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하르트 저택으로 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수월히 진행되었다.
성인 앤젤라와 루미네가 다시 가는 걸 몇몇 신도들은 말리기는 했지만, 성황까지 직접 성인의 선택에 왈가왈부하지 말라 당부한 이상 더는 명분이 없었다.
신전은 이제 확실히 라인하르트에 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 * *
“...휴...”
분명 아직 큰 고비들은 남아있다.
마왕의 그릇 문제, 성검 속 흑아리아에 대한 문제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후우...”
그래도 나름 해결하고자 서로 노력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진척이 크게 내보이는 상황이었다.
리오스와 루미네는 이젠 자체적 외상을 치료하는 것을 비명없이 해결할 수 있었고.
크리스는 이제 용화에 완전히 적응해 오른팔을 사용을 허가받은 상태였다.
마르켄과 글라디오는 괄목하다 말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젊은 층보다 더한 테크닉과 오러 운용을 몸에 새길 수 있었다.
아마 코어 7성도 먼 형태는 아닐 터.
“후우우우.... 하아아...”
그런 호재에도 이런 상황을 만들어준 플레이메이커는 땅이 꺼질 만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부터 왜 한숨 토악질하고 난리야?]
“누가 토악질했다는 거야?”
보다 못한 현자가 지적하자 레오나르도는 침울한 한숨을 분노로 밀어내었다.
도발한 것 자체는 바람직하다 할 수 없었지만, 아까부터 푹푹 내쉬던 헛바람의 이유를 물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그 무슨 일이 있나요? 아까부터 계속 한숨을 쉬시길래...”
훈련을 마친 리오스는 계단에 앉아 레오에게 조심스레 질문을 내었다.
저기압 상태에도 태연히 후유증이 덜한 대신 통증은 극심할 부위 위주로 꺾고 뒤튼 괴기스러운 훈련을 내보인 상대인 만큼 신중에 조심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딱히. 일이라 할 것도 없어.”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훈련이 끝나가는 1시간 동안 레오는 들숨 날숨 모두 한숨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지금 저 말투는 울적하지만 캐물어봐주면 못 이기는 척 대답해줄 사람의 것이었다.
[샌드위치 윗도리 터지는 소리하고 있네.]
“아가리 닥쳐. 애늙은이 현자가 아까부터 뺀질뺀질.”
물론 현자는 그걸 고분고분히 해줄 인물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지.
레오와 현자는 그날따라 눈빛만으로 신경전을 벌이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단순히 지금 일어난 말다툼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기억 건에 대해서도 레오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하던 차였다. 현자는 걱정하지 말라 호언한지도 이미 1주일이 넘긴 차였다.
방법을 실행하기는커녕 언질 한번 주지 않으니 레오에겐 더한 스트레스가 정신을 압박될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가 걱정돼서 그래.”
하지만 근심의 본질은 아리아에게 있었다.
신전에서 아메리의 아들인 콜트에 대해 설명할 때, 의도치 않게 다른 두 소녀들이 날뛰는 모습을 본 이후로 아리아스필은 확연히 달라진 태도로 자신을 대했다.
“...걱정할 게 있습니까? 오히려 안정된 것 같던데요?”
크리스는 흘러내리는 땀을 팔에 감은 붕대로 닦으며 덤덤히 물었다.
저택에 돌아온 뒤로 아리아스필은 별 다른 변화 없이 자신이 할 일을 충실히 해내었다.
식사도 꼬박꼬박 식당와 함께 했고, 레오나르도가 내준 과중 훈련도 묵묵히 성공해내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밝은 미소와 격조있는 어투로 주변 이들을 배려했으니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보였다.
“...그게 걸린단 말이지.”
표면적으로는 괜찮다는 의미였지만 말이다.
그런 작위적 가면의 위화감과 위험성을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는 레오로서는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다.
“정신적인 충격이 크면 몇몇 사람들은 오히려 ‘정상’을 연기하게 돼. 다른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게 된다고.”
“...확실히 그건...”
레오나르도가 말했기에 신빙성은 있는 말이었다.
소견과 논리에서도 신뢰할 수 있었지만, 라인하르트 일가는 이미 그 행동을 경험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님도... 따지고 보면 전부 연기였겠지.’
1회차 레오나르도가 내보인 모든 예절, 어투, 행동거지들은 전부 가면을 쓴 채 내보인 연극과 같을 것이다.
기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걸 매도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건 예의를 지킨 것일 뿐, 본성의 악의를 숨긴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래서 문제인 거지. 그게 자연스러우면 자연스러울수록 알아채는 건 힘들거든. 본인이 너무 예민한가 생각될 만큼.”
