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자체는 전체적으로 재정비돼가고 있었다.
신전의 인물은 빠르게 솎아져 적재적소에 맞는 장소에 성직자가 배치되었고, 그에 따른 능률은 급격한 성장을 내보였다.
왜 지금에서야 이렇게 배치해준 거냐는 배은망덕한 칭찬이 나올 정도로 신전은 광전사 사태 이후의 혼란을 호황으로 뒤바꿀 수 있었다.
카앙!!
크리스의 몸은 빠르게 회복되어 재활 훈련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석적인 용의 혈청을 써서 적합률이 높더라도 전신을 움직이는데에는 최소 3개월이 필요하다.
하지만 크리스는 1주일 만에 전신을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단순히 노력이나 근성으로 무리하는 게 아니라 치료적 소견으로 봐서도 크리스는 재활을 해야 맞는 상태로 호전되었다.
“...정말 치사하고 사기적인 혈통이야.”
라인하르트 피가 한 방울만 섞여도 머리는 백발과 벽안으로 바뀌고.
마나의 순도는 1서클 마법사에 뒤지지 않으며 육체의 기본 강도는 단련한 기사에도 필적한다.
새삼 그런 가문의 불세출 천재한테 1승이라도 따내려고 한 자신이 바보 같을 정도였다.
“...사실 전 레이널드 님이 더 존경스럽습니다... 저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제대로 치료도 없이 전장으로 향했을 텐데...”
크리스는 붕대로 칭칭 감겨진 용인화의 팔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팔 한 짝을 내줄 각오는 했는데, 막상 팔 전반의 부위가 화상과 같은 고통을 매시간 겪으니 사실 있는 것조차 썩 쉽지 않다.
그나마 자신은 안정제와 현자의 유산으로 고통을 줄일 수 있었지만, 이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싸워온 레오나르도는 그런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받은 치료 방식은 1회차 레오나르도의 몸으로 직접 실험하고 연구해서 얻은 산물 그 자체였으니까.
“알면 됐어. 어차피 내가 더 아프겠다고 댁이 덜 아프겠어? 근데...”
레오나르도는 눈짓만으로 보다 못해 아예 대놓고 손가락으로 크리스의 ‘장신구’를 가리켰다.
본래 용도가 의료용 장비긴 하지만, 지금 크리스에겐 하등 의미가 없기에 장신구로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붕대로 칭칭 감은 거야?”
크리스의 오른팔은 하얀 붕대로 두껍게 감겨있었다. 성해포도 아닌 천 붕대로 팔을 가리고만 있었다.
애초에 현자의 유산이 해독 능력이 뛰어난 탓에 굳이 성해포도, 성수를 적신 붕대조차 필요없었고.
“...이건... 그러니까... 팔에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
“그럼 반대팔은 왜 맨살로 뒀는데? 아예 다리고 목이고 다 감으면 완벽하게 안정 찾겠는데?”
거친 정론에 크리스는 부끄럽다는 듯 오른팔을 뒤로 가렸다. 그 말 그대로 크리스가 붕대를 감은 이유는 안정감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보...기에도 좀 흉하지 않습니까. 비늘이나 손톱도 돋아나서...”
“그러면 에일린이나 리오스한테 부탁해서 팔 쪽에만 변신 마법을 걸면 그만이잖아.”
에일린과 리오스, 가까이 있어 티가 안 날 뿐 둘은 마탑주에 필적할 실력을 지닐 대마법사다.
용인화되었다 해도 팔 한 쪽 정도는 한 달이 넘도록 원래 모습으로 변신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이 시대인 만큼 의태용 마도구도 잘 만들어질 있을 테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정말 크리스는 부끄러운 듯 붕대를 쥐었다.
사실 레오나르도가 용화를 처음으로 보여줬을 때, 소녀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성해포를 푸는 모습이 눈에서 계속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언젠가는 그렇게 멋있는 말을 읊으며 용의 힘을 다뤄보고 싶었다.
“됐어. 그냥 물어본 거야. 누가 보면 폭탄 같은거라도 두른 줄 알겠네.”
