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같은 이름, 다른 삶 (2)
한스 모리스 준남작.
그는 통일 전쟁에 참전했던 전쟁 용사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그 무공을 인정받고 준남작이 되었다.
제국에서 준남작은 남작보다 아래에 속하지만 기사보다는 위에 속한, 중간 귀족쯤 되는 신분이었다.
준남작은 귀족의 권리 중 하나인 개인 영지 하나를 배분받을 수 있었는데, 한스는 제국 끝자락쯤에 위치한 자그마한 땅을 받고 그곳을 모리스 영지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헨리는 그 한스 준남작의 장남이었다.
‘대공에서 준남작이라.’
귀족이되 귀족이 아니고 평민이되 평민이 아닌 위치가 바로 준남작이었다.
헨리는 시종이 가지고 온 족보를 살피며 모리스 집안에 대해 파악했다.
‘별 볼 일 없는 집안이군.’
딱히 건질 만한 건 없었다.
아비 되는 자는 출세에 욕심이 없었고, 어미는 헨리를 낳다가 죽었다.
또한 술사였던 장남은 재능이 부족했던 건지 의지가 약했던 건지 출세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굳이 출세의 가능성이 있다면 가주가 후첩으로 둔 모리 부인의 아들, 이복동생 케빈 모리스가 그나마 높았다.
‘그래서 흑마술에 손을 댄 건가?’
적자보다 뛰어난 서자.
헨리는 왜 적자였던 술자가 흑마술에 손을 댔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이 아무리 변방의 영지라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세상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가 자신보다 뛰어난 서자에게 위기를 느꼈을 테고.
‘마술서를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리석은 선택이었어.’
질투를 하지 않고 주제 파악을 했더라면 적어도 육체는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육체는 동명의 대마법사에게로 넘어갔고 설사 강령술을 되돌릴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헨리 쪽에서 거절이었다.
생각을 마친 헨리는 읽던 족보를 덮었다. 필요한 정보는 충분히 건졌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부터인가.’
가주가 첫 세대인 이 가문에는 재물도 재능도 아무런 연줄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명가 그 자체.
그러니 무엇을 하든 순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 나가야만 했다.
헨리는 문득 선대 황제인 골든 잭슨을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헨리와 골든 두 사람은 이제는 사라진 ‘뭄바둠’이라는 약소국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맨주먹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제국을 이루어 냈다.
그랬기 때문에 헨리는 다시 한 번 출발선에 서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으니 주특기를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이거, 마법부터 빨리 익혀 둬야겠어.’
헨리는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마법사였다는 사실이 정말 다행으로 느껴졌다.
마법사는 어디서든 반드시 대접받는 존재였으니까.
게다가, 원래대로라면 마력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고 수도에 있는 마법 아카데미를 다녀야 할 것이다. 하지만 헨리에게 아카데미란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아카데미에서 익혀야 할 것들은 헨리에겐 식은 죽 먹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헨리는 덮은 족보를 옆으로 밀어 둔 후 다시금 가부좌를 틀었다.
아까는 서클 자체를 처음부터 만드느라 힘들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새 육체에 적응을 한 덕분에 피로감이 훨씬 덜했다.
헨리는 방 한편에 놓인 모래시계를 보며 시간을 체크했다.
‘날이 밝으려면 앞으로 5시간 정도…… 그 안에 최대한 서클을 늘린다.’
날이 밝으면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았으므로 미리 귀찮은 일들을 처리해 두는 편이 좋았다.
이윽고 다시 한 번 헨리의 집중 상태가 극의에 달했다.
* * *
“후…….”
창문 너머로 서서히 해가 떠오를 무렵, 일출과 함께 헨리의 눈꺼풀 또한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헨리가 입고 있던 가운은 비라도 맞은 것처럼 땀에 흠뻑 젖어 있었으며 젖고 마르기를 반복하여 희멀건 소금기마저 묻어 있었다.
‘대충 끝난 것 같군.’
헨리는 심장에 회전하는 선명한 3개의 고리를 확인했다.
힘든 작업이었다.
단시간에 고리를 3개까지 늘린다는 것은 그 어떤 마법사도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고리를 늘리는 데 필요한 작은 깨달음이 헨리에게는 필요 없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끼이익.
그 순간, 고요한 방 안으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에 헨리에게 얻어맞았던 그 시종이었다.
“도, 도련님. 혹시 안 주무셨습니까?”
“그래.”
