨리에게 내밀었다.
헨리는 받아 든 종이에 서둘러 몇 가지 물건들을 적어 내려갔다.
“지금 당장 이것들을 구해 와라. 최대한 빨리.”
“이, 이건 약재들이 아닙니까?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알 거 없고, 구해 오기나 해라.”
“예, 옙!”
시종에게 재료의 쓰임새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코홀은 명령을 받들자마자 곧바로 저택을 벗어났다.
‘부디 재료가 있어야 할 텐데.’
헨리는 멀어져 가는 코홀을 보며 부디 재료가 있기를 바랐다.
이곳이 비록 준남작의 영지라고는 하나 제국의 끄트머리에 있다 보니 내심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내가 죽었으니 영약의 비전도 끊기겠군.’
헨리가 코홀에게 심부름시킨 것.
그것은 바로 헨리가 어린 마법사들에게 매년 만들어 주는 신비의 영약, ‘미러클 블루’였다.
미러클 블루.
헨리가 7서클 시절에 만든 영약으로, 마법사 인재의 증가를 위해 반년간의 연구 끝에 만들어 낸 위대한 유산 중 하나였다.
복용 시 최대치에 머물러 있던 마력의 한계를 풀어 주고 운이 좋다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마력을 몇 배나 증가시키는 신비의 영약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헨리가 죽어 갈 때쯤 영약의 제조법을 수많은 유산들 중 하나로 남길 생각이었는데, 워낙에 급하게 처형된 터라 미처 제조법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허무하게 사라질 뻔했던 유산의 주인이 이렇게 부활했으니까.
방으로 돌아온 헨리는 여분의 종이에 미러클 블루의 제조법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미러클 블루가 아무리 뛰어난 영약이라지만 그런 영약에도 단점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만들어 낸 진한 원액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사용자의 수준에 맞춰 농도를 조절해야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미러클 블루는 영약이었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굉장히 독한 약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리 자체가 심장을 임의로 자극시켜 마력을 팽창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평생에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섭취할 때 사용자의 수준에 맞춰 최대한 농도를 정밀하게 조정해야만 했다.
헨리는 완성한 공식을 몇 번이나 복기하며 자그마한 오류라도 있는지 점검했다.
‘됐어, 완벽해.’
그러나 그는 위대한 8서클 대마법사이자 제국 제일의 두뇌였다.
복기한 공식에서는 아주 미세한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