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은 허공 뿐이었다.
지면도,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 바깥에 달로 향할 때 보이는 우주라는 미지에 닿은 감각이었다.
어둠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았다.
적어도 어둠이라는 걸 인지하기 위해선 일말의 빛이라는 게 필요하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어둠도 일말의 빛이 있어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공허하면서 그렇게나 만족스럽나?>
마왕의 목소리가 울리기는 전까지는 말이다.
눈치챘을 땐, 이미 마왕이 눈앞에 나타났다.
가증스럽게도 어머니의 거죽을 뒤집어쓴 ‘그것’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역겹다.
부아가 배에서 끓어올라 속이 뒤집어지는 것만 같다.
아리아스필이 용사의 자리를 준다는 이야기에 대해 동의 의사가 조금이라도 생길 정도였다.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어. 난 대화를 하기 위해선 인격체의 껍질을 쓸 필요가 있거든.>
비꼬는 의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악의가 섞인 말이 아닌, 저 인격의 내면에는 악의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마인과 흑마법사조차 먼지 같은 양심과 선의가 존재하기는 하는데.
그렇게 ‘저 존재’가 하는 말은 그저 설명일 뿐이었다.
“무슨 수작이지?”
마왕이 손을 내밀려고 하자 레오는 팔을 움직이는 걸로 쳐내려고 했다. 팔을 움직이는 게 이토록 어색했던 적은 부상이 있던 때에도 없었다.
<수작이라, 대화도 하나의 수작일 수는 있겠지.>
마왕의 손과 레오의 팔을 그대로 통과하며 평행선을 그었다. 레오가 강제로 성검에 침투했을 때, 흑아리아에게 접촉하지 못한 것과 유사한 현상이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너와 협상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할 생각 없으니까 꺼져.”
레오나르도는 접촉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적과의 대치에 있어 긴장을 늦추는 건, 자살행위 이상으로 위험했다.
<꺼지라고 해도 난 이곳으로 향한 게 아니라서, 너와 내가 정신으로서 이어진 거지.>
“더 엿 같은 상황이로군.”
거리를 벌렸음에도 바로 뒤에 존재하는 그 악귀를 바라보며 욕설이 나온다. 공포를 느끼긴 했지만, 공포에 정신이 동요되진 않았다.
<나에겐 아주 좋은 상황이지만.>
‘...금제는 반응하지 않아. 죽을 위기는 아니라는 건가.’
적용된 금제는 정도에 따라 정신적인 죽음에도 반응하는 신의 권능이다.
신성이 방출되지 않고 못 하는 걸로 봐선 적어도 죽을 상황은 아니라는 거다.
물론 마왕인 만큼 위기인 건 매한가지였고, 안심이라는 감정도 전혀 들지 않았다.
<긴장할 필요 없어. 난 어디까지나 너와 협상을 하고 싶은 거다. 금제가 그걸 설명해주지 않나.>
“꼭 죽지 않아도 개같은 건 많이 겪을 수 있지 않나?”
금제에 대한 생각을 들킨 것에 당황을 표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알 만한 녀석이니까.
중요한 이 상황을 파악하고 타파해 외부에 교신하는 것일 뿐.
<확실히 그렇지. 인생이라는 건, 비합리와 불합리가 엮이고 엮여 만들어진 모순 덩어리다.>
“사람도 아닌 자식에게 인생론을 듣고 싶지 않아.”
도발해도 마왕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감정이라는 걸 애초에 지니는 것 같지가 않다.
<넘겨짚는 게 심하군. 애초에 내 존재는 인간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런 것치곤 아주 인간을 같잖게 여기시네.”
마왕의 발언은 마치 자신이 신이라는 된 것 같은 확신이 있었다.
거만하다거나 오만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 비유가 비유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마왕은 강대했다.
<실제로 같잖은 존재지. 모순적이면서 역겨워.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어차피 네가 더 심하면 심했으니까 굳이 대답 안 할란다.”
인간이 토가 나올 정도로 쓰레기인 건 레오가 가장 잘 아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마왕은 변호할 여지도 없는 악 그 자체다.
그런 악의 개념에게 인간이라는 존재를 평가할 자격은 당초에 없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볼까.>
레오의 적의에 적대적이지 않은 태도로 마왕은 협상을 시작했다.
아마 마왕이라는 존재만 몰랐다면 나름의 예의를 지키고 대화했을지도 몰랐다.
“말하지 마.”
마왕이라는 시점에서 완벽한 낙제점이었지만 말이다.
<상관은 없다. 다만 넌 여기서 나가는 방법도 모를 텐데, 나에게 정보라도 캐는 게 이득 아닌가?>
반박할 수는 있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자신에게는 정보가 없다.
이곳이 어디인지, 몇 시인지도 몰랐으며, 탈출할 방법은 물론이고 탈출이라는 개념이 맞는 건지 확신할 수도 없다.
“씨부려봐. 최악이네 진짜.”
<넌 언제나 납득이 빨랐지. 그런 점이 참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존재적 말종에게 칭찬 받아봐야 더러울 뿐이야.”