애초에 국부 노출이나 안구 테러가 아닌 이상, 레오나르도는 패션에 대해 딱히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은 주의였다.
물론 아무리 시대가 지나도, 나이를 먹어도.
크리스의 아스트랄한 센스는 쉽사리 괜찮다 말하긴 어려웠지만 말이다.
“어차피 그 팔은 당장 쓰지도 않으니까 상관없기도 하고.”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지금의 재활 훈련에서 크리스는 오른팔은 한번도 쓰지 않았다.
용화의 혈액이 전신에 퍼진 덕으로 상승한 신체 능력으로 핸디캡을 메울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오른팔을 계속 못 쓴다는 건 생활적으로도 불편한 일이었다.
게다가 완팔과 양팔에 중량있는 추까지 찬 상태라면 피로와 불편은 정도를 더할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질문도 없고, 불만도 없으시네?”
그런 제한에도 크리스 라인하르트는 군말 한 번 없이 훈련 수준의 재활에 따랐다. 자신이라도 할지언정 질문 한 번은 할 법도 한 데 말이다.
“아무 이유 없이 이런 행동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요.”
크리스가 레오나르도를 신뢰하는 수준은 친부모인 마르켄의 이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깥에서 봤을 때는 웃길지는 몰라도 정신적 연상인 레오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단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유도 알 만합니다.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죠?”
“오, 이런 쪽으로는 말이 잘 통한단 말이지.”
크리스의 몸은 일부만 용화가 발현된 상태, 그에 따라 신체 부위마다 균형이 틀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우선 용화가 된 오른팔을 버틸 만한 근육과 테크닉을 형성시키는 게 중요했다.
“이제 그 팔은 신체라기보다는 하나의 병기라도 봐도 돼. 경우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당신이라면 대포는 우스울 정도일 거야.”
그런 만큼 육체의 밸런스는 중요성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자칫하면 용의 인자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먹히게 될 수 있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되겠어. 정리하자고.”
“예? 벌써 말입니까? 평소 하던 것보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도 해야지. 언제까지 신전에 있을 수도 없고.”
인력 정리가 끝나가니 신전에서 나갈 준비를 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크리스의 용인화 치료도 끝났고 자신의 마왕화도 당장 폭주할 위험은 없었으니 저택에 돌아가서 재정비를 해도 될 것이다.
“무엇보다 아리아스필이...”
“예! 주인님!”
고개를 살짝 돌린 사이에 어느샌가 태산과 같은 흉부를 지닌 노예(용사)가 나타났다.
분명 신이 선택한 용사일 텐데, 어느샌가 자신의 노예가 되어버린 말 같지도 않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레오나르도는 답답하면서도 복에 겨운 고민에 빠져 미간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신전은 성인 못지 않게 용사 또한 신의 사도로서 숭상했다.
그것도 루벤 이후로 처음으로 등장한 후대 용사인 만큼 아리아스필에 대한 존경심과 경배심은 이미 루미네 이상일지도 모른다.
“아, 아뇨! 편하게 생각해주세요!! 오히려 애완동물 수준으로 생각해주셔도 상관없어요!”
“...”
레오나르도는 어째서 고고한 자신의 라이벌이 저렇게 됐나 진지하게 고뇌했고, 크리스는 자신의 조카가 저런 성향을 지닌 것에 어찌 반응해야할지 고통스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명령이야. 밖에서는 그런 호칭 좀 쓰지 말라고. 알겠어?”
“...알겠습니다.”
미묘하게 아쉬운 눈치로 아라아스필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바라보았다.
레이널드 주인님의 말대로 지금은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 용사로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쓸 필요가 있었다.
...아주 조금 이 시선들이 레오 앞에서 쏟아지니 쾌감을 주긴 했지만... 참을 필요는 있었다.
“...그럼...”
아리아스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레오나르도의 귀에 작게 바람을 속삭였다.
“...둘만 있을 때는 해도 괜찮을까요? 주인님?”
간신히 억누른 변태적 욕망이 담긴 바람이 살짝 새어나온 것이었다.
“...그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거절할 자신이 없었다.
이걸 대놓고 거절하는 사내는 남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도 엄연히 성욕과 혈기가 팔팔한 남자 중 한 명.
