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탑주가 되는 건 으레 예상하듯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법사로서 뛰어난 소양과 실력을 지녀야하는 건 기본이었고, 마탑 내부에 각종 논문 제출 및 암묵적으로는 고유 마법도 만들어야 제대로 된 마탑주로서 대접받을 수 있었다.
“...진심인가? 레오나르도?”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마탑주들은 그 서두없는 주장을 개소리라 치부할 수 없었다.
다른 저명한 마법사가 똑같이 주장했다면 분명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을 마탑주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은 차마 부정하지 못한 채 레오의 의중을 다시 확인해야했다.
“농으로 이런 말을 할 만큼 유쾌하진 않습니다.”
지금 레오에게는 저 말을 할 근거와 능력이 충족된 지 오래였다.
마법 소양에 논문 작성, 본인이 직접 만든 고유 마법까지 이미 능력적으로 레오나르도는 현 마탑주 이상의 실력을 지녔다.
현자의 제자라는 명목까지 더하면 아예 새로운 색의 마탑을 설립해도 응당한 명분이 있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마탑주를 한다는 건 그저 실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어. 유능한 걸 떠나서 오히려 속박이 될 가능성이 있고.”
백탑주 아스피는 마탑주라는 직책이 그리 유용하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마탑주는 마법사임과 동시에 한 집단을 이끄는 수장, 마법에 대한 연구만이 아니라 한 집단을 이끌어야할 책임이 있다.
자신의 어머니를 연구하는데 일조하고 방조한 적탑의 예산 및 정책을 일일이 관리하고 책임져야 하는 소리다.
정신적으로도, 합리적으로도 권유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못할 일도 아니죠. 따지고 보면 마탑 중 적탑의 마도가 저에게 가장 일치하는 길 아닙니까?”
확실히 그건 틀린 주장이 아니다.
레오가 흑탑주의 후계자 자리를 사양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부족한 마도구학 지식과 제작 능력 때문이었다.
흑탑은 마법을 마법사가 아닌 이들도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목적으로 설립되었기에.
마도구학에 비교적 약한 레오나르도로선 흑탑의 자리는 합리적으로 받지 말아야했다.
하지만 적탑은 같은 맥락으로 받아드리는 것에 명분에 존재했다.
“현 적탑 출신의 어떤 마법사도 정면에서 절 이길 수 있는 이는 없습니다.”
“...반박할 수 없는 게 슬프군.”
한번 레오나르도와 정면에서 싸워본 청탑주 블루아는 미간을 짚으면서 납득해야만 했다.
20대도 안 된 마법사가 보인 전투 기술.
사용하는 마법의 10할을 전부 활용하고 자신의 무술에 고루 적용시킨 전투 방식은 가히 예술이라 칭해도 손색없었다.
하물며 적탑주 제인 나르샤 사후, 적탑에 남은 마법사는 좋게 말해도 출중하다 칭하기 부족한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있었다면 적탑의 타락이 그렇게 은밀히 마탑에 침식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반발이 심하다는 건 인정해야겠지. 적탑 출신도 아닌데 적탑주라는 건 납득하기 어려울 테니까.”
소문에 관한 건 모든 마탑주들이 암묵적으로나마 직접 꺼내지 않았다.
레오나르도가 이딴 소문과 음해에 대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마탑주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음 속에는 우려가 있었다.
마왕이 점찍은 그릇이며 흑마법을 한번 사용한 전적이 있는 레오를 적탑주로 순순히 인정할 것인가.
그에 대한 의문은 아직 우려의 형태로 남아있었다.
“적탑주 제인 냐르샤는 마왕과 내통하는 와중에도 외부적으로 문제 없이 운영했죠.”
레오나르도는 지금 마탑주들의 심리조차 꿰뚫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우려가 심각하게 작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본인들이 운영하는 정상적인 마탑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마법사는 기사와 달리 주군이 바뀐다 해도 할 일만 한다면 불만이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표면적인 건 몰라도 적탑 내부는 이미 정치질로 날뛰고 붕괴로 착실히 향해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 마법사 집단에겐 가릴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게 설사 마왕이 점찍은 그릇이라 할지라도요.”
[이미 결심은 굳은 것 같군.]
베르난은 휠체어에 의존한 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는 얼굴로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게 저 청년의 선택이라면 자신에겐 반대할 이유는 없다.
[난 찬성일세. 어차피 적탑주에 대한 문제로 골치를 썩던 차 아닌가.]
분위기는 투표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미 마탑주는 이 주제를 어느샌가 가능한 이야기로서 인정하고 있었다.
“나도 찬성일세. 지금 적탑엔 임시라도 체계를 운영할 인물이 필요해. 기본적인 것만 실행해준다면 문제될 건 없지.”
