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나는 감각에 따라 따스한 빛이 몸을 감싼다.
넘실거리는 햇빛 아래에 갓 잠에 든 듯한 감각.
“■■, 일어나.”
■■?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지. 내 이름은 레오...
“왜요? 현자님? 오늘은 쉬어도 되는 날이잖아요.”
생각이 진행되기 전에 ■■은 대답했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것처럼 자동적으로 움직인다.
어째서인지 눈앞의 노인이 현자라는 것도 알 수 있었고, 앤젤라의 태도가 평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는데! 저 광신도 때문에 못 쉬겠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전 단지 저번에 변신했던 소년 형태를 관찰하고 싶은 겁니다. 좀 더 연구하면 전력으로 쓰기 좋지 않겠습니까? 저번에 서큐버스 퀸들을 그 모습으로 기습했던 것처럼요.”
“내 마법 업계 탑인데 뭐가 더 연구가 필요해?! 내가 알려준다고 할 때 제대로 배우든가! 지금은 좀 쉬자!”
“그럼 휴식의 의미로 보여주십시오!”
“뭔 헛소리야! 내가 노망났냐?!”
두 분은 여전히 티격태격하면서도 사이가 좋았다. 다만 서로 속감정을 전혀 이해 못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두 분 정말 좋은 분이신데 성향이 정 반대여서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어떻게 보면 나보다도 죽이 잘 맞는 사람들인데.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오늘은 쉬는 날이잖아요.”
“그래! ■■ 말대로지! 변태여도 성녀인 네가 용사 말이 밥으로 보이지는 않겠지?!”
“누가 변태입니까!? ■■ 용사님도 제가 변태라고 생각되십니까?”
대답하기 참으로 난해한 논쟁이여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재밌긴 하지만 계속 두면 양쪽 둘 다 삐질 테니까 적당히 타협점을 만들어줘야겠다.
“그럼 현자님 한번만 보여주세요. 앤젤라 님께서 개인적인 부탁을 자주 하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 내가 가르칠 때 누누이 말했지. 호의가 계속 되면 호구가 될...”
“아침 예배에서 빼내드릴게요. 성황님께 말씀드려서요.”
“쪼잔하게 한번이 뭐냐, 오늘 하루 풀코스로도 가능합니다.”
현자님께서 자주 투덜거리셔서 성황님께는 언질은 해둔 상태였다. 이거랑 엮으면 두 분 다 설득할 수 있겠지.
“하지만 용사님, 현자에겐 부족한 인성이...”
“어차피 신성의 연구는 끝나서 현자님도 제대로 설교도 안 들을 거예요. 요즘 자주 눈 뜨신 채로 주무시던대요? 유체이탈로 몸만 두고 가는 법을 연구할 수도 있잖아요.”
우연일까, 현자가 뜨끔한 걸로 보였다.
우연이겠지.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알았다고.(알겠어요.)”
루벤 용사님.
루벤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어째서지? 이 이름이 낯설지 않다.
분명 내 이름은 아니고, 다른 사람의 호칭임을 알고 있음에도 날 부르는 것 같다.
[루벤?]
눈앞에 루벤 라인하르트가 서있다.
하늘에 내리는 백발, 눈에 따라 거울처럼 모습이 비칠 정도의 푸른 눈동자.
아리아스필이 만약 남자로 태어났다면 저런 외모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의 미남이었다.
[고마워.]
순수한 감사였다. 백전노장에 마왕까지 잡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깨끗한 미소.
하지만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순수는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게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된다. 알면 알수록 인간은 순수에서 멀어진다.
그게 인간과 지식의 근본이니까.
[그리고 미안해.]
루벤은 혼란스러워하는 레오의 몸을 안았다. 아리아가 아닌 이상 불쾌할 상황임에도 어째서인지 레오에게는 거부감조차 들지 않았다.
[외로운 너에게 고독한 싸움을 쥐어줄 수밖에 없구나.]
