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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자는 회귀했다-205화 (205/248)

아리아스필은 사실 화가 나지 않았다.

에일린과 협력을 결정한 순간부터 머리의 이성은 냉정을 넘어 무감정할 정도로 차갑게 감정을 식히고 있었다.

이 영상을 본 것도 그저 에일린의 행태를 분석하기 위한 일환일 뿐, 믿진 않을 테지만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마치 한 자루의 차가운 검처럼.

아리아스필은 이성이 감성으로서 자리잡은 것을 체감했다.

하지만

‘...지금 고백한 거지? 레오가 고백한 거지?! 어떤 나도 괜찮다고 고백한 거잖아!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음험한 시선으로...! 하으으으...!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건데...!’

지금만큼은 냉정할 수 없는 아리아였다. 혼란스러운 와중이었지만 저런 진심어린 고백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사력을 짜내 평온을 유지하곤 있었지만, 그 무표정 속엔 자신의 가슴을 젖소처럼 짜내는 레오가 상상이 되고 있었다.

“...하...”

그 시선은 레오에게 있어 하나의 경멸 의사처럼 보인 것이 문제일 뿐.

“잠깐만... 비켜봐.”

모든 걸 다 놓아버린 레오나르도는 시리카에게 그리 부탁하며 창문을 열었다. 창문틀에 발을 올리자 크리스는 급히 레오을 팔을 붙잡았다.

“그만두시죠! 이건...!

“놔!! 놓으라고!! 떨어져 죽을 거야!! 내 명예처럼!!”

이미 밑바닥으로 추락한 자신의 명예를 따라가기 위해 레오나르도는 창문에서 실랑이를 했다.

크리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낙사를 택하려는 레오를 붙잡아 말리기 바빴다.

본인 같아도 죽음을 택하겠지만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로 자결을 방관할 순 없었다.

[어차피 너 자살도 안 되잖아.]

현자는 냉정히 레오에게 잔혹한 현실을 인지시켰다. 레오를 붙잡던 이들도 그제서야 깨달았는지 ‘아...’라는 감탄을 내며 각자의 자리로 물러났다.

“...하...씹...”

레오나르도마저 잠시 망각했는지 이내 붉어진 얼굴을 가다듬으며 검집으로 다가갔다.

“...뭘 하시려고...?

“이거 부술 거야.”

“예!?”

간신히 침착을 유지하는 아리아는 놀라 되물었다. 자신의 보물 1호를 깨부순다는 이야기를 듣고 평온을 유지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부술 거라고! 남의 흑역사를 뭣하러 이렇게 이리 고이 모셔?!”

이 검집은 빼도 박지도 못하게 자신의 흑역사 완벽한 형태로 박제해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래의 내가 노망이 난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이 마도구는 자신의 수치의 결정체였다.

“안 돼요!!”

“놔! 가루로 만들어서 소각로에 처넣을 거야!!”

“안 돼욧! 제 보물 1호라고요!!!”

말투에 음이탈이 날 정도로 흥분한 아리아는 레오를 붙잡은 채로 자신의 보물을 사수하고자 했다.

다른 때보다 더 찰거머리 같은 태도에 아리아를 몇 번이고 뿌리치던 레오도 지쳤는지 거친 숨을 내며 물었다.

“이딴 쓰레기가 어딜 봐서 보물이야?! 나 엿 먹이기는 보물?!”

“그건...”

레오의 일갈과 같은 질문에 아리아는 동요하며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레오의 ‘행복 시간’을 보기 위해 자신이 투자한 노력을 생각하면 아까워서라도 버릴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께 약속의 증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보물입니다.”

그때 타이밍 좋게 아인이 나섰다. 감정이 풍부해진 결과, 입력해둔 지식을 어떤 때에 사용해야 할지 눈치가 늘어났다.

“...그...래?”

이젠 악역 연기가 잊어버렸는지 레오는 약간 히죽대며 치켜든 검집을 내려놓았다.

