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성녀라는 양반이 왜 그래. 교리에 따르면 오히려 이건 장려해야하는 행위 아냐?”
레오나르도는 앉아있는 채로 간단히 차를 마셨다.
옆에 있는 성인 루미네와 앤젤라는 그런 여유 있는 태도에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 올바른 행위이지만 ‘레이널드’에게서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행동에 자연히 질문이 나온 거였다.
“...그렇긴 하지만... 갑작스레 3일 동안 사과를 받는다고 하시니...”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 레오나르도가 시작한 일은 사과를 받는다 공개적으로 알렸다.
본래라면 흑마법을 쓴 레오는 썩 지지받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앤젤라가 등장한 시점부터 판도는 뒤집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니킥을 연타당한 갤러위드와 샤를리안은 명예 퇴직을 빙자한 퇴출을 당하고 가문 째 무너저내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차라리 직접 가서 전원...}
“상급자가 억지로 사죄하라고 시키는 게 진정성이, 의미가 있겠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도덕을 넘어 종교적으로 정론이었다.
사죄는 자발적으로 해야 의미가 있었다.
앤젤라는 단지 레오나르도의 의도가 신전의 기강을 잡아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을 뿐.
{...죄송합니다. 성직자로서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괜찮아. 사람으로서도 충분히 짧아.]
{현자는 좀 닥치십쇼!!}
어느새 나타난 현자도 레오의 이야기를 거들며 성녀를 놀렸다.
“어쨌든 자율적으로 하기로 한 거니 본인들이 알아서 하겠지.”
“...이 방식으로 괜찮을까요?”
루미네는 레오를 보며 다시 떠올린다.
신전이 와해되면서 생긴 지옥으로 바뀐 세상을.
이런 사과만으로 정말 해결되는가 본의아닌 걱정이 들었다.
“믿음으로 먹고 사는 녀석들이 왜 이리 의심이 많아. 가주는 게 지금은 도와주는 거라고. 크리스나 상태 많이 봐줘.”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됐네요. 이단한테 무슨 망발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레오나르도는 썩 적의가 없었다.
분노가 없는 태도에 두 성인은 안심하며 밖으로 나갔다. 라인하르트에 소속되지는 않았지만, 가주 권한과는 별개로 레오나르도의 판단대로 따르겠다 결심했다.
이윽고 두 명의 성인이 나가고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현자와 함께 있는 이래 이렇게 어색한 공기는 흐른 적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조차, 기억이 갓 사라진 차조차 이렇게 딱딱했던 적은 없었다.
서로를 아예 모르던 때보다 아는 게 늘어났기에 기류는 굳을 수밖에 없었다.
[...너, 성검 속... 흑아리아한테 확인했지?]
운을 먼저 뗀 건 현자였다.
외형과 어투와는 달리 그는 연장자로서 불편한 대화를 이끌 의무가 있었다.
“내 기억 말하는 거지.”
레오나르도는 현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사실 스승이라고는 하나 기억상실 이후 그와의 추억은 아예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향이나 수준이 많이 달랐다면 지금보다도 더 어색했을 것이다.
“시원치 않았어. 방법도 모르고, 있을까도 의문이라네.”
본래라면 기억이 송두리째 날아갈 것을, 성검의 힘으로 간신히 붙잡은 격이었다.
애초에 마왕과의 접촉으로 레오나르도의 기억은 전부 날아가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그러냐.]
소년의 모습임에도 현자의 표정에는 노년의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더는 미룰 여지가 없었기에 나온 체념이 쓰기만 했다.
“...그렇게 리스크가 큰 거면...”
[아니, 그렇지만은 않아.]
말리는 건 안 된다.
레오나르도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조금만 덜 오만했다면 무언가 달랐을지도 모르니까.
[당연하게 해야하는 거야. 그건 신경쓰지 말라고.]
“...내 기억인데 신경쓸 수밖에 없지 않나?”
[거참, 멋있는 대사 치는데 초를 치는구나.]
