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에서 밝혀진 비밀들이 무색할 정도로, 라인하르트 저택에는 평소와 같은 공기가 흘렀다.
레오나르도가 기억을 잃은 것마저 적응할 정도로 라인하르트의 정신은 회복력이 빨랐다.
다음날 아침에도 편안히 차를 즐길 수 있었던 까닭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실까? 차도 준비해놓고.”
“가끔은 숨도 돌릴 필요가 있으니까요.”
티타임에 순순히 응했음에도 레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오랜만에 이곳에 와서라고 하기에는 집중력이 산만하다 들을 만큼 집요하게 사방을 살폈다.
“차는 어떤 게 좋으신가요?”
“홍차로 부탁할게. 사모님.”
자리에 착석하자 레오는 그제서야 살피는 것을 멈추었다. 그게 그다지 놀랍지 않았는지 시리카는 사용인도 없이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라주었다.
“설탕은 필요하신가요?”
“20년 만에 먹는 건데 아까워서라도 그럴 순 없지.”
차의 조예를 자랑하듯, 미래의 비극을 과시하듯 레오나르도는 한손으로 찻잔을 집어들었다.
홍차의 진한 향기는 티타임을 즐기는 작은 방 안을 꽉 채워넣었다. 아마 어떤 꽃도 이런 농밀한 향을 내지 못할 것이라 확신되었다.
“그래도 다들 배려심은 좋네. 어제부터 토를 계속 했다고 암살도 안 하고.”
“그렇군요. 가르치신 부분에 어긋나서 분명 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
시리카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잔에도 차를 가득 채웠다. 지금부터 할 일에 있어 자신이 하는 범위는 ‘침착’ 하나, 그것마저 못한다면 라인하르트의 안주인으로서 긍지에 수치였다.
“가주가 해야할 작업까지 혼자서 다 소화하는 사람한테 그런 말하기도 그러니까.”
“마찬가지로 감사한 배려네요.”
자연스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시리카는 차를 들이마셨다. 평소와 같은 티타임, 1회차에도 이런 수십 번은 있었다.
“...그럼 시음해볼까?”
레오나르도도 찻잔을 들어 입으로 천천히 가져다대었다. 입술에 찻잔이 닿자,
“진짜 최고인데.”
“...그런가요? 그리 많이 마신 것 같진 않은데...”
딸캉...!
작지만 높은 소리를 내며 레오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의 수면은 흘러넘칠 것처럼 요동치면서도 표면의 장력에 따라 안정적으로 고요해졌다.
“난 진심으로 감동했다고.”
그걸 증명라기라도 하듯 레오는 기립박수까지 쳤다. 마음과 같아선 휘파람을 부르며 환호까지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맛있...”
“시리카 당신마저 참여할 줄은 몰랐거든. 드디어 이 단계까지 도달할 줄이야.”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말하며 시리카를 향해 팔팔 끓었던 차를 끼얹었다.
넓게 퍼진 홍색 액체는 시리카의 안면을 향해 돌격하나 싶었지만.
“사랑의 힘이 대단하긴 하네. 리오스.”
리오스의 마나가 부여된 홍차는 그대로 뒤틀리며 창날처럼 다시 레오에게로 되돌아갔다.
수분의 고유 마법을 통해 암살하는 작전은 이미 실패했으니 차선책을 택한 것이었다.
카아앙!!
차를 이용한 공격에 비웃듯 레오는 티스푼에 오러를 더해 받아쳐냈다. 풍압만으로 마법이 부여된 차의 궤도는 천장으로 흩뿌려졌다.
“...자 이제 나와보실...!”
콰아앙!!
그리고 그 천장에서는 수도가 파열되기라도 한 것처럼 물이 흘러내렸다. 비 정도 수준이 아니라 아예 폭포라도 내린 것처럼 작은 방은 물로 가득 차올랐다.
“...리오스 너 미쳤어?! 네 애미까지 수장시킬 생각이냐?!”
“전 괜찮은데요?”
시리카는 물이 차는 게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차를 음미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미 찻잔이고 주전자에까지 물이 섞여 이미 밍밍하게 식었음에도 그녀는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허, 목그네를 했던 때랑 너무 다른 거 아냐?”
모독적인 발언이었지만 레오나르도는 감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시리카는 아예 전투도 하지 못하는 가녀린 여성, 그런 그녀는 이런 난전의 상황에서 수장이 될 수 있음에도 얼굴색 한번 변하지 않았다.
“아직은 라인하르트도 건재하고, 전 건재한 라인하르트의 안주인이니까요.”
대화하는 와중에도 물은 차올랐다. 이미 잠겨오는 액체에는 마나가 듬뿍 담겨있다.
아직까지는 발목만 넘겼을 뿐이지만, 이 이상 가면 움직임이 둔화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단순한 논리, 물이 차오르면 물을 빼면 된다.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생각하며 외벽 바깥 쪽으로 도끼를 집어던졌다. 복도 방향으로 해서야 사용인에게도 피해갈 것이 분명했으니까.
“촤악!!”