흑탑주에 뒤이어 청탑주도 찬성 의사를 내비쳤다.
레오나르도의 능력과 현자의 조력이 있다면 지금과 같이 활동을 벌여도 무너져가는 적탑 정돈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나도 반대는 안 해. 라인하르트와 연관된 거나 마왕의 그릇 같은 문제는 있지만... 그걸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면 반대할 순 없지.”
백탑주 아스피는 반대만 하지 않았을 뿐, 회의적인 의견은 감추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본인이 라인하르트의 직접적인 직책을 진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레오가 라인하르트의 중심 인물임을 부정치 않을 것이다.
아마 마탑 내부에선 그에 대해 반발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터.
마왕의 그릇 문제 또한 레오나르도가 말한 효과가 오히려 악영향적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적탑주에 대한 허가면 몰라도 적탑의 마법사를 설득하는 건 해줄 수 없어. 그래도 가능하겠...”
“가능합니다. 애초에 마탑주님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건 딱 그 정도거든요.”
적탑을 설득할 방법은 확실한 걸로도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게 아니었다. 현자를 힘입었다는 상황에서 이미 최후의 수단은 마련된 것였다.
레오의 자신있는 눈을 보자 아스피 일리난은 두손두발 다 들었다는 듯 숨을 내쉬며 인정했다.
“하... 내가 이런 말하기도 뭐하지만 나보다 더 나이 많은 것 같다니까.”
“경험한 게 생각보다 많거든요.”
시간의 질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양적인 부분에서도 레오나르도는 마탑주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마탑주는 적어도 적탑주에 오르는 거에 대해선 만장일치로 허가했다.
“이야기와 별개로 현자님은 어디 계신가? 아까부터 영체도 느껴지지 않던 것 같던데...”
용건이 중요한 만큼 바로 물을 수 없었지만, 청탑주 뿐만 아니라 다른 마탑주들도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라면 일분일초라도 더 현자와 대면하고 싶은 것이 학문적 본능이었다.
“...아... 현자님은... 옛 친구와 회포를 나누고 계십니다. 그 이상은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옛 친구라, 그러고 보니 최근 신전이 소란스럽던데 그거와 연관이 있나?]
“부정은 안 하겠습니다.”
단지 지금은 현자와 성녀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건, 정보 측면으로 저들을 신뢰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이 이상으로 저 마법사들의 낡은 동심을 깨부수고 싶지 않았을 뿐.
* * *
“그래서 적탑주를 하게 되신 거예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오나르도 기사님께선...”
[야야!! 오지 마!! 꺼져!! 훠이!!]
“네, 적탑 통제 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에 대해 더 치밀하게 조사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방법...”
{현자아아!! 앙탈부리지 말고 오세여!!}
마탑주에게 새삼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게 진심으로 옳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한 시대를 평정하고 현 시대를 이루어낸 초석을 다진 두 영걸의 추태는 아는 사람이 봐도 충격적이었다.
“체통 좀 지키십시요!”
“아 좀 두 분 다 조용히 좀 하세요!!”
이 둘의 후계자인 루미네와 레오는 참다 못해 성을 내며 일갈했다.
다른 때면 몰라도 중요한 대화를 하고 있는 지금, 저딴 같잖은 만담 촌극을 가만히 듣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나한테 그러지 말고 저 새끼한테 그래!! 애초에 레오 네가 내 몸을 이 꼴로 읍읍...!]
{아, 죄송합니다. 저희 현자가 앙탈이 심해서요.}
앤젤라는 흉부의 무시무시한 유압으로 현자의 앙탈을 그대로 묵살했다. 버둥거리던 현자도 이내 작은 체구의 한계로 인해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어서 하자면 아직 적탑주가 된 건 아니에요. 다른 마탑주님들의 동의가 있어도 적탑 측 사람들이 과반수 이상이 반대하면 저라도 방법이 없거든요.”
그렇기에 각 마탑주는 본인의 마탑에 오랫동안 종사를 하고 자리에 오르는 것이 관례였다.
상식적으로 그런 인물이 능력까지 있다면 마법사로서 반대할 이유는 정치질 외엔 없으니까.
“그런 문제만이 아니라... 괜찮으시겠어요? 라인하르트 가주까지 병행하면서...”
아리아스필은 레오의 역량과 능력에 대해 전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히려 레오가 왕좌를 찬탈한다해도 아리아스필은 당당히 그 뒤를 따라 쿠데타를 도울 의지까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오도 엄연한 인간이다. 육체의 체력도, 정신의 피로도 하다보면 축적되고 짓누르기 마련이다.
“직책상 가주는 아리아 아가씨잖아요. 명목적으로 문제는 없어요.”
