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일탈이 있던 날 밤은 의외로 조용히 지나갔다.
만일 레오마저 이성을 잃어버렸다면 그날 더한 일이 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하...”
레오나르도는 이미 다른 의미로 이성이 나가버린 지 오래였다. 만취했음에도 밤부터 아침까지 바깥으로 나와 고역스러운 사색에 잠겼다.
아리아는 이런 레오의 심정도 모른 채로 숙취에 따라 곤히 늦잠을 자고 있었다.
[아침부터 왜 그러는데? 기껏 자리까지 비켜줬구만.]
그런 레오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자 현자는 기가 찬다는 듯 가자미눈을 뜬 채로 경멸했다.
자신이 (아인에게 끌려갔지만) 기껏 밤에 자리까지 비켜줬음에도 레오는 거사는 고사하고 좌절에 빠진 표정마저 짓고 있었으니까.
[어제 하다가 안 서기로 하도...]
“아가리 좀 닥쳐라. 아인이 부르기 전에.”
[말하는 본새하곤...]
예의는 말아먹은 수준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레오는 지금 현자의 저질 농담에 어울려줄 만큼 인내심이 남아있지 않았다.
[레오가 흘린 머리카락이나 버린 손톱을 모으고 있었어요...]
아리아스필이 분명 그렇게 말했다.
[레오가 어렸을 때 사진부터 다른 사진들까지 베개에 넣어서 몽정하는 꿈도 꿨어요...]
자기 자신의 욕망을 취한 상태 그대로.
[레오 아기즙을 마구마구 빨아먹었어요오오...!!]
자신의 음탕하고 음슴한 성욕을 폭로해버렸다.
그걸 이해하고 납득하는데에만 꼭두새벽이 넘게 걸렸다.
‘...아리아가 나한테? 나한테 그랬다는 거야?’
아직도 레오나르도에겐 마치 구름이 솜사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수준의 헛소리로밖에 안 느껴졌다.
상대는 용사인 아리아스필, 1회차에는 많은 인명을 구했음에도 냉혈의 기사라 불리기도 했던 아리아스필이란 말이다.
그런 아리아가 그런 외설을 했다는 것 자체가 레오에겐 공상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말이 되나?”
[뭐가 말인데? 말 좀 해. 혼자 중얼거리지 말고.]
레오는 현자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모습은 소년일지라도, 머리는 자신보다 몇 배는 늙은 현인.
2회차 때 배후령으로 존재했던 그라면 이 일에 대해 무언가 알 수도 있으니까.
[해보니까 별로여서 섹스에 대한 거부감이...]
“아가리 여물어. 미친 놈아.”
상담은 고사하고 이런 작자가 어떻게 현자라고 불리운 건지 레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었다.
“레이널드 님!”
“일찍 기다리고 계시군요.”
“괜찮으신가요? 아침도 거르시고... 안색이 창백하신데...”
레오가 홀로 고민을 삭이는 사이, 심화 학습을 받을 세 명의 학생들이 이곳으로 걸어왔다.
“리오스, 크리스, 루미네.”
고민으로 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는 레오는 고개를 든 채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차라리 이쪽한테 묻는 게 최선이었다.
“너희들을 부른 이유 알아?”
본론을 꺼내기 전에 레오는 대화의 물꼬를 틀기 위해 의례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당장 아리아에 대해서 물어보면 분명 부자연스러울 테니까.
“...레이널드 님께서 부르셨잖아요. 저희에겐 특별 훈련이 있다고요.”
리오스, 크리스, 루미네, 이 셋은 레오나르도가 전문 훈련을 시키기 위해 아침부터 일찍 소집한 인물들이었다.
“흠... 굳이 특징이라고 한다면 젊은 축에 속한다는 점 정도일까. 난 많이 애매하긴 하다만...”
이 자리에 있는 셋 모두 신세대에 속하는 인물들, 크리스는 30대 후반의 끝자락에 향한 나이였지만 마르켄이나 글라디오에 비하면 젊은 편에 속했다.
“그래, 맞아. 너희들은 그만큼 단시간에 성장시키기 좋아.”
경험과 연륜이 많은 것은 이점이 되어주지만 한편으론 단점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를 형성시킨 틀은 족쇄가 되어버리고는 하니까.
“그중에서 너흰 단점을 극복하고 장점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점들이 명확해. 그것도 내가 가지고 있는 방식 중에서 말이야.”
“...근데 그렇다면 이미 알려주셔도 이상할 게 없을 텐데...”
루미네의 지적은 타당했다. 그렇게 되면 경험이 더 많은 레오나르도가 알려줘야 정상적이지 않은가.
“그건 보면 알 거야. 근데.”
저들에게 의문이 생기자 레오나르도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흥정을 준비했다.
지금 이렇게 된다면 분명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대신 너희들 알고 있는 거 좀 말해줘야겠어.”
“...예?”
일행들은 일제히 당황스러운 듯 레오를 바라보았다. 머리에는 약간의 식은땀이 흐르며 숨이 흐트러진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들키지 않았다.
‘어디까지 들킨 거지?’
