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부풀 듯 욱신거렸다.
레오나로드가 겪어온 영상을 보고 나서 가슴이 아픈 걸 참아낼 수가 없었다.
자신 때문에 저런 고난과 고생을 겪었다고 생각하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가문에 내쫓기고도 끝없이 수렁 속으로 엮이는 악몽을 보고 뭐라 변명하겠는가.
하지만 그보다 수치스러운 점은,
‘처녀가 아니여도 되는 거야...?! 처녀막 뚫려도 되는 거야...? 그럼 난 도대체 뭘 위해...! 아니...! 그보다 지금 당장 해도 괜찮다는 뜻..!’
웅크린 아리아스필의 욕정이 죄책감을 뚫어내고 마음을 지배했다. 동시에 그 마음은 천천히, 그리고 뜨겁게 육체의 통제권을 뺏어나갔다.
“...하...아...”
아리아스필은 얇고도 거친 숨을 내쉬며 레오를 바라보았다.
사람들만 없다면 바로 침대로 끌고 가 문을 잠그고 싶었고, 죄책감만 없었다면 그냥 이 자리에서 바로 키스를 갈기고 덮쳤을지도 모른다.
‘...역시 표정이 안 좋구만.’
레오나르도는 그런 아리아의 표정을 보며 전혀 다른 감정을 상상했다.
자신이더라도 목숨을 건 희생의 결과가 저런 얼간이들이 설치는 세상이라면, 당연하게도 분노와 부아로 감정이 동요하는게 정상적이었다.
물론 지금의 아리아는 정상의 범주에서 제법 동떨어져 있었지만.
“...자, 이제 시청 그만하시고 각자 할 일합시다. 여기 있는 애들 정서에도 안 좋은데.”
레오나르도는 검집에서 검은 돌을 빼내었다. 당황했던 때와 달리 혐오스러운 기억을 통해 진정한 레오는 간단히 검집의 작동을 멈추었다.
“아리아스필, 넌 아직 훈련 안 끝났으니까 따라오고. 머리가 뜨겁고 속이 답답하면 몸으로 푸는 게 답이야.”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풀 숙인 아리아를 보며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조언했다.
그때의 우리들은 그런 식으로 고민을 해결했다.
“...예...예...?! 몸으로?!”
아리아스필은 얼굴이 완전히 익은 채로 어버버 말을 떨길 바빴다.
지금 아리아의 머릿속에 연상되는 건 피튀기는 성혈투술이 아니고, 침대에 처녀의 정절을 빼앗기며 튀는 성혈이었다.
“그럼 오늘은 영상만 보고 수업 끝날 줄 알았냐? 어제 성역 연습한 거 잘 되는지 확인도 해야지.”
“아...네... 그렇죠... 성역, 연습 많이 했어요.”
본인 딴에는 나름 자연스럽게 대답한 아리아스필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엔 얼굴에 수치와 실망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건 누가 들어도 오해할 법한 말을 한 레오나르도의 책임이 컸다.
“끝까지 못 논다고 실망하지 말고. 누가 알아?”
레오나르도는 문 바깥으로 나가면서 맑게 웃어보였다. 바깥의 햇빛에 따라 그 미소는 더욱 상쾌히 빛났다.
“잘하면 너도 상을 줄지.”
천박하지만 그 말을 듣고.
“...네엣...!”
아리아스필의 마음은 젖어버렸다.
* * *
성혈투술은 순조롭다 못해 쾌속적으로 진행되었다.
기초만으로 적어도 일주일은 소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아리아스필은 3일 만에 기초 단계를 넘어서고 자신이 있는 수준까지도 다다르고 있으니까.
[성혈투술-붉은 성역]
아리아스필의 혈흔이 육각형의 꼭짓점에 빛나며 내부에 성역을 형성시킨다. 크기 자체는 작았지만 혈액에 따라 붉게 빛나는 신성은 레오의 것보다도 찬란했다.
“...하...”
그걸 보자 레오나르도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한숨 소리가 울리자 아리아스필에게 불안감을 자극되었다.
“...예!? 혹시 뭐가 잘못됐나요?! 어떤 거죠?! 문제가 있으면 당장 고칠게요!”
만약 실망스러운 결과를 내었다면 레오가 내주는 ‘상’이 바랄 수도 없었다. 실망에서 포기로 변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실책을 만회해야했다.
“...그 반대야.”
레오나르도는 진심으로 자신의 일생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너무한 거 아니냐? 양심적으로.”
마치 평생을 노력해 벌은 전재산을 누군가는 복권 하나로 당첨된 듯한 감각.
“...그게... 죄송...”
“왜 내가 5년 넘게 개발한 성역을 이틀만에 익히는 건데!? 진짜 열받아!!”
으레 레오가 입에 달고 다니는 ‘재능의 차이’라는 게 다시 열등감을 폭발시켰다.
“...?”