말은 그래도 레오는 한편으로 안심했다.
기억에 대한 것은 현자에게 남기면 된다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 순간, 성검에 나오는 순간 보았던 것이 머리를 스쳤다.
분명 루벤 라인하르트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노크 소리가 들리며 지긋한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있다.
“열려있습니다.”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성황은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빨리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신전을 이끄는 성직의 대표가 가장 먼저 나설 줄은 몰랐다.
“잠은 잘 자셨습니까? 제가 한 게 너무 많아서...”
뼈가 있다해도 근육과 피로 꽉 차있는 농담에 성황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레오나르도의 트라우마는 아리아스필조차 간단히 버티지 못했다. 그걸 10초나 넘게 만지고 있었으니 꿈자리가 사납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거다.
“...말씀을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저에겐 존대를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요.”
성황이 본 것은 트라우마 뿐, 미래에 대한 정보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 지옥에서나 느낄 법한 고통을 겪고도 단순히 레오가 힘든 생활을 살았다고 치부할 멍청이는 성황 자리에 오를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편하실대로.”
그렇게 말하며 레오나르도는 찻잔에 한손으로 차를 따라 성황에게 내밀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군요...”
“사과하러 왔으니 사과를 하면 되지.”
무례한 말처럼 보였지만 레오 나름으로는 성황에게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지금 성황의 표정을 보면 입이 열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어보였으니까.
“...전 주님을 믿으면서도 인간을 함부로 믿었습니다. 거기에 스스로에 대해 제대로 된 의심을 품지 않았죠.”
성황은 지금도 레오의 말이 정곡에 박히는 걸 체감했다.
자신의 믿음은 신에 대한 경배에 치중되었을 뿐, 인간에 대한 신용에 대해서는 심도를 두지 않았다.
이건 성황으로서, 지도자로서 반성해야 마땅한 문제였다.
“이런 누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성황은 레오나르도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성직자로서 이단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에게 잘못을 인정해야했고,
어른이 돼서 만든 못난 빚을 갚아주려는 청년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야했다.
“그래, 이제부터는 바뀌라고. 그럼 가봐.”
“...알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성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쪽으로 나갔다. 그런 즉각적인 수긍에 레오는 오히려 당황한 듯 되물었다.
“더 있으려고 안 하는 거야?”
자신과 대화하면 미래에 대한 정보를 얻을지도 모른다. 이는 이점을 생각지 않고도 자연히 호기심이 생기는 일일 터.
그럼에도 성황은 나가라는 말에 질문도 없이 그대로 따랐다.
“...사과는 말로서 끝나면 안 되지 않습니까. 할 수 있는 일과 할 일을 해야하는 법이죠.”
“오, 거기까지 알아냈어? 신앙으로만 성황 먹은 건 아닌가보네.”
무례한 표현처럼 보이겠지만 나름의 인정의 표현이었다.
성황은 이미 이 상담 형태의 사과에 숨겨진 본목적을 알아낸 눈치였다. 그렇게 말을 듣고자 했지만.
“...혹시 저희가, 아니 제가 가장 바뀌어야할 것은 어떤 거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성황은 스스로의 계시에 따라보았다.
가르침을 배운다는 계시에 따르었다.
“그건 스스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어. 알려줘봤자 그건 내 생각을 따라하는 거일 뿐이니까. 다만...”
이것만큼은 꼭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레오는 가장 기초적인 걸 부탁했다.
“국어는 좀 대대적으로 가르쳐. 단어 혼동이 너무 심하네.”
의심과 확인의 차이.
욕망과 의지의 차이.
믿음과 신용의 차이 등.
그런 단어의 혼동을 대대적으로 가르치면 신전은 큰 발전을 이룰 것이다.
“알겠습니다.”
성황은 진심으로 레오라는 남자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빛 하나 없는 세상에서, 어둠 속에서도 한 번도 눈을 감지 않았다.
* * *
그 날을 기점으로 사과를 하는 성직자들은 차례로 레오를 찾아왔다.