“여기 씻을 물을 가지고 왔습니다만…… 따로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땀으로 흠뻑 젖은 헨리를 본 시종의 눈치 있는 질문이었다.
“그럴 필요 없다. 준비는 알아서 할 테니 밖에서 기다려라.”
“예, 예! 알겠습니다.”
평소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시종의 손으로 해결했을 텐데.
시종은 이번에도 역시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끼이익- 탁.
시종이 문을 닫고 나가자 헨리는 다시금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된 헨리는 젖은 가운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뒤 손가락을 튀기며 조그맣게 말했다.
“클린.”
반짝반짝.
청결 마법인 클린을 사용하자 땀과 소금으로 절여진 몸뚱아리가 순식간에 뽀송뽀송하게 바뀌었다.
“차밍.”
이어서 헨리는 한 번 더 마법을 시전했다.
이번에는 청결이 아닌 단장을 위한 치장 마법이었다.
차밍이 시전되자 헨리의 피부에 생기가 돌며 머리카락 또한 헨리의 취향대로 바르게 정돈되었다.
“휴, 당분간은 힘들겠어.”
헨리는 하룻밤 새에 마법의 가장 기본이 되는 3서클을 이루어 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4서클을 향해 정진하고 싶었지만 4서클부터는 요구되는 마력의 양이 달랐기 때문에 수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루밍을 마친 헨리는 이윽고 옷장 앞에 서서 옷들을 구경했다.
그러나 옷들을 하나하나 살필수록 헨리의 인상은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촌스러운 놈.”
짤막한 감상 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의 수도는 유행의 1번지였지만 이곳 모리스 영지는 제국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보니 10번지 이상으로 유행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헨리는 그나마 클래식한 옷가지들을 골라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그런 다음 방을 나서며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에게 말했다.
“배가 몹시 고프니 얼른 앞장서라.”
“예, 알겠습니다.”
늙었을 때는 입맛이 없어 음식을 자주 입에 대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는 건강하고 젊은 몸을 손에 넣은 탓일까?
컨디션 이상의 기량을 밤새도록 사용한 탓에 그 어느 때보다도 식욕이 들썩였다.
헨리는 시종의 뒤를 쫓아 저택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이미 모리스가의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헨리는 대충 눈치를 보고 빈자리에 가서 엉덩이를 붙였다.
‘어미가 없다더니 정말이었군.’
헨리는 족보에 적혀 있던 인물들을 하나하나 눈대중으로 확인했다.
모리스가의 인물은 총 넷으로, 그중 자신을 제외한다면 가주와 후첩 그리고 서자뿐인 단촐한 구성이었다.
“다들 좋은 꿈들 꿨나?”
이야기의 서두는 가주인 한스 모리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일가는 각자 짤막한 아침 인사를 건넨 뒤 곧바로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달그락, 달그락.
제국에서는 아침 식사를 황제처럼 먹으라는 속담이 있다. 그래야만 하루를 든든히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헨리는 볼품없는 집안에 비해 비교적 훌륭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하는 모양이야.’
한동안은 이곳에서 신세를 져야 했기 때문에 이곳 의식주의 질은 헨리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헨리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호화롭게 차려지던 자신의 식탁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부산물이 되었으니 미련일랑 접고 현재의 식사에 만족하기로 했다.
쩝쩝쩝, 후룩, 후룩.
‘저건 또 뭐야?’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헨리는 맞은편에서 게걸스레 밥을 먹는 젊은 남자에게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적자보다 뛰어난 서자, 케빈 모리스였다.
으적으적, 후룩, 후룩, 쩝쩝.
케빈은 마치 거친 용병처럼 밥을 먹었다.
심히 보기 껄끄러운 테이블 매너였다.
‘준남작이라 그런가? 기본이 안 돼 있군.’
헨리는 굳이 격식을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품위는 고수하던 사람이었다.
헨리는 거칠게 식사하는 케빈을 보며 참다못해 한마디를 건넸다.
“케빈.”
멈칫.
헨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스푼을 놀리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그리고 입가에 음식물이 잔뜩 묻은 채로 헨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왜요?”
호의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더불어 시비조에 가까운 어투였다.
시종에 이어 서자까지 엉망진창인 것을 보고 헨리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얌전히 먹었으면 좋겠군, 신사답게 말이야.”
“뭐요? 푸핫핫!”
찰박.
그가 박장대소를 터뜨리자 그 순간, 그의 입안에 있던 음식물 한 조각이 헨리의 수프 위로 떨어졌다.