“...정말 착각일 가능성도 있잖습니까?”
글라디오는 그리 되물었다.
아리아가 걱정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 레오나르도도 과중된 일과 충격을 받은 만큼 신경이 날카로워져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 증거로 자신들에게 행하는 훈련이 평소보다 독해진 것도 있었고,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것도 근거가 되었다.
“그렇긴 해. 그래서 약간 확인할 근거를 찾아봤지.”
“...근거를 찾아본다는 건...”
루미네는 약간 창백한 기색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설마 아리아가 질문한 것에 대해 실마리를 잡은 것인가, 불안감이 느껴졌다.
“걔가 먹는 음식에 장난을 쳤어. 쓴맛이 강하게 나는 조미료를 몰래 뿌려뒀지.”
“...예? 왜 그런 장난을?”
동네 애들이나 할 법한 장난에 루미네는 긴장이 풀렸는지 반 정도 격없이 질문했다.
걱정했던 것보다 시시한 확인법에 맥이 풀렸는지도 모른다.
“보통 그런 연기는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 가장 좋은 상태를 외면에 내보이지.”
레오나르도는 작은 조미료병을 주머니에서 꺼내면서 흔들어보였다. 쓰고 독한 향이 직접 먹어보지 않아도 코에 물씬 풍겨왔다.
“아리아가 저택에 오면서 한번이라도 반찬 투정한 적이 있어?”
“그건... 없군요.”
레오의 말대로 아리아스필은 라인하르트에서 식사할 때 한 번도 불평이나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접시를 싹싹 비우며 ‘오랜만에 먹으니 정말 맛있다’라는 말까지 태연히 덧붙였으니까.
“...먹을 거에 장난질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주 중증이야. 정신 상태는 빛좋은 개살구라고.”
본래 이런 의미로 쓰이는 속담은 아니었지만, 비유적으로는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루미네, 혹시 너 짚이는 거 없냐?”
“...예? 저 말씀이신가요?”
갑작스레 화살이 다시 루미네에게로 향했다. 당황스러운 어투로 성인 루미네는 용사로서의 비밀을 지켜야할지 갈등의 기로에 섰다.
아직 어린 성인으로서는 어려운 문제였다.
성인으로서 용사의 비밀을 숨겨야할 의무가 있었고, 용사 스스로가 시련을 이겨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루미네 수사...}
하지만 앤젤라는 알고 있다.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으로 은폐해서 레오가 겪은 고통들을, 지금도 이와 다를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만약 자신의 선택으로 누군가 상처를 받는다면...
“...됐다. 넌 예전부터 아리아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 안 해줬으니까.”
2회차 뿐만 아니라 1회차의 루미네까지 포함시켜하는 말이었다.
정곡을 찌른 독설임에도 루미네는 큰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건 은연 중에 레오가 루미네가 진 책임을 가져온 배려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내가 직접 가서 묻는 게 낫겠지.”
그리 말하며 레오나르도는 계단에서 일어났다. 얼굴에 있는 근심은 어느샌가 레오에겐 나아갈 목표가 되어있었다.
[근데, 만약 아리아스필이 네가 1회차에 다른 여자들이랑 꽁냥대던 거에 초월적인 질투심을 느끼는 거면 어떡하려고 그래?]
현자의 격없는 지적에 모두가 일순 소름이 돋는 걸 체감했다. 만약 이게 아리아스필이 질투심이 만든 큰 그림이라면 마왕보다도 더한 공포였다.
지금까지 아리아가 내보인 질투심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뭐 어때? 그거면 안심이지. 오히려...”
레오나르도는 뒤를 돌아있는 채로 약간 얼굴을 붉혔다. 발그스레 익은 귓가는 이런 생각이 민망하다는 걸 본인도 자각한 눈치였다.
“...좀 귀엽지 않아? 나 하나 때문에 그렇게 날뛰는 게.”
[...롸?]
“...예?”
{...네?}
아인마저 당황한 채로 되물었다.
딸바보에 손녀바보인 글라디오와 마르켄마저 아리아의 질투심에는 주름진 손이 떨리는 지경이었다.
부모라고 해도 그런 질투어린 애정을 온전히 받아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성인조차 납득할 수 없는 감정의 그릇이었다.
[...새삼스럽지만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가장 미친 놈은 너야.]
“아인아.”
아인은 광기일지언정 엄연한 순애를 모욕한 저질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예, 오붓히 데이트를 즐기십쇼.”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면 어머니와 오붓한 담소를 즐기십쇼.”
“..그러니... 아냐, 됐어.”