심사숙고하고는 홀로 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자 하기에는 어려워 다섯 명 정도로 묶어서 오는 경우도 있었고.
순전히 진심으로 사과하는 인물도, 흑마법를 쓴 레오를 고까워하면서도 앤젤라의 존재 때문에 반억지로 사과를 하는 이도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딱히 별 말하지 않고 그들의 사과를 받아주고 보낼 뿐이었다.
일일이 덕담 같은 걸 할만한 이유도, 시간도 없기에 나온 처사.
그런 사과와 대답의 반복이 3일 간 지속되었다.
그리고 3일이 끝나가는 새벽의 시각.
“왔냐? 생각보다 일찍 왔네.”
그 야심한 시각, 레오나르도는 루미네와 아리아스필을 불렀다.
“늦게 올... 자격은 없는 것 같아서요.”
아리아스필은 물론, 루미네까지 죄책감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사과를 받아준 것도 어찌 보면 화를 삭히고 신전의 이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일 테니까.
“...사죄 안하신 신도들은 처벌하실 건가요...?”
루미네는 이 질문이 얼마나 염치 없는지 알고 있다.
저들은 자신의 목숨을, 동료의 목숨을 지키고 광전사를 해치운 은인을 갖은 이유로 죽이려들었다.
분명 범인이 아닌 영웅조차 배신감을 느낄 상황.
감정적으로는 퇴출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인으로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처벌은 면치 못할 걸 알면서도, 같은 신도들을 구제할 도리가 있을까 염치 없이 질문이 나온다.
“아니, 전부는 아니지.”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증오나 화라고는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한 마디였다.
“이걸 보라고.”
레오나르도의 손에는 각종 서류가 정리되어있었다. 현자까지 조력하며 각 색으로 나뉘어진 집게 집혀진 서류철들이 그들의 손으로 들어간다.
“...이건...”
각 항목에 따라 성직자의 이름이 적혀있고 이름마다도 다른 표식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루미네와 아리아스필은 그 표식의 분류가 사과한 이와 하지 않은 이를 알 수 있었다.
“성황이 날 좋게 보는지 부탁하자마자 이 표들 바로 만들어서 주더라고. 10년만 젊었으면 바로 전선에 가서 써도 될 정도야.”
“...근데... 사과에 따라 분류한 게 전부가 아니네요...?”
사과는 마치 부가적인 요소인 듯. 각 항목들은 그들이 3일 동안 무얼 했는지 빼곡이 적혀있었다.
“까놓고 사과라는 게 입으로만 떠는 게 다는 아니잖아.”
당연하다 못해 올바른 정론이었다.
말로는 떠드는 사죄는 가치가 없다.
가볍다 못해 거짓보다도 못한 위선이었다.
“우선 사과를 해도 안 해도 상관없는 쪽은 마인 사냥과 각자의 임무를 수행해 성공한 이단심문관 및 성기사 사제들이야.”
“...사죄를 안 해도요?”
“말로만 사과를 표현하는 게 다가 아니잖아. 게다가 나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는 것도 성직자로서 나쁘지 않은 자세고.”
레오나르도가 필요한 인물은 자신 앞에서 아첨하는 멍청이가 아니라, 스스로의 할 일을 맞는 때에 하는 녀석들이다.
그런 녀석들은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일을 하고 지키기 마련이다.
“이 녀석들은 지원을 아끼지 마. 토벌방식이나 전투법 정리할 때도 자주 의견 확인하고. 환멸 나서 그만두거나 죽으면 진짜 아까운 녀석들이야.”
“...그럼 이분들은요?”
그 문서에는 각종 도서관 및 고문서실 출입 기록이나 여배당 사용 기록이 그려져 있었고, 나열된 인물들은 대부분 사과한 이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걔네들은 사과하고 나름의 반성을 길을 찾는 놈들, 내가 재판에서 말한 걸 흘려듣지 않고 스스로 답을 찾고자 하는 녀석들이야.”