예상과는 너무나 반대된 나머지 아리아는 제대로 반응치도 못한 채 눈으로나마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레오는 자신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자리에 스승이나 다름없음에도.
“...그런 의미로 한숨을 쉰 거였어요?”
유사 제자인 자신에게 진심어린 질투심과 열등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해되었지만 얼핏 어린애처럼 보일 정도로 쪼잔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런 다른 의미로 내쉴 만한 게 있어?”
레오나르도는 불만스러운 눈치로 아리아의 성역을 직접 만져보았다. 손이 그 영역에 침범하자 전신은 뜨거운 물 속에 잠기라도 한 듯 느리고 둔해졌다.
외경까지 동원하는 자신조차 이 정도 순도의 성역과 신성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사내 새끼가 쪼잔하게 뭘...]
“아인아, 같이 좀 놀아주고 있어라.”
“네, 알겠습니다.”
평소와 같은 부탁에 아인은 경례 포즈를 취하며 현자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 그를 질질 끌고 갔다.
신장도 마침 비슷해져서 지금 현자는 아인에게 있어 최적의 샌드백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저런 꼴을 한두번 보는 게 아닌지라 레오나 아리아나 태연히 대화에 집중했다. 적응력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둘이기에 가능한 경지였다.
“넌 이미 성혈투술의 전반을 습득했어. 아마 저번처럼 찜요리가 되는 꼴은 없을 거야.”
그건 아리아스필도 자각하는 바였다.
성혈투술 자체는 사용하는데 있어 고통과 부담이 있었지만, 신성술이라는 유파 안에 있다는 시점에서 그녀에겐 배울 수 있는 영역에 존재해있었다.
겸손하는 게 오만일 정도로.
자신은 용사에 천재였으니까.
“...그럼 수업은 이제 끝인가요?”
아리아스필은 짐짓 아쉬운 눈치로 레오에게 되물었다. 사실 성혈투술을 배우는 걸 버틸 수 있었던 건, 가르쳐준 이가 레오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제나 성기사들보다도 수업 능력이 좋을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직접 봐주는 것만으로 몸에 가해지는 부담과 고통은 자연히 사그라들었으니까.
“기술적으로 가르칠 건 따로 없어. 남은 몇 달 동안 경험하고 숙련도만 보충하면 되겠지.”
“...아... 그렇네요.”
몇 달이라는 말에 아리아스필의 표정은 자연히 어두워졌다.
레오는 숨겨서 모르고 있지만, 아리아스필과 다른 일행들은 다음 주안으로 적 본거지에 돌입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아인이와 현자님이 어떻게든 그곳에 향하지 못하도록 자리를 묶어둘 것이었고.
그 사이에 용사인 자신은 마왕와 레오의 부모님을 레오가 알기 전에 쓰러뜨려야했다.
“왜 그래? 훈련 계속한다고 해서 싫어서 그래?”
“아뇨!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같이 훈련할 수 있어서 영광이고 좋았어요!”
아리아는 행여나 이 생각이 들킬까, 황급히 대답해내었다.
레오의 훈련은 힘들지언정 절대로 싫지 않았다.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싫어도 좋다고 말하는 게 양심적인 예절이었고 말이다.
“뭘 영광씩이나, 이런 지옥훈련이 성공할 줄은 진짜 몰랐는데 말이지.”
레오나르도는 아리아의 과장스러운 태도에 피식 웃으면서 기지개를 키었다. 어느새 하늘에는 황혼이 물들고 밤의 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이젠 좀 쉬자고.”
“...예? 벌써요?”
아리아스필은 아쉽다는 듯 애절하게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게 조금만 더... 아직, 안 한 것도...”
아직 정말로 중요한 것을 받지 못했다.
이런 상태로 끝난다면 아리아스필의 불타오르는 욕망은 불완전연소로 삭여질 뿐이었다.
“...아하~”
그런 아리아의 애타는 눈빛을 보자 레오는 바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다른 때에는 둔감할지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마저 감정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레오는 둔탱이였다.
“그러니까 아리아 아가씨께선 잘하신 상을 받고 싶으시다?”
“...네...?! 에에...?!”
레오가 조롱조로 말하자 아리아는 자신의 온몸의 떨리는 것을 느꼈다. 다른 때처럼 불쾌한 것이 아닌 마치 조련당하는 강아지가 느끼는 수치와 쾌감이 자신 몸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되나요?”
아리아스필이 부끄러운 채로 질문하자, 레오도 반격이라도 먹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얼굴이 붉어졌다.
아리아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몸은 전투 이상으로 미인계에도 효과적이었다.
“좋아. 알겠어.”
주도권을 내줄 수 없었던 레오나르도는 천천히 아리아의 몸에 다가섰다. 천천히 접근한 레오의 입은 아리아의 귓가에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
“...오늘 밤, 내 방으로 와. 처음으로 일탈시켜줄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레오나르도는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멍하니 그 자리에 아리아스필은 따라가지도 못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레오는 어떤 속옷을 가장 좋아할까.