폭발을 기다렸다는 듯, 폭발이 터진 방향을 포함해 사방에서 크리스가 튀어나왔다.
‘상관없어. 오히려 물이 더 잘 빠질 테지...!’
카아앙!!
검은 돌로 이루어진 건틀릿으로 사방의 공격을 받아치며 회피한다. 라인하르트의 호흡법까지 동원해가며 4인분과 동등한 속력을 낸다.
“...왜 물이...”
“걱정할 여유가 있나?”
여유가 없기에 틈이 생겼다. 크리스의 쌍검이 레오의 건틀릿을 타고 어깨를 베어낸다.
피가 흘러내림에도 레오의 신경은 지면에 차오르는 물에 쏠려있다.
‘...리오스, 성장이 생각보다 더 빨라.’
이 물은 이 방 형태 그대로 고정되어있는 채로 차오르는 것이었다. 아마 이론적으로는 방 전체를 부숴버려도 사각형 형태 그대로 물이 차오를 거다.
이미 무릎까지 물은 차올랐다. 다리는 액체와 마나의 저항 때문에 둔중해졌고, 넓고 높게 퍼진 물 때문에 성혈투술도, 하물며 풀고르도 자유롭게 쓸 수 없다.
‘...화력으로 밀고 가면 시리카가 말려든다... 게다가 흑암 쪽은 오히려 쌩쌩하고.’
게다가 크리스는 이런 반수중전에서도 전혀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유는 루미네의 신성술, 이 다량의 물을 채워넣을 수 있는 것도 루미네가 신성으로 능력을 증폭시켰기 때문일 것이 터.
‘발상이 탈피 수준으로 빨라졌어.’
가장 현명한 방식으로 레오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특유의 위악을 아는 라인하르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질과 최상의 협박을 해오고 있었다.
“그럼...!”
레오나르도는 도끼도 없이 검은 돌만을 한 손에 끌어모아 지면에 정권을 내리꽂았다.
지면에 금이 가며 아예 바닥에 구멍이 뚫는다. 아무리 고정 능력을 잘 유지한다고 해도 충격과 중력의 협공은 버텨낼 재간은 없을 것이다.
파지직...!
“...산 너머 이젠 눈사태네.”
구멍을 메우기라도 하듯 물은 전부 얼어붙어 빙판을 형성했다. 시리카는 의자 위에 몸을 올려 피했지만, 레오나르도와 크리스들은 얼음에 그대로 봉쇄되었다.
“그렇게 잡으라 하셨죠.”
“배운 만큼 말솜씨가 느셨구만.”
오히려 잘 됐다는 듯 레오나르도는 풀고르를 아공간에서 꺼내들었다. 액체면 몰라도 고체 상태에선 시리카가 감전사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전격이 창날에 압축되어 마치 열선처럼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창날을 빙판을 녹이고 잘라내 다리를 파내려던 순간.
“...어지간히 초조한가보군.”
문쪽을 향해 마르켄과 글라디오가 돌진한다. 마르켄은 레오의 목을 아예 녹일 기세로 화청을 휘두른다.
‘...아직 덜 녹았어...’
회피는 쉽지 않다. 물은 얼어서 차오르지 않지만, 저 화마에 닿으면 차라리 찬물에 익사하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될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아공간 망토를 신성으로 휘날리며 화염을 지워냈다.
던지는 방향은 마르켄이 아니라 빙판, 첫날에 있던 일 때문에 마르켄에게는 거울 방패를 지니고 있을 터였다.
화르르르륵!!
크기가 사그라든 화염은 망토에서 방출되어 빙판을 녹여내고 증발시킨다.
추가적으로 날아가는 화염은 이제 풀고르의 전격까지 더해 고속으로 피해낼 수 있다.
촤아악!! 카앙!!
크리스 전원은 최고 속력으로 우선 제압한다.
성혈투술으로 육체 강화, 풀고르로 신경을 동시에 강화하는 것으로 크리스는 제압할 수 있었다.
“...이제...!”
파악...!
마르켄을 상대하려던 순간, 창문에 뚫린 구멍에서 글라디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날선 회전음과 함께 던져지는 소리를 듣자 레오나르도는 완전히 당황했다.
‘...이건 빡센데...!’
공중제비를 하는 것으로 간신히 방패가 몸을 비켜나간다. 하지만 공중인 이상 회피하는데에는 난관이 왔는다는 뜻이었다.
화르르륵!!
마르켄 쪽에서 다시 날아가며 레오를 그대로 익혀버리고자 했다. 창끝으로 천장을 밀어 지면에 밀차하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속까지 익어버렸을 것이다.
파아앙!!
원반처럼 회전하던 방패는 마르켄의 거울 방패에 그대로 또다시 되돌아날아간다. 받아친 게 아니라 반사이기에 속력은 그대로.
“...이 노인네가 미쳤어!?”
날아간 방패는 자신을 제끼고 그대로 시리카에게로 향했다. 피할 방법은 없다. 저대로 가면 의자에 선 그대로 몸이 양단될 터.
파지직...!