“...내가 준 거라고? 그래서 보물인 거야?”

은근히 대답을 기대하며 레오는 얼굴이 붉어진 아리아에게 물었다.

“...그렇죠. 그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면서 검집을 받았는데, 바로 계시를 받아서 나갈 수 있었죠.”

아리아는 따스하고 청초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욕정을 억눌렀다.

“...계시? 무슨 계시?”

하지만 레오의 표정은 어째서인지 정색으로 물들어있었다. 바로와 계시라는 말에 탐탁치 않은 기색이 눈빛에 깃들었다.

“이, 검집에 새겨진 계시요. 그게... 여기에...”

레오나르도는 검집을 들며 검게 양각된 글귀를 살폈다.

[어둠을 만나 거악과 맞서라.]

그 글씨를 보자 레오의 손에 약간이나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괜찮으십니까...? 표정이...”

“아무것도 아냐. 흑역사가 더 생각나서. 얼른 이거나 집어넣자고.”

표정을 급히 풀며 레오나르도는 검집을 다시 성검에 집어넣고자 했다.

지이이잉...

하지만 검집에 새겨진 각인이 마치 반응이라도 하듯 검집에서 또다시 영상이 송출되었다.

“뭐야!? 이거 왜 안 꺼지...!”

[...그래서 네가 뭐라고?]

영상 속 레오나르도는 검은 가면을 쓴 채로 되물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껄렁하게 내보인 손짓은 또다른 흑역사를 암시했다.

그리고 손짓 너머에 있는 남성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분노를 표했다. 푸른 눈에 흰 머리는 마치 라인하르트의 특징을 지닌 것만 같았다.

[그래, 내가 바로 용사 아리아스필 라인하르트의 친아들 질드레 라인하르트다!!]

...침묵이 흘렀다.

터무니 없는 이야기 때문에 뇌의 정보 처리에 오류라도 생긴 것처럼.

길고도 무안한 침묵이 흘렀다. 유일하게 그 영상을 알고 있는 레오는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는다.

“...제...제...아, 아....들...이...?”

아리아스필은 의무감에 어떻게든 진실을 확인하고자 했지만, 입과 성대가 너무 떨려 제대로 질문이 나오지 않았다.

에일린과의 동맹 이후 더 동요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진 그녀였지만, 지금 이 이야기만큼 감정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내, 내...가 레오를 두고 바람에 애까지...?’

1회차의 자신은 설마 레오나르도를 내치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은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배신도 이런 배신이 따로 없었다. 레오나르도 본인이 자신을 당장 찢어죽인다 해도 할 말 없을 만큼.

당장 성검으로 할복하고 싶은 충동이 아리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제 오빠입니까?”

아인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저 상황에 대해 질문했다. 충격은 먹었으나 사실 여부은 확실히 확인하는 것이 사역마로서의 할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주장’하는 거짓말쟁이.”

레오나르도는 저런 헛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진절머리가 났는지 묵음으로 욕설마저 내뱉었다.

“저땐 저런 녀석들이 한 둘이 아니었어.”

라인하르트의 직계가 끊어진 뒤로 일어난 현상.

통칭 용사 증명이었다.

***

용사와 마왕이 동시에 죽고 세상은 난세의 시기가 되었다.

그리고 난세의 시기에는 영웅이 나는 법.

다만,

“...다 안 좋은데 너나 나나 용사라면서 나선다는 게 문제였지.”

자칭 용사가 사회 문제가 될 정도로 많았다는 게 흠이었다.

“...그러니까... 제 친아들은 아니라는...?”

“보면 알걸.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지도 않지만.”

당황해하는 아리아를 보며 레오나르도는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여러번 저었다.

자신도 직접 볼 땐 혐오스러웠는데, 가십거리의 장본인은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그 고상한 핏줄의 애새끼가 누추한 곳엔 어인 행차이실까?]

