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악은 예상보다 길었다.
놀라는 행위 자체는 당연했다.
기억상실도 엄연한 질병, 그것도 정신적이고 사회적으로도 크게 문제 되는 중병이었다.
현자의 말한 방법 외에는 회복할 수단이 없다 확정된 지금.
병이 완전히 치료된 것에 한편으로 기뻐하면서도 바로 믿을 수도 없었다.
너무나 수지맞는 행운을 만나면 의심해보는 게 현명한 사람의 심리였다.
“아우...? 아니... 레오나르도 님께서 2회차 가문에 가장 처음 왔을 때 한 행동하고 가본 장소 기억나...요?”
리오스는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맥락이 없고 기쁜 나머지 아주 신중히 질문을 가했다.
괜히 기대를 했다가 배신당하는 건 마음에 오래 사무칠 테니까.
“알프레드 집사장님께 농담쳐서 실신시키고, 잠시 심문실에 갇혔었죠.”
그런 우려가 무의미하게 보일 정도로 레오나르도는 2회차 라인하르트 가문와의 첫만남을 자세하고 정확히 묘사해내었다.
지나칠 정도로 특징적인 나머지, 때려 맞히거나 대충 찍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럼... 그때 당신께 생긴 이명이 있는데 기억나시지는지...”
“농담 암살자, 혹은 농담 살해자인데.... 솔직히 말해 지금 생각해도 흑역사긴 하네요.”
크리스의 기습적인 질문에도 레오는 당황치 않고 옛 추억을 편안히 대답했다.
점차 이 행운은 한 순간의 달콤한 꿈이 아니라는 게 확신이 선다.
사람들의 입꼬리는 천천히 올라갔다. 레오 본인 또한 부드러운 미소를 내보이며 지금 상황에 나름대로 안심을 느꼈다.
“...저...정말 돌아온 겁니까?”
전 가주인 글라디오는 아직도 믿기지도 않는지 다시 한번 되물었다.
이미 레오나르도가 본래의 태도로 돌아왔음에도 갑작스러운 호재에 간단히 행복하기가 어려운 눈치였다.
최근 들어서 나온 일이라곤 악재, 혹은 불행 중 다행 정도밖에 없었으니 이해 못할 반응도 아니었다.
“예, 글라디오 님. 너무 늦게 돌아와서 죄송할 정도로 확실히 기억은 돌아왔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그리 말하며 침대에 앉은 채로 가볍게 목례했다. 앉은 자리에서 용병 출신의 기사가 보인 기품은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청년다운 자신감이 엿보이면서도 노년의 연륜이 느껴지는 배려심이 평소의 모습을 다시 연상케 했다.
이 이질적인 모습이 평소 2회차 레오의 성품이라는 게 새삼스러운 형태로 깨달을 수 있었다.
“걱정끼쳐서 죄송했습니다. 여러분.”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에 가장 감정에 동요가 온 사람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자신을 기억하고 기억하는 레오나르도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에.
한없이 절망하고 극복해야했던 소녀.
그에 대한 책임으로 끝없이 자책한 용사.
“...정말...! 죄송해요...!”
아리아스필이 레오의 품으로 안겨들며 눈물을 참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1회차와 2회차의 간극을 신경되지 않았기에.
아리아스필은 격도, 벽도 없이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었다.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 연이어 사죄를 멈추지 않았다.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제 책임에게서 도망치려고 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정말...”
아리아스필의 감정도 레오의 회귀처럼 시공간이 뒤섞인 것처럼 요동치면서 이내 북받치는 격정을 표출했다.
죄책과 안심이 양립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걸, 아리아스필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아가씨께선 열심히 하셨어요. 제가 없는 곳에서 고생하셨네요.”
레오나르도는 아리아스필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감정을 헤아렸다.
그녀의 길고 윤기가 있었던 장발은 자신의 공격으로 잘려 어설픈 중단발이 되었고, 머릿결 자체도 그녀의 정신만큼이나 푸석푸석하고 뻣뻣해졌다.
그런데도 그녀가 아름다운 건, 아마 아리아스필의 외모가 그런 단점에 묻힐 만큼 격이 낮지 않다는 점에 있었을 것일 뿐.
실질적으로 아리아스필의 정신적 압박은 으레 10대 후반의 귀족 영애가 겪을 만한 것이 아닐 것이다.
“...혹시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괜찮겠...나?”
아리아스필의 오열을 친할아버지인 자신보다 잘 받아주는 레오나르도를 보며.
마르켄은 짐짓 민망하게 눈치를 보며 질문을 내었다.
“아, 예. 하셔도 괜찮아요. 어떤 거죠?”
“기억은 어떻게 되찾게 된 건지...?”
사실 다들 본질적으로는 같은 걸 의문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레오나르도의 기억이 되찾은 사실 자체에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그걸 바로 질문할 냉정할 여유가 없었을 뿐.