레오나르도는 날아간 방패를 전격을 덧씌운 낙뢰의 투창으로 튕겨냈다. 그리고 레오는 그 방패의 형상을 보자 자신의 행동이 결정적 실수임을 직감했다.
“...잡았다!”
글라디오의 방패는 소유주에게 되돌아가는 능력이 있다. 시리카가 굳이 피할 것도 없이 방패는 다시 글라디오의 손에 들어가 레오에게 직격한다.
쿠웅...!
목을 보호했지만 그대로 나가떨어진 레오의 시야에는 리오스와 루미네의 모습이 채우고 있었다.
“저희 이겼죠?”
“...아...되게 모양 빠지게 졌네.”
레오는 스태프를 목죽지로 살짝 그어지는 걸 바라보며 양손을 들어 한 가지 의사밖에 밝힐 수밖에 없었다.
“항복, 내가 졌어.”
“이...겼다아아아아!!!”
리오스가 내지른 소리는 아니었다.
{루미네 수사?}
다크서클이 복숭아뼈까지 내려가있는 한 성인이 기쁨을 절제하지 못해 낸 환호일 뿐.
“...아...아... 죄송합니다.”
드디어 숙면을 취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성인은 자신이 본의아니게 추태를 부렸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기행에 비하면 점잖은 편에 속했지만, 신전에 있는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안타깝게 물든 것만 같았다.
[괜찮아. 얘가 한 기만질 생각하면 환호가 아니라 팡파레를 불러도 뭐라 안 해.]
“승리에는 좋아해도 되는 것이 특권이라고 아버지는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멀리서 구경하던 현자와 아인은 항복 선언을 확인하자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 빠르게 뛰어왔다.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이가 없다는 것이 레오나르도에게는 나름 착잡하게 느껴졌다.
“알았으니까 일어나자고. 정리하려면 꽤 걸리겠네...”
“근데 훈련을 끝났는데 따로 주는 건 없어요?”
레오가 흙먼지를 털며 일어나는 순간, 리오스도 승리에 만끽하며 당연스럽게 질문을 내었다.
본디 우등생이라면 으레 결과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는 것처럼.
“...어? 주는 거? 뭘?”
“아... 뭐... 저희는 지는 대가로 삭발하기로 했는데, 우리가 이겼을 때엔 보상이 없나해서요.”
어쩌면 응당한 권리였다. 패배했을 때 리스크가 있다면 승리했을 때에는 보상도 있어야하는 게 도리 아니던가.
“...그런 거 없는데?”
물론 레오나르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는 어방한 답변에 사람들의 시선이 싸늘했다.
여태까지 5일 동안 잠도, 식사도 줄여가며 어떻게든 레오의 목을 분지르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들이기에.
“다시 한번 말씀해보시겠습니까?”
루미네마저 자비없는 시선으로 레오를 내려다보았다.
최후의 보루인 루미네마저 저런다는 것은 다른 이들은 자비라는 개념조차 고려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아...알았어. 원하는 거 말해봐. 할 수 있는 거면 해볼 테니까.”
그런 시선에 레오나르도는 마지못해 기가 한풀 꺾인 채로 한 발 물러났다.
“...그럼...”
리오스는 떠올렸다.
레오가 에일린을 보곤 토악질을 하며 말했던 충격적인 소식을.
“그럼 그때 에일린 딸이랑 결혼한다는 건, 무슨 얘기인지 설명 가능해요?”
갑작스러운 얘기에 다른 이들은 놀랐다. 그런 이야기를 뜬금없이 묻는 것도 그랬지만, 한편으로는 본인들도 호기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알아둔다면 아리아스필을 진정시키는 것도 가능...
“나참.. 그런 건 왜 궁금하대, 알았어. 에일린 딸내미랑 결혼할 뻔한 거? 그거 설명하면 돼?”
“...”
그렇게 생각한 일행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침묵으로 되새길 수 있었다. 싸늘한 침묵에 레오나르도는 묘하다는 듯 그들을 노려보았다.
“왜 그래? 이거 말고 딴 걸로 대답해? 뭐... 다른 비슷한 거면 너희들 자식이라고 자칭한 놈들밖엔...”
감각이 둔해진 레오가 자연스레 뒤를 돌아본 순간,
“...설명하시겠다고요? 결혼 말이죠?”
아리아스필은 리오스처럼 실눈을 뜬 채로 생글생글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안녕?”
“네, 안녕하세요? 같이 좀 듣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레오나르도에겐 거부권은 없었다.
레오는 처음으로 안 웃는 아리아스필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생각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담]
[근데 따지고 보면 지금 아리아하고도 나이 차 비슷하게 나지 않아?]
"그거랑 이건 다르지. 에일린 그년 자식이기도 하고, 아리아는 이미 동갑으로 알고도 있던 사이잖아. 아리아는 경우가 달라."
[그럼 아리아랑은 결혼하겠단 소리네?]
"...입 다물어."
[...너 솔직히 컨셉 유지하기 힘들지?]
캐릭터 연기가 몹시 힘든 레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