저 칭찬이 진심이든, 아니든 중요치 않다.
어느 쪽이든 마음 속 깊이 혐오스러웠으니까.
<너의 기억을 돌려주지.>
“...뭐?”
잠시 멈칫했다. 사고가 욕망에 묶여 경직되었었다.
마왕의 계략에 뒷덜미가 서늘해진다.
어떤 말에도 동요하지 않겠다.
그런 결심이 단숨에 흔들리게 했으니까.
그야말로 마의 왕, 인간의 악의를 잘 이해하고 있다. 인간이 지닌 이기심마저 여실하고 철저히 들추어내고 있다.
<아, 돌려준다는 표현보단 되돌려준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군. 복구에 가까운 일일테니...>
“거절하지.”
하지만 거절해야한다.
더는 동요하는 기색을 보여서도 안 된다.
기억을 주는 건, 결과적으로 마왕 본인에게 좋은 일이 터.
그리고 마왕의 이득은 분명 자신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일이다.
‘...대가는 당연히 있을 거야. 악마의 계약이란 대부분 그런 거니까.’
그렇게 생까하며 유혹을 일축시킨 순간.
<설마 현자가 네 기억을 되돌려줄 거라 생각하나?>
용기를 다질 틈도 없다.
악의 왕은 자신의 또다른 약점을 들추어 찌른다.
현자, 1회차인 자신으로서는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적이 아닌 건 알겠지만, 완전한 아군이라는 확신이 아직 서지 않았다.
<나라면 현자는 믿지 않겠어.>
“네 관점에 따른 궤변은 듣고 싶지 않은데?”
<알고 있다만, 실제로 현자는 기억을 되돌려줄 방법이 있어도 대가가 두려워 시도도 하지 않지 않나.>
현자는 레오나르도가 기억을 되돌려달라 해도 아직 때가 아니라며 말을 미뤘다.
화가 나면서도 정확한 건 제대로 설명치 않았기에 답답한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차라리 대가라도 명확히 말해줬다면 이렇게 열이 받지는 않았을 거다.
“그건 ‘우리’들 문제지? 삼자대면할 거 아니면 뒷담화로 이간질하지 말지?”
동요를 떨쳐내기 위해 본질을 찾아낸다.
현자는 불확실한 존재일 뿐, 적은 아니다.
그에 비해 마왕은 확실한 적이다.
명실상부한 인류의, 인간인 자신의 적이다.
<역시 넌 인류의 편이로군. 인간으로서는 아주 훌륭하고 올곧게 지키는군.>
“개소리, 난 그딴 버러지 같은 걸 왜 지키는데?”
<그 말대로다. 과연 그 버러지 같은 인간들은 네가 위기일 때 네 편을 들어줄까?>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온다.
그걸 감히 자신에게 묻는 것인가.
인간과 인류에게 환멸이 났음에도 인간으로 있는 자신에게.
“기대도 안 하니까 이간질은 할 가치도 없어.”
애초에 자신의 주 목적은 인간의 긍지니, 인류의 존속 따위가 아니다.
기대를 안 하기에 배신도 당하지 않는다.
“내 목적은 모든 마인을 찢겨죽이는 거야.”
자신은 모든 마인을 쳐죽이는 게 목적이다.
그런 게 완벽히 가능할 리가 없는 걸 알지만.
적어도 마왕을 죽인다면 큰 진척은 있겠지.
<마인이라, 애초에 인간이 마인의 근본이긴 하다만 너에겐 그런 사실은 딱히 의미가 없겠지.>
마왕은 이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비열했다.
웃음 자체는 비웃음의 형태가 아니었으나, 어머니의 웃음을 판에 박은 것처럼 따라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기억을 되돌려주는 거엔 대가가 없다.]
“...거짓말 하지 마.”
레오의 반응에 마왕은 오히려 좋다는 듯 미소를 키웠다.
거짓말아라고 단정짓는 것, 그건 다르게 말하면 자신이 한 말이 거짓임을 바라는 반증이었다.
<왜 그러지? 대가 없이 기억을 회복하는 건 너에게 더할나위 없는 이득 아닌가?>
“...엄마를 능욕하는 새끼한테 무언갈 받는 게 좋을 리가 있냐?”
흥분하면서도 레오는 냉정히 정보를 분석한다.
페이스에 이미 말려들고 있다. 냉철하고 침착하게 감정을 통제해야한다.
이성과 논리를 강하게 붙잡는다.
<능욕이라, 네 어머니가 이걸 바라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나?>
“...뭔 개소리야.”
<넌 렌이라는 존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사실 너도 의심하고 있지 않나?>
이곳은 대화는 소리를 매질삼아 하는 소통이 아니다.
정신과 정신이 말이라는 사념을 내뿜는 전음의 소통일 터.
그럼에도 마왕은 레오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렌이 정말 자신의 친부모일까? 렌도 자신도 사실 근본은 괴물은 아닐까?>
“닥쳐!”