레오나르도에겐 기밀로 한 채 적진에게 공습하다는 작전이 어디부터 들킨 건지 저들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내었다.
성녀도, 현자조차 이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리아스필이 어쩌다 말한 건데 그거에 관한 거야. 성심성의껏 답해달라고.”
아리아스필이라는 이름에 그들은 이미 체념했다. 아리아가 말했다는 점에서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것이었다.
{‘...역시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했군요... 하지만 이래선...’}
[‘아리아가 다 말했구만... 젠장, 끝났네...’]
지금 할 수 있는 건 설명할 방식이나 변명거리를 생각해내는 것 뿐이었다.
이윽고 레오나르도는 입을 열었다.
“아리아가... 나 좋아하는 것 같아?”
정적
말그대로 정적이 흘렀다.
이미 전부 알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새삼 그들은 지나치게 새삼스러워도 말문이 막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걸 여태까지 왜 몰랐는데 병신아.]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 현자의 한 마디는 박하처럼 상쾌하게 저들의 답답함을 뚫어내주었다.
* * *
레오나르도가 아리아스필의 감정에 둔감한 건 단지 미래라는 지옥을 버텼기만이 아니었다.
확실히 미래에선 사랑이라는 부드럽고 상냥한 감정은 무의미했고, 레오에겐 생기도 없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그 원인만이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그렇잖아! 그때 아리아스필은 누가 봐도 냉혈한이었다고!”
레오나르도의 인식 속에선 아리아스필의 완벽주의적인 얼음의 여왕, 그 편견이 이런 상황을 초래시켰다.
[그리고 넌 누가 봐도 고자지.]
“아가리 닥쳐!! 안 그래도 미칠 것 같다고!”
현자의 독설에 레오나르도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진짜 자신이 둔감해서 이 상황을 초래한 것 같은 기분이 드니 흥분은 더욱 극심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일까요...? 같은 아리아고 아리아도 사람인데...”
리오스는 아리아의 사랑을 직간접적으로 확인하고 관람한 순애의 수호자로서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레오를 사랑하지 않는 아리아는 신성이 없는 성검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솔직히 냉혈한이라고 해도 상냥한 녀석이긴 했지.”
그저 냉혹한 기사였다면 레오는 그렇게 아리아스필이라는 여자이자 호적수에게 미련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말도 안 된다고!!”
머리카락과 손톱 수집부터 사진으로 몽정하고 거기에...
‘...내 걸 빨았다고오...?!’
이건 상냥한 수준이 아니라 음탕한 거잖나.
이런 아리아도 물론 좋지만, 납득은 도저히 되지 않는 레오였다. 차라리 술기운에 횡설수설했다고 믿고 싶었다.
{사랑을 그렇게 거부하는 건 잔인하군요. 현자의 제자여서 그런가요?}
성녀를 포함한 일행들로서는 레오가 그저 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민반응을 내보이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해는 됩니다. 수십 년을 보지 못했고, 시간과 차원을 넘어 재회한 사람이 이런 감정을 지닌 것을 가볍게 납득할 순 없겠죠.”
크리스는 그 중에서 그나마 레오의 감정을 이해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저 좌시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야 용병 때의 실수가 또다시 반복될 뿐입니다.”
물론 지금 레오의 저질스러운 혼란과는 몹시 동떨어진 크리스의 공상이었지만 말이다.
“...용병 때?”
그런 연극과도 같은 발언에 레오나르도는 무슨 소리라는 듯이 되물었다. 평소 크리스가 했던 헛소리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예, 용병 때 용병단에서 있었던 일... 아...”
크리스는 그때 레오가 한 첫사랑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드렸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상황에선 그 이야기가 회귀 전 일을 은유한 것이란 걸 알겠지만.
크리스는 그런 방향에선 의외로 눈치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다.
“뭔소리야? 난 용병 땐 혼자서 일했는데?”
“...예? 그럼 용병단의 선배는... 아...”
그제서야 크리스는 뒤늦게 이해할 수 있었다.
“...성결해라...”
“리오스 님, 코피! 코피가!!”
이미 알고 있었던 리오스는 순애의 신이 증명해낸 진정한 신화에 감동의 코피를 흘렸고, 루미네는 가장 하찮은 출혈에 경악하기 바빴다.
“...대단하시군요. 정말...”
크리스는 늦게나마 100년 단위의 지조를 지켜낸 남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니들 아까부터 뭐하는데!?!”
물론 레오 본인은 전혀 이해 못할 기행의 향연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시간 없으니까 빨리 요약해! 차라리 이렇게 하고 본인한테 확인하는 게 빠르겠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은 거수제였다.
“아리아가 날 이성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일제히 울리며 인간 3명, 망령 2명의 만장일치의 찬성 거수가 나왔다.
“...아닌 사람?”
[묻는 게 의미 있냐?]
현자의 지적대로 만장일치에서 반대표는 셀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저런 완벽한 통일이 나올 거라고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이쯤 되면 네 성관념에 문제가 있는 거야. 아니면 기능적인 문제...]
“아, 아가리 닥치고...! 훈련이나 시작하자.”