유일하게 화색 한번 보이지 않은 현자는 레오가 기억을 되찾았음에도 제대로 말도 걸지 않은 채, 원리에 대해 골돌히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사랑의 힘으로 또다시 극복하신 거죠!?”
개인적으로 리오스는 그런 전개를 바랐다.
아리아와의 격전을 통해 서로의 감정이 이어지며 한 단계 더한 각성을 거쳐 마왕의 저주를 풀어낸 기적.
대부분의 사람들도 리오스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았을 뿐, 대강 비슷한 생각과 상상을 품고 있긴 했다.
외부에서 사람들이 보기엔 맥락적으로 아리아와 결투를 벌인 것이 원인처럼 보였으니 별 달리 추측할 만한 여지도 없었다.
“...그건... 엄밀히 말해 아닙니다.”
내부의 상황을 경험한 레오나르도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신이 이렇게 된 것엔 그런 감정이 근본에 있었기 때문이지만, 정신세계에서 경험한 일은 설명치 않고 넘어갈 만큼 가볍지 않았다.
“...마왕이 기절했을 때 나타났습니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그 한마디에 동결된다.
표정은 딱딱히 굳게 되고 시선이 차게 식어버린다.
그 시선은 레오에게 눈치를 주거나 책망하기 위해선 아니었지만, 마의 왕이라는 명칭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영웅을 긴장케 만들기에 충분한 거물이었다.
[...설마 마왕이...]
원인을 추측하던 현자는 이내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론적으로는 가장 확실한 방식으로 기억을 수복할 수 있는 존재.
“...마왕이 제 기억을 수복시켰습니다.”
가장 적대해야할 대상에게 중요하고도 큰 도움을 받아버리고 말았다.
* * *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차게 식었다.
방금과 같이 살얼음판처럼 빙결된 건 아니지만,
들떴던 기쁨은 어느샌가 냉철하게 식어 냉혹한 판단을 요구하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믿기는 힘드시겠지만 정말 거래를 한 것도, 계약을 한 것도 아닌데 멋대로 기억을 수복시켰습니다.”
레오 본인도 이 설명이 어쭙잖은 변명처럼 느껴졌다. 누가 봐도 기억을 되찾은 건 마왕의 무언가를 넘기고 얻은 요행처럼 보일 테니까.
어쩌면 마왕이 노리는 건 이런 형태의 이간질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샘솟았다.
{아뇨. 사과하실 문제는 아닙니다. 레오나르도 님은 엄연한 피해자, 그리고 마왕의 유혹에 넘어갈 기회주의자가 아닌 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앤젤라만의 의견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레오나르도가 그런 같잖은 수작에 넘어갈 멍청이가 아니라는 건 단언할 수 있다.
90세를 넘긴 노인이 될 때까지 레오는 단한번도 마인이 되고자 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그 전에.”
아리아가 상황을 판단하려는 순간, 마르켄은 정색한 표정으로 손녀의 말을 끊었다.
“아리아.”
단단히 주먹을 쥔 모습은 실로 그의 감정이 어떤지 겉으로나마 형성화하고 있었다.
“...네, 단장...악!!”
자신의 조부를 바라본 순간, 마르켄은 아리아의 머리에 주먹을 쥐어박았다.
평소에 손녀를 눈을 넣지 않는 걸 넘어 손녀 본인이 직접 실명시켜도 화 한번 안 낼 터인 마르켄이 지금 폭력으로 체벌한 것이었다.
“...네가 지금 무슨 잘못을 하려했는지 아나...?”
강골의 노익장의 표정은 비참하기 짝이 엇었다.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닫은 것인가 스스로에게 부끄러워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난 네가 무얼 잘못했냐 물었어.”
다른 때와 달리 마르켄은 사과에도 쉽사리 화를 누그러뜨릴 수 없었다. 그녀 본인이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인지하고 반성할 때까진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레오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용사의 직함을 떠넘기기 위해 자살하려...했습니다...”
지금 말하는 것 자체도 곤혹스러운 대화였다.
자살하려는 생각과 행동은 쉬웠으나.
친가족 앞에서 이런 추잡스러운 사실을 토해내는 게 부끄럽기만 하다.
“그게 다는 아니지!”
서늘하고 무거운 고함으로 아리아는 문책당한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면 넌 정말로 반성해야한다.”
가족에게 있어 그건 그만큼 막중하고 쓰라린 상황이었다.
“넌 네 가족들과 아무런 대화 없이 네 목숨을 끊으려 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용사의 대의를 위해서라고... 네 추측이 틀릴 수도 있고! 다른 방안을 찾을 수 있는데!”
언성을 높이며 마르켄은 자신이 아리아에게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것에 진심으로 무참함을 느꼈다.
자신의 손녀딸은 이다지도 힘들어했는데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더한 죄책감을 느낀다.
만약 1회차의 레오나르도가, 레이널드가 그런 식으로라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마저 상상되어 조부와 단장이라는 직함마저 수치럽고 같잖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
그건 아리아만이 잘못이 아니었다.