레오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마왕에게 주먹을 날린다. 이미 관통된다는 걸 잠깐 망각할 정도로 레오는 동요하고 있었다.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다. 네 편은 진짜 누구일지. 현자와 렌은 과연 네 생각하는 존재일지.>
마왕의 형체가 점차 흐릿해진다.
자신이 성검에서 탈출할 때와 동일한 현상이다.
<아무래도 담소는 이걸로 끝이로군. 다행히도 방해꾼이 찾아오기 전에 끝냈을 수 있었어.>
“너 이 자식...! 거기서!!”
아직 제대로 된 건 알아내지 못했다.
이대로 저 만악의 근원을 보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닿지 않는다.
[대화를 들어준 선물로 기억은 복구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마왕은 웃으며 사라졌다.
[내 유일한 사랑.]
그런 말을 남기며.
* * *
레오나르도는 침대에 누운 채 기절해있다.
입은 부상은 다른 때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중상. 평범한 사람은 분명 죽었을 치명상이었다.
쓰러진 레오를 간호하는 건, 그의 동료들이었다.
이미 아리아스필은 자기멋대로인 목적과 도망을 일행들에게 설명한 뒤였다.
모두에 그에 대한 위로와 질책은 아직 하지 않은 상태였다.
단지 질문하고 설명을 이해했을 뿐.
본론은 레오나르도가 깨어나고 해야하는 게 예의였다.
“...레이널드... 님의 상태는 어떤가요?”
“전반적으로 호전됐어요. 아마 체력만 회복된다면 분명 일어나실 거예요. 이렇게 쓰러질 분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루미네는 넌지시 용사 아리아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정말 레오나르도가 또다른 용사라면 지금의 우려는 해도 의미가 없는 근심일 뿐이었으니까.
“...으음...”
그리고 그 생각대로 레오나르도의 눈꺼풀이 떨렸다. 단순한 생리현상이 아닌 건 목소리가 계속 울리자 인지할 수 있었다.
“...레오... 아니... 레이널드 님...”
레오나르도는 그대로 일어나 모두를 바라본다.
아리아, 현자, 아인, 크리스, 리오스, 루미네, 글라디오, 마르켄, 시리카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기억이 난다.
“...혹시 괜찮으십니까?”
깨어난 레오나르도를 보며 모두가 얼어있는 찰나.
그 중 뒤에 있는 시리카가 앞으로 나섰다.
표정은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슬픈 기색이 역력하다.
“...네, 몸에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당황하면서도 레오는 이내 예의를 지키며 대답했다. 그 행동에 모두가 마왕에 정신이 조종된 것은 아닌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럼 혹시...”
다만 시리카는 한손을 들며 뒤로 살짝 빼낸다. 무인이 보기엔 한참 허접한 자세였다.
“...뺨을 한번 때려도 괜찮겠습니까?”
체통을 지키며 시리카는 그렇게 의사를 구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다양한 감정이 엿보인다.
그나마 확실한 거라면 애증일까.
애증마저 애매한 감정인데 말이다.
“...때리셔도 됩니다.”
짝!
가벼운 한 대, 몽롱한 정신을 일깨우긴 확실한 일격이었다.
자신이 반 정도로는 진심으로 아리아를 죽이려 한 것에 비하면 싼 대가였다.
“죄송합니다.”
사과해야할 건 레오 본인에게도 있음에도 시리카는 폭력에 대해 먼저 사죄했다.
“...전 부모로서 많이 부족한 여성입니다. 무술에 재능도, 실력도 없고... 당신이 봐온 미래에선 두 아이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무능한 어머니죠.”
시리카의 얼굴에는 약간이지만 눈물이 고여있다.
“...그럼에도 전 제 딸을 죽이려한 당신을 쉽게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이, 위선적으로는 들릴 수 있다는 거 압니다만...”
그녀는 진심으로 아리아에게도, 동시에 레오에게도 미안했다.
“...전... 저흰 레이널드 님을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레이널드 님 쪽에서 사양한다면 지양하겠지만... 진심으로 가족이 같은 가족을 해하고자 하는 걸 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시리카는 레오를 껴안았다.
"...두 사람 다 고생 많이 하셨어요."
피곤한 탓일까
엄마의 외모를 뒤짚어쓴 마왕보다.
지금의 시리카가 더 엄마처럼 보였다.
이미 정신은 100살을 넘겼는데, 웃기고 슬픈 일이다.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여러분 입장에선 저와 직접 함께한 시간이 2년, 많아도 3년 남짓일 텐데... 저를 부정하지 않고 거부하지 않아서 솔직히 안심했어요.”
그 정중한 말에 모두가 일순 얼어버린다. 내용에도 놀라웠지만 저 어투는 2회차의 라인하르트라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좀 어색한가요? 제 입장에서도 거칠게 굴다가... 갑자기 이렇게 되어버린지라... 설명부터 해야겠네요.”
레오나르도의 머리는 다시 검은색으로 되돌아갔다.
모든 기억은 되돌아왔다.
레이널드 때의 기억조차 사라지지 않은 채.
완벽하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스포일러]
레오나르도는 어떻게든 레이널드 때의 흑역사를 잡아떼려고 할 겁니다.
그리고 실패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