다만, 이 한 마디는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용사라는 작자들은 동정이 특성이냐. 왜 가만히 있는 사람 기분 거지처럼 만들지.”
자신은 고작 이런 걸 위해 싸워온 게 아니다.
[...역시 닮았네.]
레오의 분노에도 용사는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듯 겸허히.
[그럼 기억해줘. 네가 어떻게 싸우는지만이 아니라 어째서 싸우기 시작했는지를.]
이윽고 루벤은 하나의 빛이 된다. 척박하고 검은 대지에 온기를 주듯 따스하게.
[처음을 기억해줘.]
사라진다.
“...루벤...”
이윽고 레오나르도는 일어난다.
아리아스필도 일어났다.
하지만 동시에 일어났음에도 대우는 확실히 달랐다.
“...설명하는 게 좋을 거다.”
에일린을 포함한 마도 처형자는 물론, 마찰이 있는 성기사와 왕실 기사마저 레오에게 날을 세우고 있다.
몇몇 병사들은 실제로 레오의 목에 칼을 겨누고자 했다. 라인하르트와 레오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검을 맞대어 막지 않는다면 분명 목 직전까지 날이 대어졌을 거다.
“이 상황 중 하나라도 설명해야... 널 다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니 부탁이다. 레오나르도.”
레오나르도는 유독 에일린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행동은 당연히 해낼 천하의 에일린이 마치 울면서 사약을 받들 듯 울상을 드러내었다.
이윽고 그 표정은 아리아스필도 지었다.
지금 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 본인이 지금 그렇게 만들 것이다.
* * *
상황은 레오나르도와 아리아스필 두 사람 이 기상하기 전부터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마왕 토벌은 물론 마인과의 전쟁에서 이미 그 둘은 빠져서는 안 되는 중진들이었다.
게다가 레오나르도의 행동들은 결코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은 물론 광전사에 대한 약점 파악, 유령 현자의 등장와 소멸.
이것만으로 몇몇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이 이상이 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거기에 가장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분명 그건 흑마법이었습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기사가 왜 그러겠는가!”
첫 번째는 레오나르도의 흑마법 사용이었다.
여태까지 전례까지 없는 형태에 술식이었지만 성기사들은 가장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흑마법의 마기에 가장 빠르게 반응하는 이들은 신성을 지닌 성기사들 뿐이었다.
마도 처형자들도 레오나르도를 감싸기는 하고 있지만 알고 있었다. 애초에 흑마법에 대한 판별법은 레오나르도가 알려준 방식으로 철저히 교육되었으니까.
황실은 중립을 유지할지언정 레오나르도에 대한 경계를 낮추지 않았다.
라인하르트는 최선을 다해 레오나르도를 변호할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을 쓴 영문도 모르고, 지금 레오나르도의 상태도 몰랐지만 지금은 신뢰해야했다.
“그 흑마법으로 저 괴물을 쓰러뜨렸잖습니까! 분명 이유가 있을...!”
“용사님이 저 이단에게 기습당해 기절했습니다!! 친족이 당하고도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까!”
그 말에 중상을 입은 채로 레오나르도를 지키는 라인하르트들이 흔들린다.
신뢰한다 할지라도 가족인 아리아스필이 레오의 공격에 의해 당했다. 죽지는 않았어도 죽기 직전까지 몰아간 완벽한 기습이었다.
차라리 레오나르도 본인이 깨어나있었다면 확인이라도 하겠으나, 레오도 지금 마찬가지로 빈사인 상태.
하물며 레오의 본인 의지가 아니더라도 마왕에게 몸을 조종당했을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현자도 없어지다니... 제가 나서기엔 아직...’}
앤젤라는 사라진 현자를 보며 레오를 바라보았다. 지금 자신이 나선다면 이 상황 자체는 무마할 수 있겠지만, 논리적인 해결은 되지 못한다.
결국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현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성녀가 망설이는 사이, 후계자인 성자는 망설이지 않고 레오나르도와 아리아스필에게 다가갔다.