헨리는 다시 한 번 뒷목이 얼큰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서 케빈이 말했다.
“형님, 드시던 대로 드십시다. 안 어울리게 갑자기 웬 신사 타령이십니까?”
말을 마친 케빈은 다시금 식사를 재개했다.
그러나 헨리는 입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짜증이 몰려왔다.
수저를 내려놓은 헨리는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시종에게 냉수와 따뜻한 차를 주문했다.
이윽고 식음료가 나오자 헨리는 냉수를 한 잔 들이켠 뒤 상석에 앉은 한스의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뒤 한스의 식사가 끝나고, 그가 말했다.
“그래, 너희들은 누가 검술 아카데미에 입학할지 정하였느냐?”
‘검술 아카데미?’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검술 아카데미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상황 파악은 금세 끝났다.
‘그런 사정이 있었단 말이지?’
검술 또한 마법처럼 전문학교가 있다.
검술 아카데미 또한 재능만 가지고 있다면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입학할 수 있었지만, 학비가 너무 비싼 나머지 웬만한 집안에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검술 아카데미라…….’
전생의 자신이었다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문제였다.
마법이라면 모를까 검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독으로 인해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하고 난 후, 그는 평생 느끼지 못했던 검술에 흥미가 돋았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수업만 따라간다면 졸업할 때쯤에는 어엿한 한 명의 기사가 되어 있을 테니까. 육체 또한 엄청나게 단련될 테고 말이야.’
비싼 만큼 값어치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검술 아카데미의 가장 큰 단점은, 졸업할 때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서클을 올리는 게 더 효율적이다.’
졸업을 위해선 최소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재수가 없어 낙제라도 한다면 더 오래 걸릴 것이다.
게다가 헨리의 목적은 황제에 대한 복수였다.
한가하게 몇 년이나 소모해 가며 검술을 익힐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그 순간, 케빈이 말했다.
“아버지! 의논할 것도 없습니다. 아카데미에는 조금이라도 더 가능성이 있는 제가 가는 것이 맞습니다!”
헨리가 고민하는 사이, 케빈이 헨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을 터뜨렸다.
그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만약 그가 시종이었다면 진작 턱관절을 돌려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더 참기로 했다.
어찌 됐든 그는 혈육이었고, 실제 나이만 놓고 봐도 수십 살은 차이가 날 만큼 어렸기 때문이다.
헨리는 어린아이의 도발에 일일이 응해 줄 필요 없이 어른스럽게 행동하기로 했다.
그때 한스 모리스 준남작이 말했다.
“네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네 형인 헨리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때였다.
약간의 인내심을 갖고 케빈에게 기회를 넘겨주려던 차, 케빈의 마지막 말이 기어코 헨리의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
“들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형님 성격에 아카데미에 가면 보나 마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을 게 뻔합니다. 헨리 형님은 늘 그래 왔으니까요.”
“그냥 당한기만 한다고?”
불현 듯,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죽임을 당해야만 했던 자신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형님은 배짱도 없어서 항상 저와의 대련을 피해 오지 않았습니까?”
헨리의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분명히 저 말이 자신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헨리는 우연찮게도 술자와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데다 케빈의 말이 묘하게 자신의 과거를 건드리는 것 같아 속이 들끓었다.
하지만 그런 헨리의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케빈은 자신의 주장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그러니 저런 형님보다는 제가 아카데미에 가는 게 훨씬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케빈이 말을 마쳤을 때, 한스가 무심한 눈빛으로 헨리를 응시했다.
“케빈의 말이 지나친 점이 없잖아 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구나. 네 생각은 어떠하냐?”
이미 가주의 눈빛에는 기대가 없었다.
대답을 예상한다는 눈빛.
마치 맹독을 권하던 황제의 눈빛이 떠오르는 그런 눈빛이었다.
이에 헨리가 차갑게 대꾸했다.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명색이 검술 아카데미인데 서자보다는 적자인 제가 가야 가문의 위신이 설 것 같습니다.”
“뭐라고!”
케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헨리가 더욱 차가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착각도 유분수지.”
“뭐요?”
“내가 너와 대련을 하지 않은 것은 배짱이 없어서가 아니다. 단지 네 실력이 나와 견줄 정도가 되지 못해서 상대해 주지 않은 것뿐이다.”
순간의 침묵.
그리고 얼마 뒤 식탁에 앉은 모두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