아리아는 용사로 선택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라인하르트와 인류 수호의 책임을 떠안아야했다.
성검을 쥘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15살의 소녀는 항상 죽음을 당연시 각오해야만 했다.
마왕이 나타나고, 레오의 비밀을 알아낸 지금에 이르러선 그녀의 정신은 좋게 표현해도 비정상적으로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적어도 전 용서했어요.”
지금 상황을 다독인 건 침상에 앉아있는 레오나르도 본인이었다.
아리아스필이 정말 죽기를 원치 않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짓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이딴 짓 두 번하면 정말 죽여버릴지도 모르지만요.”
그 한 마디에 짐짓 모두가 섬뜩함을 느꼈다.
종종 생각하는 일이지만 레오나르도의 집착은 아리아스필의 사랑보다도 독하게 상식에 벗어나 있었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고, 자살 도중도 아니었잖아요.”
아리아스필은 자살을 계획하는 와중이었을 뿐, 자살을 즉각 실행한 건 아니었다.
레오가 아리아를 용서한 건 그것만을 감안해서도 아니었다.
“아마 성검의 기억이 동화되어서 마왕에 대한 정보가 흘러들어온 거겠죠.”
기억의 동화로 생긴 죄책감, 그에 따른 기억에서 보인 마왕.
그 마왕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정신과 인생을 갉아먹는다고 생각하면 레오 본인도 정신적으로 동요하고 자살마저 고민할지도 모른다.
“...마왕은... 이런 말이 무책임할 수도 있지만 공포를 형상화한 악몽 같았어요.”
분명 외견은 자신의 어머니의 것을 사용했지만, 이를 이용하고 그 이상으로 내보인 불쾌감과 두려움은 정신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실 무섭습니다. 제 정신이 그 괴물에게 먹히는 게 아닐까... 하면서...”
레오는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앞에서 공포심을 드러냈다.
1회차든, 2회차든 어떤 절망과 위기에서도 냉정을 유지했던 레오가 그런 말을 한 건 현자에게조차 충격이었다.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염치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죽음으로서 이 사태를 예방하려한 겁쟁이가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리아스필은 자신의 성검을 쥐며 말한다.
“...레오나르도 님께서 구해주신 목숨으로, 저도 죽지 않고 막아낼게요.”
목숨을 걸겠다는 비겁한 발언은 쓰지 않는다.
그 말은 레오에게 저주가 될 뿐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으니까.
“든든하네요.”
그리 말하며 레오는 피식 웃음을 내었다.
조금이나마 차가웠던 분위기가 풀렸다.
[...근데 마왕이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런 거지? 기억 상으로나, 네 몸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어.]
현자는 이런 화합 속에서도 냉정하게 레오의 몸 상태를 분석했다.
고급 장비가 없는 만큼 완벽하게 검사했다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자의 분석에선 레오의 몸은 정상으로 향했을 뿐 문제가 더 발생되진 않았다.
아직 마왕과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은 것 외엔 큰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게 사실...”
현자의 질문에 레오는 미묘하게나마 신경쓰이는 말이 떠올랐다.
“...걸리는 게 있긴 합니다.”
마왕이 흐릿해진 채로 뱉은 말.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있고,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역겨울 뿐이었지만.
[뭔데? 말해봐. 정보 하나라도 중요한 시점이라고.]
“...그게...”
알린다면 마왕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지만.
그 일말의 가능성이 중요한 문제였다.
그렇기에 레오는 입을 열었다.
“...절 ‘내 유일한 사랑’이라 마지막에 부르더군요.”
[...아...?]
현자를 포함한 모두가 일제히 당황했다.
애초에 마왕에게 성별이 있는지도 의문스러운 마당에.
그런 말이 들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었다.
“...없애버려야겠네요.”
다만 아리아스필만 빼고 말이다.
저 한 마디, 마왕에 대한 추적의 단서가 될진 불확실했으나.
분명 용사로서 흔들렸던 의지를 확실하고 단단히 다질 수 있는 동기였다.
레오는 귀엽다고만 생각한 아리아의 질투가 처음으로 든든하게 느껴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친가 쪽에 다녀오는데 도중에 폭풍우가 심해져 도로 상황 자체가 막혀더군요.
지인들은 어린이날이니 쉬라고 하지만, 이미 제 마음은 성인의 감수성을 지니지 않았나 싶습니다.
청소년이라는 건, 청년과 소년의 경계나 다름없으니까요.
근데 19금 편을 왜 못 쓸까요.
지금이라도 얼른 아리아스필이 사죄의 의미로 메이드 노예복을 입고 레오에게 못 다 먹은 아이스크림을 떠먹여주다가 그대로 아이스크림을 가슴에 떨어뜨려.
더욱 먹고 싶어진 레오가 [아리아크림]을 '안돼...! 주인님...! 거기...! 좋아...! 성검보다 더...!' 이렇게 요란하게 추릅거리는 걸 쓰고 싶은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