지금 하는 언쟁 때문에 치료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저대로 가면 상태의 호전은 늦어질 뿐이다.
“안 됩니다! 성자님! 용사님이면 몰라도 레오 저 자는...”
“말조심하시죠. 레오나르도 기사님께 격조를 지키세요. 어찌되었든 적을 섬멸하기 위해 희생하신 분입니다.”
루미네는 다른 때와 달리 차가운 눈으로 그 성기사를 바라보았다. 결국 이 상황의 내막을 알기 위해선 본인들을 치료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자는 이단...!”
“제 계시는 ‘낫게 하라’였습니다. 지금 성기사인 제임스 경께서 저에게 신의 계시에 거역하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성기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마저 언쟁을 멈추었다. 어쩌면 지금 가장 냉정한 판단을 하는 건 루미네일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망설이고 연명시키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두 사람을 구하는 게 올바른 길이었다.
“전 눈앞의 환자를 가만히 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루미네의 행동은 또다른 결과를 내온다.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레오나르도에게 신성의 치유가 먹혀들어가는 게 모든 이에게 보였다.
마인, 악마, 흑마법사조차 신성력은 치유가 독으로서 작용한다. 지금 성인의 가장 짙은 신성으로 치료받고 있는 레오는 고통스러워하긴커녕 몸에 혈색이 돋고 있었다.
눈을 먼저 뜬 건 아리아스필이었다.
“...레...레오!”
일어나자마자 레오를 찾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 그대로라는 걸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아리아! 괜찮니?!”
가주 글라디오는 체통조차 잊은 채로 아리아스필을 껴안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딸아이가 다시 눈을 뜬 것에 신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전 괜찮아요...! 그보다 레오가...!”
아리아스필은 그런 아버지의 걱정보다 레오나르도가 신경쓰였다. 패륜적으로 보일 수 있었겠지만 성검 내부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확인해야만 하는 문제였다.
“용사님! 레오나르도 이 이단은 용사님을 시해하려고...!”
“모르면 닥치고 있어요! 죽인 게 아니라 성검 때문에 일시적으로 가사 상태에 빠뜨리려고 한 거라고요!”
용사의 증언 한 마디에 이 언쟁이 한번에 종식되었다.
특히나 이단과 흑마법에 있어 극단적인 행동을 내보인 신전 측은 용사의 성에 그대로 쥐죽은 듯 조용히 있었다.
아리아스필 본인이 아무리 레오나르도를 사랑하고 신뢰할지언정 자신을 살해하려는 적을 감싸는 얼간이는 아니었다.
흑마법을 썼을지언정 레오나르도 본인이 적이 아니라는 건 증명된 거다.
“...루벤...”
레오나르도가 일어났다. 안색 자체는 많이 안 좋았지만, 루미네 덕에 고비는 넘길 수 있었다.
“...하아하아...”
루미네는 지쳐서 숨도 못 쉬는 상태가 무엇인지 이해했다.
만약 레오가 자신에게 소실된 신체를 복구하는 치료를 훈련시키지 않았더라면 그 전에 루미네가 탈진해 죽는 사람은 곱절로 늘었을 것이다.
“...설명하는 게 좋을 거다.”
에일린을 포함한 마도 처형자는 물론, 마찰이 있는 성기사와 왕실 기사마저 레오를 경계했다.
사정이 있다한들 흑마법을 쓴 것은 사실, 그것에 대한 진위 여부를 가릴 때까지는 경계를 늦추지 않을 책임이 있었다.
“이 상황 중 하나라도 설명해야... 널 다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러니 부탁이다. 레오나르도.”
에일린은 자신의 가슴이 미여지는 걸 체감했다. 자신의 있는 영역까지 이해해주던 이해자가 어쩌면 타락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이미 적탑주가 그 예시지 않은가.
“...대답하면 믿어는 줄건가?”
“자신이 어떤 입장인지는 아나? 흑마법을 쓴 건 모든 법률에서 위반되는 사항이다.”