지금 입을 다문 건 아리아와 대화하고 설득할 체력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결코 자신의 딸이 데이트라는 말이나, 오붓한 담소라는 말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서 부정하지 못한 것은 아니란 말이다.
* * *
아리아스필은 저택에 돌아오고 나서 규칙적인 활동을 내보였다. 훈련에 임하는 것도, 식사를 하는 것도, 청결을 유지하는 것조차 신전에서보다 완벽히 해내었다.
다만, 홀로 방에서 휴식을 취할 때면 아리아스필은 성검을 빼낸 채로 본인을 비추어보았다.
명상와 같은 행동처럼도 보였지만 본질은 그와 전혀 달랐다.
감정이 진정되는 명상과는 달리 성검에 얼굴을 비춰볼 때마다 감정이 진정되지 않는다.
온갖 잡념이 혐오의 형태로 스스로를 쪼아대는 감각이 강해질 뿐이었다.
성검에 비친 자신이 말했다.
[이기적인 여자, 레오는 그만큼 희생했는데.]
대답할 수 없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1회차의 아리아스필, 흑아리아는 전혀 개입하고 있지 않다.
이건 순전히 자신의 생각이 구현된 것이다.
[넌 아직도 망설이고 있어.]
“...아냐... 나도...”
[어린아이처럼 용사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었지. 레오나르도는 항상 네가 밝은 곳에 있을 수 있도록 진흙탕에 몸을 던졌는데.]
알고 있다. 나도 보았다.
[아니, 네가 본 건 일부일 뿐이잖아. 레오나르도는 네 무능한 실패 때문에 망가진 세상에서 모든 인생을 쏟아부었을 텐데.]
레오나르도가 괜찮다고 했잖아.
이런 식으로 죄책감을 가져서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그런 식으로 도망치는구나. 레오의 상냥함을 이용해서, 넌 내 욕심을 그런 식으로 정당화시키는구나.]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도 이미 전부 눈치챘잖아.
앤젤라 성인이 대답해주셨을 때 알아챘으면서.
“...그건...”
앤젤라는 아리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두 명의 용사가 동시대에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지만 두 번째 질문을 더하자 확신을 세울 수 있었다.
‘{만약 현 세대의 용사가 사라진다면 확실히 다음세대에 용사가 나타날 수는 있습니다. 성검을 통한 각성만 이루어진다면...}’
분명 그 뒤에 앤젤라는 아직 실패하지도 않았고, 잘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그런 자해적인 생각을 하지 말라 덕담했다.
하지만 그런 위로 따위는 지금 아리아스필의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흑아리아는 3대 용사가 있다 말했지.]
“...맞아...”
3대 용사는 자신보다도 훌륭한 인물이며 자신보다 영웅의 책무를 이행할 수 있는 용자라고.
1회차의 아리아스필이 그렇게까지 고평가할 수 있는 인물은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남자 외에는 아리아스필에게는 생각나는 인물이 없다.
[...설마 도망칠 생각이야? 네가 희생하면 세상도, 레오도 살 수 있어.]
“...”
[비겁한 년, 제 욕심밖에 모르는 창녀, 용사라는 직함이 아까워, 사랑으로 포장한 이기주의자.]
부정할 수 없다.
부정하면 안 된다.
부정해서는 안 돼.
“...맞아...”
맞으니까.
[...성검을 들어.]
난 성검을 들어 칼날을 안쪽으로 돌렸다.
수직으로 배를 찌를 수 있는 형태로.
확실하게 죽을 수 있도록.
[넌 남들이 누리고 싶었던 걸 마음껏 누렸어. 죽어도 마땅해.]
“...그래...”
내가 죽는 걸로 레오가 용...
똑똑...
그 순간, 문소리가 울렸다.
아리아스필은 소스라치게 놀라 바닥으로 성검을 놓는다.
부드럽고 간결한 노크가 아리아를 멈추었다.
“아, 아리아. 날씨도 좋고 더운데 오랜만에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아니 가는 건 어때?”
몹시 어색한 말투로 외출을 제안하는 레오나르도의 목소리가 울렸다.
차마 대답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두려움 덕에 죽을 용기는 잠시 사그라들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요즘 들어 코로나 증세 비스무리한 게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기침에 역한 기운에 자주 헛구역질을 하빈다.
가족 중 한 명이 코로나를 앓은 채로 계속 신경 안 쓰고 야식이고, 물컵이고 써서 그런 것 같은데.
정작 자가진단을 하면 음성으로 뜨더군요.
소신발언하자면 아까웠습니다.
아플 거면 양성으로 아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