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는 동방에서 라인하르트로 돌아올 때 작은 소원이 있었다.
가장 큰 목표는 결투에서 처음으로 승리하는 것이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일상적인 의미의 바램은 있었다.
성인 된 후 술을 한 잔 기울이는 것.
어렸을 때 가끔 했던 말이자 약속을 본인을 위해서라도 지키고 싶었다.
“레오.”
그래, 분명 그랬다.
“어... 어어.”
“왜 그래애...?”
아리아스필이 취하기 전까지는.
분명 코끼리도 기절할 마비독에 맞아도 끄떡없던 그녀일 텐데.
고작 위스키 한두 잔에 아리아스필은 반쯤 인사불성이 되었다.
“왜고... 뭐고 할게 있어? 그냥 뭐...”
레오는 취한 아리아를 대하는 게 머쓱했는지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술잔만 홀짝였다.
사실 눈을 둘 곳이 없었다.
흰 원피스 잠옷에 비치는 살결이 분홍빛으로 곱게 물들고, 그런 잘 익은 속살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녀의 옷끈은 천천히 흘러내렸으니까.
“...에헤헤... 레오도 얼굴 빨개...”
아리아는 그런 레오의 심정도 몰랐는지 빨개진 얼굴을 보며 키득거렸다. 그런 맥없는 웃음조차 레오에겐 맑고 깨끗한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너만 하겠어.”
그런 감정을 부끄러웠는지 레오는 일부러 퉁명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만약 여기서 잘못하면 이 자리에서 사단이 터질 수도 있었다.
“...레오 마니... 화나써...?”
틱틱대는 태도에 아리아는 움츠러든 기색으로 레오의 심기를 살폈다.
취기에 따라 발음이 뭉그러지고 혀가 꼬부라지는 것은 남성의 보호와 파괴 본능을 자극했다.
“아니면... 레오 힘드러...?”
“딱히 안 화났어. 그다지 힘들지도 않고.”
못 이기겠다는 듯 레오는 호칭에도 신경쓰지 않고 아리아를 다독여주었다.
평소에는 전투병기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용사가 저렇게 귀여운 소동물처럼 애교를 부리면 누구라도 마음이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 떽!”
안심시켜주는 말에 아리아는 그렇게 외치며 볼을 부풀렸다. 술기운에 모든 감각이 둔해졌음에도 아리아는 레오의 말에서 거짓을 찾아낼 수 있었다.
“...거짓말이라니 난...”
“레오는 힘들 때면... 항상 그러니까...”
아리아는 취했음에도 똑똑히 기억했다.
레오는 항상 힘들 때면 슬픈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하는 걸.
레오가 겪어왔던 점의 반의 반도 느끼지 못했지만 알 수 있다.
그건 절대 아물 수 없는 상처들이었다.
“...그래, 사실 안 괜찮아.”
아리아에 추궁에 레오나르도는 못 이기겠다는 듯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세상 어떤 남자가 그렇게 가슴팍 내민 여자를 보고 괜찮겠냐?”
아리아를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 레오는 아리아의 드러난 가슴골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당황하면 화제를 돌릴 수도 있을 테면, 운만 따라준다면 술도 깰 수도 있을 거다.
“...그럼 더 볼래?”
하지만 아리아의 대답은 상상 이상이었다.
“푸흡...! 뭐?!”
입에서 술이 뿜어진다. 기껏 기분 좋게 취하고 있었는데 저 한 마디에 술이 확 깨버렸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더 술기운에 빠졌더라면 그대로 ‘네,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할 뻔했다.
“가슴 보여줄까? 기운 날 거 같으면.. 레오라면 괜찮은데...”
아리아스필은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원피스의 끈을 내렸다. 술기운에 달아올라졌음에도 백옥 같이 하얀 속살은 레오의 혈기를 자극해내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사람이 조신하지 못하게...!”
급히 레오는 아리아의 잠옷을 고쳐입힌 채로 담요까지 덮어주었다. 이대로 가면 자신도 이성을 놓고 말려들 것 같았다.
“...레오, 나 더운데...”
“그럼 그런 짓은 하지 말든가. 참나... 누군 좋아서 참는 줄 아나.”
저런 무방비한 아리아의 유혹은 레오에게도 참기 어려운 고난이었다. 차라리 서큐버스 퀸이 만든 주지육림에서 벗어나는 게 훨씬 쉬울 것이고 쉬웠다.
“...레오 나한테 화 아주 마니.... 났구나...”
땀을 약간 흘리면서 아리아는 조금 울먹였다. 모습만 봐선 어린 아이를 연기하는 레오를 연상케하는 어투였다.
“...솔직히 제법 났어.”
레오도 애써 아리아를 다독이지 않았다.
숨겨봤자 어차피 아리아가 또다시 욕망을 자극할 애교의 초석이 될 뿐이었다.
“너 때문에 좋은 술 마시고도 취하기 힘들잖아.”
억지와 같은 화였지만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아리아는 약간의 취기에 실수로 일반 신성술이 아닌 성혈투술을 사용해버렸지만, 레오는 지금 술을 홀짝이면서도 주기적으로 신성으로 체내에 들어오는 알코올을 정화해내고 있었다.