“그래도... 너무 지치실 것 같은데요...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고 전부 소화하기도 힘들 것 같고...”
레오나르도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몸을 사리고 휴식을 취했으면 좋겠다고 아리아스필은 바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일은 착실히 해내고 있었지만, 지금 레오나르도는 너무 과잉적으로 보일 정도로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불태우는 것처럼 맹렬하게.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뭐, 사실 회계나 내부 병사 관리는 라인하르트는 시리카 님과 글라디오 님께서 꽉 붙잡고 계시니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사실 라인하르트의 내정은 완성형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하다.
애초에 일반 병사조차 1성의 마나연공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다른 집단의 정예군과도 능이 대처할 수 있었고.
본디 상단 출신의 시리카는 회계와 예산 관리에 한해서는 문제 없이 관리를 해냈다.
마왕의 등장이 1~2년 늦어서 원로원이 조금이라도 더 노사했더라면 분명 라인하르트의 판도도 바뀌었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적탑 쪽은 제 방식으로 통제할 방법은 있고, 통솔하는 건 현자님께서 대타로 하셔도 괜찮을 테죠.”
[내 의사 좀 묻고 결정해라. 어?!]
어차피 한가하시면 왜 그러실까.
꼭 저렇게 툴툴대면서도 제대로 해주면서.
그 생각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내 현자는 한숨을 내쉬며 알겠다 하였다.
참 알기 쉽단 말이지.
“...그래도 의외로 마탑주들이 순순히 허가하는군. 조금 반대가 있을 줄 알았는데.”
마르켄은 퍽 놀라운 듯 레오나르도를 살폈다.
마왕의 그릇과 흑마법에 조금 더 민감하게 대할 줄 알았는데, 만장일치로 찬성이 나올 거라고 확신치 못하던 찰나였다.
“아무래도 제가 기여한 것도 있고, 마법 실력과 이미지를 확실히 관리했으니까요.”
지금 레오나르도에겐 마왕이라는 위험 부담을 지고도 받이들일 가치가 존재했다.
그건 라인하르트에서도 예외가 아닐 테지.
‘...능력이 없으면 진작 나가는 게 맞으니까.’
예전에 자신도 그런 이유로 합당하게 라인하르트에 나갔어야 했으니까.
“별 이야기는 없었다니 다행이군요.”
“...그렇죠.”
크리스의 악의없는 말에 레오나르도는 흑탑주가 한 말이 자연히 곱씹게 되었다.
사실 별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엔 너무 가벼우며 껄끄러운 내용이었다.
“있잖습니까? 흑탑주 베르난 베르데인 님의 질문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머니께 여쭤보겠다 하였습니다만.”
아인 또한 악의없이 레오를 곤혹으로 밀고 갔다. 아인을 너무 정직한 아이로 이런 위기를 봉착하게 만드리라 레오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다.
“...그건...”
“...저에 대한 거라면 부담 느끼시지 않으셔도 돼요. 하기 어려운 질문이시면 얼버무리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아리아스필은 평소보다 침착하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레오의 의견을 경청했다.
약 수 개월 사이 아리아스필은 또래의 기사나 귀족 영애에 비해 성숙한 정신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 서로 믿기로 했으니까.
사랑하기에 서로 더 믿어야지.
“흑탑주 님께서 결혼식에 꼭 가시고 싶으니 언제 할 것 같은지 언질 좀 해달라고 하셨거든요. 하하... 언제 갈지 모른다고...”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레오에겐 나름 부담스러운 이야기였다.
시한부인 흑탑주만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아리아스필의 감정이 계속 염려되었다.
자신은 사실상 마왕의 예비 육신이나 다름없는 상태.
장기적으로 생각했을 때, 생리적 생활이나 자식, 양육 문제에 있어선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는 하고 싶었다.
아가씨는 예전부터 그런 쪽에 활발히 긍정인 편이었으니...
“...결...결혼이요?! 그건... 그건...”
평소 같으면 활짝 웃으며 좋아했을 아리아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입으로 딱딱거리기 바빴다.
‘...역시... 나 때문에...’
부담되는 게 당연하지. 뭘 기대는 건가.
연인이라고 다 받아줄 거라 생각하는 쪽이 이기적인 거지.
[...그보다 너흰 정확히 무슨 사이냐?]
현자도 이번에는 악의없이 질문한 거였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 연인 관계죠!”
“주종 관계죠. 예!”
서로의 말이 엇갈렸다.
아리아는 주종관계라 말했고.
레오는 연인관계라 말했으니.
그날 두 사람의 세상에는 금이 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리아가 생각하는 주종 관계.
레오가 주인, 자신이 노예인 겁니다.
그리고 노예가 주인님께 봉사를 하는 건 상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