영상 속 레오나르도는 약간 당황한 듯 보이면서도 이내 능글맞게 그 햇병아리에게 모욕을 날렸다.

[라인하르트 원로원회부터 무고한 이들의 복수를 하러 왔다! 구차하게 연명한 목숨으로 사죄하도록 해라!!]

너무 당당하게 개소리를 내뱉자 레오를 포함해 라인하르트 모두가 벙찐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원로원이 어떤 짓을 한 지도 모르고 복수를 운운하고 있는 꼴을 보니 자연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봐도 너무 안 닮았는데?]

[비천한 출신답게 표면 밖에 저열하게 보지 못하는군...! 난...!]

[실력 말한 거야. 빡통아.]

마치 마법의 순간이동과 같은 움직임, 시간이 삭제된 것처럼 그 애송이는 이미 자색 쇠사슬이 포박되었다.

이미 지나간 레오나르도는 자색 쇠사슬을 잡아당기며 그 애새끼를 쓰러뜨렸다.

[끄아아악!!]

[그래, 얼굴 못생긴 건 알고 있구나, 외모만큼 실력도 객관적이면 좋으련만.]

이윽고 영상 속 레오나르도는 질드레인지 뭔지 할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들었다.

[그러니까 네 애미가 아리아 그 년이라고?]

[그래!! 난 그 용사의 고귀한 혈통을 이은 2대 용...!]

[...약을 칠거면 제대로 속이던가. 아편 쳐먹고 쇼하나? 학부모 호출할까?]

루미네는 급히 아인의 귀를 막으며 욕설을 안 들리게 했다.

아인은 이미 욕설 분야에 있어서는 도덕규범이 내재되어 있었지만, 성인인 루미네로서는 그저 방관할 순 없었다.

쫘아악!!

레오는 그 꼬맹이의 소매 안쪽을 살결째 뜯어내었다. 겉옷과 함께 겨드랑이의 털이 레오의 손에 잔뜩 집혀있었다.

“갑자기 왜...?”

[적어도 흉내를 낼 거면 그 집안 사람들 털이란 털은 다 하얀 걸 알았어야지. 병신아.]

그 사기꾼의 것은 검정색, 이미 척 보였던 레오나르도에겐 기가 차는 꼬라지였다.

“...그걸 어떻게 알지?”

마르켄이 나서서 물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적잖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그건... 굳이 설명 안 하는 편이...”

[네 애미랑 볼 꼴 못 꼴 다 본 사이인지라 이정도는 놀랍지도 않다 야.]

영상 덕에 레오나르도의 명예가 밑바닥에서 지하로 돌입했다.

[어떻게 그게...!]

[뭐가 어떻게야?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하얗게 됐나보지. 나도 구석구석 털이 하얗거든?]

[갑자기 뭔...개소리이이아아아악!!]

광기어린 대사와 함께 레오나르도는 그대로 쇠사슬을 전신으로 휘감아당겼다. 악력만으로 고인능욕한 사기꾼은 사슬에 토막난다.

고약한 처형식을 보자 라인하르트들의 일가는 마취제를 얼굴에 주입당하기라도 하듯 차게 경직되어있었다.

“...어쨌든 이런 녀석들이 많았다... 정도로만 생각해. 그니까...”

레오는 이 끔찍한 상황을 어떻게 무마하고자 부연 변명을 해대었지만.

“...1회차 때 저랑 볼 꼴 못 꼴 많이 본 사이인가요?”

아리아의 맹랑한 질문에 또다시 정신은 무너졌다. 이쯤 되면 멀쩡한 추억을 찾는 게 흑역사 찾기보다 힘들 정도였다.

“...됐고! 됐어! 어쨌든 얼른 이거나 끄기나...!”

[...잠깐... 뭐라고? 진심이야?]

검집을 끄는 것에 버벅대는 사이, 야박하고도 짓궂게도 영상의 장면은 바뀌었다.