***
야심한 밤, 모두가 잠든 이 시간에 아리아는 달빛에 따라 한 방에 도착했다.
귓가 들리는 건은 정원의 풀벌레 소리와 그 소리마저 희미하게 만드는 뜨거운 심장 박동 소리 뿐.
아리아는 달빛에 의지해 자신의 옷을 살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살결이 비치는 원피스의 흰색 잠옷, 그에 반하는 검은색 팬티와 브래지어는 아리아의 속마음을 구체화한 것만 같았다.
‘...무슨 기대를 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닐 수 있어...! 함부로 실망한 태도 보이면 안 돼...!’
아리아스필은 이성으로 스스로의 욕정을 숨기며 그렇게 되뇌었다.
이미 목욕까지 하고 냄새가 안 나도록 가지고 있기만 했던 향수까지 뿌렸지만 아리아는 배신감을 줄이기 위해 자기최면을 걸어야만 했다.
똑똑...
“...레이널드 씨... 저 왔어요...”
아리아는 작게 속삭이며 레오를 가명으로 불렀다. 혹여나 갑자기 현자가 나타나 날뛰거나 아인이 대신 나올까 걱정되어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레오를 불렀다.
“제법 일찍...”
젖은 머리를 털며 문을 벌컥 열던 레오나르도는 이내 아리아스필의 옷차림을 보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달빛에 따라 비치는 검은 속옷,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만큼이나 얇고 투명한 백색의 원피스는 레오를 흔들기엔 차고 넘쳤다.
“...아...네... 좀 기대해서...”
아리아도 문을 연 레오를 바라보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갓 씻고 나온 레오는 목욕가운 하나만 두른 채로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옷깃 사이로 보이는 근육과 복근은 아리아의 흥분을 끝도 없이 치솟게 만들었다.
게다가 지금은 현자도, 아인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완벽하게 두 사람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럼... 들어와.”
“네...”
부끄러운 표정이 오고 가며 아리아는 레오의 방에 들어왔다. 침대부터 시작해 방 전체는 깔끔하고도 정갈히 정리되있어 아리아의 기대를 계속해서 증폭시켰다.
이제부터 이 자리가 어떻게 어질러질지 아리아는 머릿속에서 끝없이 망상이 상상되었다.
“앉아있어.”
“아...네...”
아리아는 의자에 조신히 앉아 레오의 보상을 기대했다. 좌석이 침대라면 더욱 좋았을 테지만 지금 이 상황 자체가 흥분되어 아리아는 전혀 실망치 않았다.
“어디, 이게 좋겠네.”
이윽고 무언가를 꺼내온 레오는 그대로 테이블에 물건과 잔들을 내려놓았다.
“...이건...?”
아리아스필은 의아한 표정으로 잔과 병을 바라보았다. 기대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양상에 의아한 기미가 든 것이었다.
“술은 아직 안 먹어봤지?”
“...네? 네... 그렇긴 한데...”
이것도 좋았다. 분명 레오와 함께 첫 술을 하는 음미하는 것도 귀중하고 감사한 경험이었다.
“그럼 한 잔하자. 이거 좋은 술이거든.”
술병을 마개를 열며 레오는 그리 말했다.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아리아의 마음 속엔 술 이상의 씁쓸한 아쉬움이 있었다.
“원래 스승이 제자한테 주도도 알려주는 게 도리거든.”
“...주도요?”
동방스러운 단어에 이해하지 못한 아리아는 의문스러운 눈치로 되물었다.
“술을 마시는 예절이지.”
레오는 마개를 따며 잔에 각자의 술을 따랐다. 술은 방의 램프에 빛나 호박색으로 빛났다.
“...사실은 상이라긴 보단 한 번쯤은 같이 해보고 싶었어.”
“...저랑요? 저도 그렇긴 한데...”
음주도 좋다.
그치만 더한 일탈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너랑 술도 한번 못 마신 것 같아서.”
“...아...”
아리아스필은 그 한 마디에 더 이상 실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유치하게 행동하기엔 술잔에 비친 레오의 눈이 너무나 슬프게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지금 아리아가 할 수 있고, 해야할 것은.
“그럼... 건배할까요?”
함께 즐거운 술자리를 보내는 정도였다.
“그래, 건배하자. 취할 것 같으면 무리할 거 없이 신성으로 밀어내고.”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래봬도 저 성혈투술도 바로 익힌 여자이니까요!”
“띄워줬더니 아주 날아다니네. 누가 널 이겨.”
피식 웃으며 레오와 아리아의 술잔이 건배에 따라 부딪쳤다.
하지만 두 남녀는 알지 못했다.
아리아가 너무 성혈투술에 익숙해져있다는 사실을.
그것도 혈액순환에는 특히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성혈투술은 독에 약하다는 복선...!? 일지도?
[늦어서 죄송합니다. 요즘 공부도 힘들고 비염이 너무 심해져서 집중이 어렵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