왕국 기사단장은 그리 말하며 레오가 있는 방향으로 칼을 겨누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확인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진정하게. 기사단장, 레오나르도 마법사는 날 구해준 은인...”
“황자님, 이건 신전 전체가 발칵 뒤집어질 문제입니다! 용사의 전속 기사가 흑마법을 쓰다니요!”
레오나르도는 대답을 내놓지도 않았음에도 자신들끼리 떠들기 바빴다.
그나마 라인하르트와 마도 처형자는 레오나르도의 은덕 때문인지 평소와 같이 압박적인 문책을 할 수 없었다.
“...하...”
레오나르도는 기가 찬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래서야 답이 없을 만도 하다.
“그럼 잡아넣어. 체포해.”
그러니 차라리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뭐...?”
모두가 당황했다.
서로 언쟁하던 집단들이 이런 식으로 통일되다니, 코미디라면 기립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다.
“어차피 너희 모두 마인 및 흑마법사 처리에 대한 법률은 1조항이 사형이잖아. 과정은 약간 달라도 모두 끝은 사형이지.”
“...잠깐... 그 말은...”
“흑마법 썼어. 너희들도 모를 만큼 아주 최상급의 흑마법을 썼지.”
그 말에 라인하르트의 모든 사람을 포함해 레오나르도와 연이 있는 자들의 표정이 굳어진다.
지금 레오 본인의 어떤 말은 한 건지 납득도 할 수 없는데 이해해버렸으니까.
“그게 무슨...! 레오나르...”
“참고로 쓸 수 있는 요인은 내가 마왕의 그릇이기 때문이야. 마왕 본인은 아니지만 마왕이 내 몸을 차지하면 아마 지금 건 소꿉장난으로 보일 걸?”
아리아스필마저 당황해하며 절망에 빠진다.
분명 성검에서 레오나르도는 다시 만나겠다했다. 검은 갑주를 입은 용사에게 다시 만나겠다 약속했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 태도는 마치.
“...아니...! 왜...! 왜 갑자기...! 지금 죽으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광전사에게도 내보이지 않은 시선이 들어온다.
레오의 눈빛은 닿는 것만으로 석화시키듯 몸은 긴장하게 만드는 분노와 살기가 담겨있었다.
“그럼 너희들은 왜 나만 따돌리고 이딴 병신짓거리나 했냐?”
충분히 화날 만한 문제였으니까.
“준비한 훈련도 덜 끝났지, 적에 대한 정보 파악도 거지 같지, 대응 방식도 고리타분하고. 참 사람 암 걸리게 만들려고 골고루 엿을 먹이네.”
레오나르도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었다.
“네가 너흴 도와준 건, 만약 그 식충이 새끼한테 이 자리에 있는 전원 먹혔으면 나도 답이 없어서 살려준 거라고. 이 답없는 것들아.”
분노할 권리가 2회차 시작부터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흐르자 레오나르도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신전 쪽 측들 노려보았다.
“너희들, 어줍지 않게 생각하지 말고 얼른 잡아가기나 해. 어차피 너희 재판에서 얼른 이단으로 낙인 찍고 사형 선고 시키고 싶어서 안달 난 것 같은데.”
“네놈...!”
레오나르도는 저들의 눈빛이 같잖기만 하다.
“참고로 날 죽이려면 창의력을 많이 발휘해야할 거야. 신전 쪽에는 10번 사형 실행에 실패하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면서 멋대로 사형 중지까지 하는 미친법이 있잖아.”
모욕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저들의 표정을 보고 그게 아직 남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개근 사형수 어둑시니의 존재로 없어진 법률이 아직 남아있는지 확인해야 도박이 재밌는지 않은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최근에 염좌가 심해져서 집중이 잘 안 되는군요.
참고로 레오나르도는 정말 갖은 살해 방식을 경험해봤습니다.
안 해본 건 복상사 뿐이지만, 그것도 극복해낼 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