“...그러니까...”
어떤 음마에게 당해도 버틴 어둑시니라도 첫사랑에게 이런 말을 듣고 버티는 건 무리였다.
“...괜찮을지도...?”
[너 뭐하냐?]
“우왁씨!”
레오가 대답한 찰나, 뒤에서 나타난 현자가 영체로 슬며시 관통하며 질문했다.
평소 레오나르도라면 영체라도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잠시 흑마법 수준에 매혹에 걸린지라 감이 잠시지만 다 죽어있었다.
[여기 성기사 있나요? 왠 50대 아저씨가 10대 처녀와 노예 플...!]
퍼억!!
{현자! 망신시키지 말고 조용히 하십쇼!}
성녀 앤젤라는 현자의 장난기를 죽이기 위해 물리적인 방식으로 그를 죽였다. 어느샌가 소년 모습에도 익숙해진 앤젤라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무슨 일로?”
“예에...! 지금 막 끝난 참이거든요오!”
“...응? 끄악!!”
뒤에는 아예 거지꼴을 하고 있는 전 대학원생의 외모를 지닌 하프엘프가 있었다.
며칠 사이에 수척해지고 눈가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 엘프가 아니라 언데드를 연상케했지만 레오나르도는 그녀가 누구인지 아직 알아볼 수 있었다.
“...형수...!? 어쩌다가 그렇게...”
“...예에... 반지 없는 걸 깜빡하고 평소처럼 철야로 하다보니까요오...”
처음에는 놀라기는 했지만 미묘히 이런 태도가 익숙하기도 했다.
1회차에도 분명 이런 녀석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조금은 쉬엄쉬엄하라니까. 다크서클이 아메리 네 챠밍포인트인 건 알지만... 우으극...”
“...카페인 때문에 힘드니까 혈압 올리지 마라...”
피곤한 아메리는 갸날픈 체격으로도 리오스에게 해드락을 걸면서 목을 졸라대었다.
척 봐도 애정행각이나 다름없었고, 리오스가 깝죽거린 게 있는 만큼 아무도 말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메리 씨 덕에 자료 정리가 수월해졌어요.”
“베르난 님께서 어째서 후계자로 삼았는지 납득이 될 정도였죠.”
루미네와 에일린은 협력을 위해 과로한 아메리를 위해서라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회차 상급 마인과 2회차 토벌 마인 정보를 일일이 대조해보는 건, 에일린조차 눈의 수분이 증발할 정도로 지치는 일이었다.
황실을 제외해도 신전, 라인하르트, 마탑이 잡은 모든 흑마법사와 마인을 대조해 소거하는 건 상상을 초월할 만한 업무였으니까.
“...생각보다 구분이 단순해서 금방 끝났어요.”
“...아...그래?”
레오나르도조차 한 달은 더 걸릴 거라고 예상한 노동이었는데, 아메리는 단 사흘 만에 서류로 이루어진 막노동을 끝내놓은 참이었다.
“...역시... 그 녀석...”
“네? 뭔가 문제가....”
“아니, 우선 가서 정리한 걸 확인해보자. 마침 훈련도 끝났어.”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옮겼다.
표정과 입꼬리가 미묘히 떨리는 이유는 당장 이 자리에서 설명할 수 없었다.
* * *
레오나르도의 회귀를 알고 있는 일가 전원이 모여 브리핑을 듣고 있었다.
“우선 레오나르도 님이 작성해주신 마인 목록에서 제외한 인물들이에요. 적어도 100단위씩 제외되죠.”
“...이걸 일일이...”
레오나르도가 저렇게 많은 마인을 잡은 것도 놀랍지만, 이걸 일일이 정보 하나하나를 대조하며 골라낸 아메리도 만만치 않게 놀라웠다.
“그보다 자네 괜찮은가...? 상태가 갑자기...”
“아, 괜찮아요... 에스프레소를 병째 마셔서 그래요.”
반지를 빼자 아메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카페인 중독 증세가 도져버렸다.