만약 자신마저 취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는 혈기왕성한 수컷과 암컷만이 남을 것이다.
언제 교미해도 이상하지 않을 건강한 두 남녀 한쌍만이 남는다는 뜻이었다.
“...미안해...”
레오가 낸 화에 아리아는 완전히 울상이 되었다.
“진짜... 잘못했어...”
글라디오와 시리카에게 혼났던 어린 시절에도 저렇게 눈물을 글썽인 적은 없었다.
“미아내... 나 때무네... 전부 나 때문에...”
그때 레오는 처음으로 보았다.
“...아리아? 너...”
아리아스필이 우는 모습을.
기억 속엔 한번도 제대로 웃지 않았던 그녀의 푸른 눈에서 빗방울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아내...미아애... 전부... 제가 망쳤어요... 레오 흉터들도... 인생도 전부 제가... 나 같은 게... 좋아해서도 안 되는데...”
술의 쓴맛에 슬픔이 깊게 베여든다. 제대로 발음도 못 하면서 아리아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토해냈다.
자신이 잘못부터 억지스러운 부분까지 아리아는 계속해서 참회해내었다. 보는 게 안쓰러울 정도로.
“아리아.”
레오는 그런 아리아의 손을 잡은 채로 한 팔로 끌어앉았다. 술기운이 아니더라도 따스하고도 포근한 온기가 전신을 감돌게 했다.
공허한 감정에 차오르는 차가운 슬픔은 레오의 온기에 녹아내린다.
“너 진짜 재수없는 거 알아?”
아리아가 아직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그렇게 일갈하며 당수를 가볍게 날렸다.
따악...!
“끄앙...!”
평소 목소리와 달리 아리아는 귀여운 목소리로 신음을 내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나름 살살친 거였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이마가 따가웠다.
“내 인생이 망하긴 뭐가 망해. 이 재수없는 년아.”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아파하는 아리아를 보면서도 일갈을 멈추지 않았다. 저딴 식으로 사과를 하는 게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레, 레오...”
“말했지? 난 다른 사람한테 동정받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야.”
저 사과에 섞여있는 동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울화가 가슴에서 끓어 치밀었다.
“내가 왜 너 때문에 인생이 망했는데?! 어?! 어?!”
이때 레오도 이미 취했는지 모른다. 신성으로 취기를 억누르기엔 흥분하면서 끓어오르는 혈기가 마신 술을 빠르게 순화시켜버렸으니까.
“...그거야... 저 때문에 레오가 금제도 싸움도...”
“웃기시네. 그게 왜 너 때문이냐?”
레오나르도에겐 그게 더 화가 나는 해석이었다. 그런 자의식 과잉적인 발상은 레오의 화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그건 내 의지로, 내가 결정한 거야. 그럼 그에 대한 상처도, 고통도 내가 책임져야하는 바 아냐?”
“...그래도...”
“뭐가 그래도야? 네가 칼 들고 나한테 협박이라도 했어?!”
이상한 감정이 교차한다.
분명 레오는 자신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다른 때보다도 따뜻한 위로를 받은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술기운에 몽롱했지만 그 어떤 말도 지금 레오의 화보다 와닿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레오가 가장 힘들잖아.”
아리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개 20대의 처녀가 보기엔 50년을 넘도록 지옥에서 칼바람을 맞아야 했던 중년의 고통을 전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우리들이 제대로 마왕을 해결하지 못해서...”
그것들이 라인하르트의, 자신의 실패라고 생각하면 죄악이 예리한 비수처럼 가슴을 후벼파는 것만 같다.
“...”
그 말에 레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 이런 부분은 왜 한결 같은 건데.”
레오는 그런 아리아를 보며 1회차를 겹쳐보였다. 그 철옹성 같은 천재가 무너진 순간이 한 장면처럼 겹친다.
그때 자신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화재는 소방관 잘못이냐, 방화범 잘못이냐?”
“...응?”
“불이 나서 사람이 죽는다면 그건 방화범 잘못이잖아. 불을 지른 놈이 그 새끼니까.”
당연한 말이었다.
인과도, 원인도 그 존재에게 있으니까.
“근데 꼭 화재로 사람이 죽으면 소방관 탓부터 시작하더라고. 따지고 보면 소방관은 화재에서 사람 구하려고 노력했는데도 말이지.”
봉사적인 목적에서 나선 소방관은 오히려 대중에게 매도당하는 일이 허다하다. 자신이 맡은 일을 하지 못 했다는 실수 한번으로 갖은 매도를 들어야한다.
“...하지만 내가 해야할 일인데...”
아리아는 그 비유를 이해했다.
“네가 용사하고 싶어서 신한테 조르기라도 했어? 오히려 난 왜 그렇게 희생까지 했는지 직접 묻고 싶은 심정이라고! 알아?!”
억지스럽긴 했으나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리아스필은 스스로 용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단지 힘이 생겼기에 책임을 졌을 뿐.
레오에겐 당시 아리아를 만나지 못한 것이 한이라면 한이었다.