레오나르도는 재판에서 신전의 역사를 모른다며 그들을 비판했고, 공부가 부족하며 조롱했다.
대부분 그 말에 분노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냉정해진 이들은 그 말들을 조언삼아 스스로를 성장시켰다.
“아마 이런 친구들은 치료 쪽이나 전략, 기록 분야에 일하게 시키면 좋을 거야. 항상 고민하고 생각하는 녀석들은 섬세하기 마련이거든.”
“...확실히...”
논리가 없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정확하고 논리적이여서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되는 발언이었다.
현자의 도움이 있었기에 레오도 더욱 정갈히 이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친구들은 애매한 것들, 사과도 없이 여배당이나 서고에나 처박힌 녀석들이야. 당장 인력이 부족하니까 성수하고 각종 신성 장비, 정화 작업하는데 써.”
망설이는 녀석들에게는 일을 주는 게 답이었다.
“...괜찮을까요? 고위직인 분도 있고... 시간표도 휴식 시간이 거의 없게 적혀있는데, 반발이 심할 텐데요.”
처벌이니 불만을 내서는 안 될테지만, 그러기가 어려운 게 사람의 심리였다.
그것도 높은 위치에 있는 고위 성기사나 사제라면 간단히 명령 하달이 될 리가 없었다.
{...제가 설득하면 될 문제로군요?}
[이번엔 생각이 좀 기네.]
이 업계의 최고봉이 없었다면 말이다.
앤젤라의 말 한 마디면 몇몇 성직자들은 자결까지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있으면 해악인 자식들.”
두꺼운 문서 중 가장 아래에 높여진 서류철이었다.
거기에는 사과한 인물도, 하지 않은 인물들도 고루고루 적혀있었다.
“...집회나 토론회를 만든 성직자들이네요.”
사과를 한 사람이든, 하지 않은 사람이든 각 집회와 토론회를 만든 이들은 빼곡이 적어 블랙리스트를 만들어둔 참이었다.
“안 그래도 단합해야 이길까 말까 한 적이 코앞에 있는데 이런 식으로 떠들기만 해선 도움이 전혀 안 돼.”
지금 가장 필요한 성직자는 즉각적으로 할 일을 하는 이들,
괜찮은 건 스스로의 행동에 생각을 담고 방침을 내린 이들,
그나마 받아들일 만한 건, 생각과 망설임이 많은 놈들.
그리고 가장 쓸모없는 작자들은 앞이든, 뒤든 떠들기만 하는 멍청이들이었다.
“그래도 신성은 쓸모 있으니까 역병이나 게이트가 자주 나타나는 지역에 보내버려. 오래 버티면 그 뒤에 생각해도 되고.”
이쯤 되면 아리아도, 루미네도 의문이 생긴다.
레이널드건, 레오나르도건, 보통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해야할 행동을 레오는 전혀 하지 않았으니까.
“...그게... 화는 안 나셨나요?”
“화?”
화를 내는 것, 자신을 죽이려 한 이들에게 마땅한 처벌을 주는 걸 사람들은 원하기 마련이니까.
“그...게 그렇잖아요. 실제로 죽이려 한 성직자들도 많고, 찬성한 사람들도 많은데...”
“너흰 어째 용사랑 성자라는 녀석들이 그렇게 박정해.”
레오나르도는 진심으로 박정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올곧았기에 타인의 허물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을 뿐.
그게 좋은 환경에 있는 강자일수록 더더욱 말이다.
“사과를 받아주면 저 새끼들은 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잖아. 언제까지고 잘못에 물고 늘어지면 끝이 없어.”
레오나르도는 위선을 경멸했다.
안전한 환경에서 몸을 보신하며 동정하는 선의가 역겹기만 했다.
“게다가 아예 사과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상황이 오면 어떡할 건데?”
하지만 막상 세상의 모든 위선이 사라지자 레오나르도는 진짜 지옥이 어떤 것인지를 체감한다.