어설프게 욕설을 뱉으며 레오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훈련을 급하게 시작시켰다. 당연하게도 아무도 그걸 자연스럽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 그럼 어떤 훈련을 할 건가요?”
루미네는 그나마 레오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장단을 맞춰주었다.
“이거 하나로 요약할 수 있지.”
그렇게 말하며 레오나르도는 단검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검에는 오러와 신성이 주입되며 이내 공중으로 부양되었다.
“...무슨... 마법이...!”
“마법은 못 쓸 테고...”
“신성술은 아니예요...”
여기서 놀라느냐고 놀리듯 단검을 공중에서 회전시켜 이내 손목을 베게 만들었다.
촤악...!!
손목에선 피가 솟구치며 혈액이 흘러내렸다. 갑작스러운 자해에 모두가 경악스럽게 레오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하지만 놀란 게 무색하게 손목의 피 일부는 당시 혈관으로 되돌아가며 신성의 힘으로 재생되었다.
“자, 여기에 내가 가르칠 게 전부 담겨있어.”
“...네...? 그 행위에 의미가...”
“...그냥 부끄러워서 자해를 한 줄...”
“흠... 알겠군.”
다른 건 몰라도 전투에 한해서는 눈치가 빠른 크리스티나였다. 그녀는 양손에 팔짱을 끼며 자신의 전투적인 센스를 끌어냈다.
“만약 리오스가 혈액을 고유 마법으로 통제하고, 루미네 사제님이 스스로를 치료하며, 내가 검을 부양시키는 기술을 습득한다면 어떻겠나?”
“...아...!”
“확실히...!”
성혈투술의 마법적 응용, 동방의 어기어검, 신성의 자체적 회복술.
그 기술을 습득하는 것으로 이 셋의 전략적인 이점은 장점은 극대화되고, 단점은 극복할 수 있다.
그야말로 진화라고 해도 무방할 발전.
“오, 역시 흑암. 뭔가 다르긴 다르구만.”
“라인하르트의 사자는 항상 발전을 멈추지 말아야하니까요. 부족한 점을 항상 인정하고 발전해야합니다. 미래에 찾아올 실수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요.”
“음... 브라보.”
장황한 연설이었지만 의도 자체는 좋았기에 레오나르도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저런 대사를 칠 때 초를 치면 항상 마음의 상처를 받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레이널드 님도 한 마리의 사자로서 언젠간 안정된 마음으로 아리아를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리아와 당신은 잘 어울리는 사자들이니까요.”
하지만 이건 약간 선을 넘었다.
안 그래도 화제를 돌리려고 했는데, 그 주제로 다시 기름통을 던진 건 가볍게 넘어갈 수 없었다.
“음... 그러고 보니 흑암, 내가 사자에 대한 비밀을 하나 알고 있는데. 지금 말해줄게.”
“...예?”
그 한 마디에 크리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오한이 드는 걸 체감했다.
분명 예전에도 이런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던 순정과 낭만은 유리가 깨지듯 산산이 부서졌다.
“아, 안 듣겠습니다!! 절대로요!!”
의지표명을 위해 크리스는 아예 귀를 양손으로 막아버렸다. 그런 귀여운 발버둥이 재밌다는 듯 레오는 자신의 손가락에 흘려버린 피를 묻혔다.
“...저기 레이널드...님...?”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팔에 빠르게 간결하게 사자의 진실을 적어놓았다.
그 진실은,
[사자는 동성애를 하는 몇 안 되는 동물임. 게이 섹스하는 거 내가 봤음.]
“끄아아아앙!!”
크리스의 마지막 순정은 가루로 깨부서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담]
“근데 레이널드 님, 그럼 아리아스필 님은 연애적인 일이나 소문이 전혀 없었나요?”
훈련 도중이었지만 순애의 수호자인 리오스로서는 그런 의문을 전혀 참을 수 없었다.
라인하르트 가의 영애에 용사라면 당연히 그런 일이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든 것이었다.
“아니, 있는데?”
레오나르도는 태연히 긍정하며 한 사람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루미네 너랑.”
“...네... 네!?”
레오의 평온한 사실 고백에 일행들이 모두 경악했다. 크리스도, 리오스도, 성녀와 현자마저 루미네를 노려보았다.
“...그게... 그게 무슨...!”
“까놓고 대중들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어. 나도 그랬고.”
레오마저 그렇게 생각했다는 점에 모두가 또다시 경악스레 바라보았다.
“그렇잖아. 여자 용사에 남자 성자! 그리고 실제로도 사이도 좋았고! 그럼 분위기가 딱 나오잖아!”
어째서인지 1회차의 아리아가 불쌍해지는 순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차고 짜게 식었다.
“그래서 내가 자리도 내주고, 비켜주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누가 봐도 그때에는 너희 둘이...!”
루미네는 여태까지 욕설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적어도 머릿속으로는 생각할지언정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게 사제이자 성인의 자세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오늘.
“뭔 개소리세요. 레오 병신님.”
루미네는 처음으로 육두문자를 사용했다.
그리고 레오를 뺀 아무도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그만큼 레오는 개소리를 했고 병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