애초에 반지를 낀 채로도 커피를 하루에 10잔씩은 마셨는데 해독조차 안 되는 지금은 증세가 악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확실히 이 논리대로라면 메리 라미아와 광전사, 이 둘의 공통점이 보이는군.”
라인하르트를 습격한 메리 라미아, 그 네크로맨서 뱀파이어도 따지고 보면 마왕의 수족으로 다뤄졌다.
그 흡혈귀 사령술사와 광전사의 공통점을 찾아내면 한 가지 규칙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른 마인들에게는 없는 한 가지 법칙이 존재했다.
“...아리아스필이 사후에 갑자기 나타난 마인들... 혹은 마왕의 사후라는 게 합리적으로 아귀가 맞을지도 몰라.”
아리아스필과 마왕의 공멸 이후, 그들은 어느샌가 불쑥 등장해있었다. 탄생과정은 모를 수 있다쳐도 성장 과정이 마인인 걸 감안해도 비정상적으로 빨랐으니까.
“...그럼 이미 사냥한 마인들은...”
“잠깐.”
하지만 레오나르도에겐 다른 것보다 의문스럽고 궁금한 것이 있었다.
자신이 쳐죽인 최상급의 마인들과 마왕의 수족에서 찾은 공통점보다, 몇 배는 흥미를 자극하는 의문이었다.
“...레오... 레이널드 님? 혹시 말씀하실게 있나요?”
“그게 사실 마탑 쪽인 너희에게 묻고 싶은 건데, 나에게 있어서는 몹시 중요한 문제거든.”
1회차에서 자신을 뒤에서 서포트해준 한 명의 공학자에 대한 문제였다.
그녀에 대해서 계속된 의심을 지금 확신으로 바꾸고 싶었다.
“혹시 마탑 쪽에 ‘카페인 메카닉’라는 별명 쓰는 마법사 알고 있어?”
“...카페인 메카닉?”
장난처럼 느껴지는 이름에 아무도 간단히 안다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 들어보는군. 그런 기묘한 이명은...”
“...본명은 당연히 아닐 테지만... 마탑에 그런 인물은...”
평범한 이름이라면 동명이인이나 헷갈릴 수도라도 있겠지만 그런 별명 같은 이름은 듣도 보도 못했다.
정보전에 빠삭한 에일린조차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눈치였으니까.
유일하게 반응한 이들은 한 커플 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순애 로맨스물 쓰는 작가 필명이 그거예요!!”
“...로맨스 소설가라고?”
다른 건 몰라도 리오스 본인은 이 필명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마탑 도서관에 자작 소설을 비치시켜주기도 하는데, 카페인 메카닉님이 그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어서 마탑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은둔고수거든요!”
“...그...그런 사람이 왜 레이널드 님과 아는 사이...”
“그치만 확실히 똑같은 걸!! 최근에 아예 출판본으로 나온 것도 필명이 똑같아! 봐봐! [여기사 아가씨의 50가지 그림자]!”
리오스는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출판본을 아메리에게 내밀었다. 출판본에는 확실히 [카페인 마스터]라는 확실한 예명이 저자 부문에 적혀있었다.
그걸 보자 아메리의 창백한 얼굴에서 차가운 땀이 잔뜩 흐른다.
“혹시... 왜 그런 사람을 만나야하는지...”
“1회차 때 장비 및 무기 조달로 서포트해주던 녀석인데 지금 만나야할 것 같아서.”
장비와 무기라는 단어에 아메리의 동공이 요동친다. 카페인 과부하라고 하기엔 전혀 다른 원인이 레오나르도에게는 보였다.
“...무, 무기! 조달이군요. 그런 거라면 부족할지라도 제가...”
“그리고 내가 걔 자식을 맡아주면서 지켜줬는데 가급적이면...”
“네!? 제가 자식을 낳아요!?”
아메리는 어떤 때보다도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리고 그 뒤로 아메리의 목소리는 물론, 자존감 또한 어떤 때보다도 작게 쪼그라들어버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한 노예의 속마음: 그 지켜준 아이가 여자애일까? 여자애면... 태어나기 전에... 주인님을 얼른...(추릅)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요새 공부하는 게 너무 빡빡해져서 몸이 못 버티겠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