[...뭘 놀라지? 난 그 이교도들과는 다르다. 아리아스필님의 가호에 의해 태어난 진정한 용사지.]

[...아니, 그거 말고. 아까 한 세상이 미쳐돌아가는 소리.]

[모욕적이군.]

이번엔 아리아와 약간 비슷한 외형의 여성이 피식 비웃으며 레오에게 검을 겨누었다.이윽고 다시 자기 소개를 이어갔다.

[다시 한번 소개하지. 어둑시니. 난 마리아 라인하르트.]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 단어를 입에 담았다.

[용사이자 여신인 아리아스필님의 처녀수태로 태어난 신의 사자다.]

라인하르트 전원 모두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상식이 초월하다 못해 해탈한 소리에 차마 말조차 안 나왔다.

[...지적하고 싶은데 해도 되니?]

영상 속 레오는 너무 기가 찬 나머지, 나긋나긋한 톤으로 질문했다. 아마 기억상실 이후에도 저렇게 상냥한 말투로 말한 적은 없을 것이다.

[유언이라면 해보아라.]

[...그러면 하늘에서 신이 으헤헤거리면서 아리아한테 임신광선을 쏴서 애를 배게 했다고?]

[저열하기 짝이 없군. 신성모독이다. 이교도.]

이윽고 광신의 마리아가 한 걸음 다가오자 레오나르도는 급히 2m씩이나 후퇴했다.

[야야야...! 가까이 오지 마! 나도 임신할라!]

레오는 진짜 광기를 보자 식겁했는지 말조차 떨었다.

[모욕하는 건가? 아니면 정신이 나간 건가? 남자가 어떻게 임신을 하나?]

[...처녀가 임신하는 건 말이 되고? 루미네가 창녀촌에까지 수녀 모집한 지 2년도 더 됐는데? 아니면 아버지 쪽이 유니콘 수인이시니?]

광기에 두려웠는지 레오는 횡설수설하며 논리적인 모욕을 내뱉었다. 영상을 보는 이들조차 충격에 입을 버리고 손으로 가릴 정도였다.

“...그 레오나르도 님.”

레이널드라 부르는 것도 잊은 아리아는 동공이 세로로 벌어진 채로 레오를 바라보았다. 이미 냉정은 저 머나먼 곳으로 피난을 가버렸다.

“...왜? 나한테 그러지 마. 나도...”

“고생하셨어요...”

아리아스필은 레오을 몸을 껴안은 채로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리아스필에겐 레오가 대화가 가능한 상태로 회귀했다는 것에 무릎까지 꿇고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너 어떻게 버텼냐?]

현자마저 여기에선 레오의 정신을 걱정할 정도였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부연설명]

아리아: 근데 창녀촌에서 수녀를 모집한다는 건 무슨 일인가요?

레오: 어? 아 그거? 전쟁 때 성기사하고 사제가 많이 죽어서 인력 보충한 거야. 루미네가 교황이 되고 새로 낸 정책이지.

루미네: 제가 그렇게 정책을 내는군요...

레오: 난 나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한 것 중에 가장 잘한 거야. 애초에 신성은 처녀랑 상관도 없잖아.

아리아: 예?

아리아는 경악한 채 물었다.

레오: 뭘 새삼 놀라? 아, 지금은 제대로 이유가 안 밝혀졌나? 처녀막 뚫린다고 신성이 없어지는 건 심리적 효과에 의한 믿음이 흔들려서 그런 거지 본인만 떳떳하면 문제는 없어. 이미 암묵적으로도 넘어가는 분위기 아냐?

루미네: 잠깐 레오 님...!

말리는 건 이미 늦었다.

레오: 그러니까 처녀고 나발이고 신성이랑 그다지 상관없다니까. 강간이라도 당해서 트라우마라도 있지 않은 이상...

아리아:...

아리아의 시선은 뜨겁고 축축했다. 마치 심해에 눌러놓은 깊은 본능을 끄집어올린 것처럼.

레오는 남 강간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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