잘못을 했음에도 그걸 감싸주는 것도 위선, 반성하는 것도 위선이 되어버리니.
욕망만이 들끓는 지옥도가 펼쳐진 것이다.
“두들겨 패는 것도 취향이긴 하지만, 지금은 반성하고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게 이득이지.”
합리적으로 생각해도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이들은 귀중한 자원이었다.
속물적으로 말해 생수에 신성을 넣은 것만으로 치료에 도움이 되는 성수가 만들어지는 것부터가 창조경제였으니까.
“게다가 신전 소속에선 나온 비율이 1할도체 안 돼.”
“...그게 정말인가요?!”
“대부분 자살만 하거든. 끔찍하게 보이겠지만 의외로 그것도 깔끔한 거지.”
신성을 쓴다는 시점에서 신앙은 거짓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광전사이나 자신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닌 이상, 믿음이 없으면 신성력은 어떻게 해서도 나오지 않는다.
“괜...찮으신가요? 그래도 배신감이...”
“...이 정도는 배신의 축에도 안 들어.”
게다가 이정도면 레오나르도에겐 귀여운 수준에 불과했던 것도 한몫했다.
“아무리 구해줘도, 도와줘도, 하물며 대신 화살받이가 되어줘도 고마워하지 않는 인간들이 넘쳐나는 시대가 있을 거야.”
레오에겐 과거였으나, 저들에겐 미래가 될 수 있는 시간대.
“은혜를 갚는 게 멍청하고, 은혜를 주는 게 위선이라 조롱당하는 게 일상이 되는 시대가 올 수도 있어.”
그게 레오나르도가 살아남은 지옥의 원흉이었다.
“그걸 막는 게 신전의 역할이야.”
마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건 신전이 와해된 뒤였다. 폭주하던 마탑을 올곧게 견제할 수 있는 건 신전 뿐이니까.
“...게다가 너희들은 떠먹여주면 씹고 삼키려는 노력은 하잖아?”
침울하는 두 영웅을 바라보며 레오는 피식 웃음을 내었다.
영웅이란 녀석들이 아직 실패하지도 않았는데 실패자 같은 얼굴을 지어서야 쓰나.
“변화하는 있다는 시점에서 성장하고 있는 거야.”
강한 자가 꼭 살아남는 건 아니다.
살아남는 자는 분명 강한 자이다.
그리고
“제대로 변하면 살아남을 수 있겠지.”
변하는 자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거다. 언제나는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레오 유니버스]
“게다가 정말 답없는 것들은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하고 상황을 무시하거든.”
“...그렇긴 하죠. 어찌 되든 정신적 도피만큼 이기적인 건 없으니까요.”
레오나르도는 약간 말에 심취했는지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어떻게든 눈치를 줘도 말을 이해 못하는 척하고, 행동으로 표현해도 모르쇠로 일관하면 진짜 죽여버리고 싶거든.”
그 말에 현자와 성녀가 가늘게 레오나르도를 보았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사랑에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뿐일까, 대놓고 말을 해도 이것저것 변명이나 늘어놓으면서 회피하면 더 답이 없어요.”
‘레’로 시작하고 ‘도’로 끝나는 남자가 항상 ‘아’로 시작해 ‘필’로 끝나는 여성의 마음을 그렇게 대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다들 진실을 알고 있는데도 혼자서 아니라고, 안 된다면서 고집 피우면 진짜 죽여버리는 게 답이기도 해.”
루미네마저 눈치를 보는 와중, 아리아스필만이 미소를 지으면서 레오나르도를 바라보았다.
다른 때보다도 부드럽고 자애로운 미소였다.
“그래도 전 그런 사람마저 중요하다면 끝까지 설득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너만 고생이다. 아주...”
“도망치면 붙잡아서라도 계속 씹어서 입을 벌려서 넣으면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지 않겠어요?”
레오나르도는 그런 아리아스필을 보며 짐짓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드디어 독해졌구만. 봐줄 만하다. 칭찬해줄게.”
다들 아는데 본인만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