“...그러니까... 뭔가 말이 꼬이긴 했는데...”
레오나르도는 흥분이 가라앉는지 말을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아리아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리아 넌 그렇게 욕먹을 녀석은 아니라고. 애초에 네 입장에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아리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늘 장발만 봐왔지만 단발도 그 나름의 감촉과 매력이 있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아리아는 그제서야 울음이 멈췄다. 마음 같아선 더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지금은 눈물샘마저 취해버린지 오래였다.
“...그래도... 제대로 사과를...”
“...그럼...”
레오나르도는 아리아의 얼굴도 제대로 마주보지 않은 채 작게 말했다.
“나중에 여행 한번 가든지...”
혼잣말도 그것보단 클 정도였다.
“...응...? 여행...?”
하지만 아리아는 확실히 들었다. 여행이라는 단어를 또박또박하게 말이다.
“...차, 착각하지 마! 신혼여행 같은 게 아니니까! 그냥 내가 수행하면서 갔다온데도 너도 보면 좋잖아!”
아무도 신혼여행이라 말하진 않았지만 레오는 제발을 저리듯 혼자 부정하며 변명했다.
“...그, 그래도... 그건 저한테 너무 상 같은데...”
아리아도 어느 정돈 숙취가 깨었는지 존댓말로 제대로 돌아왔다.
이 사죄가 얼마나 황송한 제안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럼 이번 기회에 잘못한 거 전부 털어놔봐.”
아리아의 말투가 다소곳해지자 레오나르도는 준비해둔 한 병을 더 꺼내놓았다. 이번 건 아까 것보다 약간 도수가 높은 술이었다.
“...잘못이요...?”
“원래 술자리 가면 서로 마음에 묵은 것도 풀고 확인하는 법이거든. 그리고 넌 나한테 미안하다며. 아예 지금 확실히 풀 건 풀고 가자고.”
미래의 레오나르도가 친절하고 정갈한 기사이자 신사였다면.
지금의 레오나르도는 거칠면서도 호방한 전사이자 역군의 풍모를 내보였다.
“...아...네!”
아리아는 이런 레오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잔에 술을 채웠다.
하지만 아리아는 몰랐다.
“...히끅...”
이미 아리아 본인이 각인된 성혈투술로 인해 취기가 심해진 걸.
“...저 말이에요...”
“어, 근데 너무 마시는 거...”
“레오가 흘린 머리카락이나 버린 손톱을 몰래 모으고 있었어요...”
그 고해성사에 레오의 표정이 짐짓 언다.
“...응?”
“너무 아까워서 저도 모르게... 에헤헤...”
아리아는 레오의 혼란도 눈치채고 못하고 배실배실 웃어대었다.
“...그리고 레오가 어렸을 때 사진부터 다른 사진들까지 베개에 넣어서 몽정하는 꿈도 꿨어요...”
“...으응...?”
신성을 쓰지 않아도 레오의 술기운이 완전히 싸늘하게 풀어진다.
“잘못한 건 알고 있는데... 자위를 직접 하면 안 되는 줄 알고... 참을 수가... 히히...”
본래라면 결혼하더라도 무덤까지 숨길 비밀들이 입에서 술술 흘러나온다.
레오가 잘못을 말하라고 부탁한 탓일까, 아리아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음습한 욕망을 드러내었다.
“...레오가 쓰는 피붕대도 가슴 붕대로 대신해서 써서... 그 골에 레오의 팔을 끼워넣기도 하고...”
“잠깐...! 잠깐만...! 그게 무슨...!”
레오는 자신이 생각한 잘못과 사뭇 다른 방향에 당황해버렸다.
그가 생각한 것은 회의에서 빼놓은 정보나 자신의 비밀을 혹시나 숨기고 있나 떠본 것이었는데...
“...그리고...”
아리아는 아예 술에 본능을 맡기었는지 병째로 입가에 들이켰다.
“...레오랑 같이 잘 때, 너무 향긋해서 몰래 바지를 내려서...”
“내려서...?”
레오는 본인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뒷말을 기대하며 걱정했다. 설마 그 이상이 있단 말인가.
아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레오의 아랫도리를 바라보았다.
“레오 아기즙을 마구마구 빨아 먹었어요오오... 정말 잘못테써요... 다음에는 허락받꼬오... 할테니까아...”
풀썩...
욕정과 발정의 고해성사는 취기에 빠진 아리아의 수면에 그대로 끝나버렸다.
“...어...”
레오나르도는 속으로 세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왜 미래의 난 아리아랑 안 한 거지...? 그리고...’
‘설마 1회차 때 아리아도 이런 성격이었던 건가? 그 얼음장 같던 녀석이?’
‘아니면 미래의 나 때문에 지금 아리아가 이렇...?’
차라리 숙취로 기억을 다 잃고 싶은 밤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회귀 전에는 경멸하며 깔보던 1인자 용사가 2회차에선 나만 바라보는 얀데레 변태?(※착각이 아니었다?!)
[만우절 특집으로 외전 편을 쓸까 고민 중입니다. 고민만 하고 있는게 문제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