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는 생각한다.
자신의 생은 치욕과 고통으로 가득차있었다고.
살아있는 것 그 자체가 수치심 없이 뻔뻔했고.
싸우는 명분조차 이기적이고 자기멋대로여서 한심하다 몇 번이고 되뇌었으며.
자신의 마지막 목표가 얼마나 오만하고 탐욕적인 거짓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 누나...”
레오는 확신할 수 있다.
“...어디 가...?”
어떤 때보다 지금이 가장 굴욕적이었다.
50대의 정신으로 고작 20대도 안된 처녀에게, 그것도 용사 아리아스필을 상대로 이딴 혀짧은 발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굴욕스럽기까지 하다.
“...아... 미안, 어른들끼리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서. 이따가 누나랑 많이 놀자~?”
자애로운 표정 사이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보인다. 분명한 비웃음, 50대 연상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회의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시선 중, 라인하르트 쪽에서 웃음기가 느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하하하, 누나.”
레오나르도는 아리아를 잡는 손아귀의 힘이 늘어났다. 부러지지 않을 정도지만, 꼬집어지는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만.
“그럼 마법사님들 가시면 아주 재밌어서 지칠 만큼 놀아줘야 돼?”
그리고 자신을 미묘하게 비웃음을 참는 마르켄, 글라디오, 크리스, 리오스, 루미네, 시리카 순으로 라인하르트 일행에게 예고했다.
“다른 사람들도요? 기대할게요!”
레오는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돌려서 등골에 동상을 입을 법한 협박을 날렸다.
웃음을 힘겹게 참은 표정이 정색으로 얼어버릴 정도로 그들의 얼굴은 잿빛으로 물들었다.
“...가보도록 하죠. 현자님.”
[그래.]
라인하르트 측과는 다른 의미로 잿빛이 된 마탑 측은 레오를 뒤로 한 채로 회의장에 들어갔다.
적탑주에 대한 조사와 그 존재의 연관성을 추적한 마탑 측의 정보를 라인하르트와 공유하고 차후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서 본회의가 시작된 것이었다.
1회차든, 2회차든 레오나르도의 성격을 생각하면 악착같이 참여하고 싶은 회의였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있는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충격에 걱정된 레오나르도에게는 정보를 검열할 의사를 지녔던 마탑 측이었고,
열 살배기 어린애로 퇴행했다 연기하는 지금은 더더욱 회의에 참여할 명분이 없는 레오였다.
‘...엿듣는 건... 불가능하겠군.’
문이 닫히는 걸 보자 귀동냥으로도 정보를 얻을 심산마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저 방에는 이미 회의실에 설계된 방음 설비까지 포함해 공간 단절 마법까지 걸어버렸으니까.
‘...숨기는 건 없으면 좋겠지만.’
회의가 끝나면 저들은 들은 내용을 전부 설명해주겠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에서는 항상 진실될 수 없다는 걸.
자신조차 그래왔으니까.
미래든, 과거든.
* * *
회의장은 조용하고 초연했다.
상황만 따지면 난장판이 될 정도로 어수선해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사건의 꼬인 정도와 무게가 이미 인간의 것을 초과해버린 지 오래였다.
한번 경악하고 동요하면 끝도 없을 것을 알기에 모두들 사무적이며 동시에 조용히 스스로 맡은 바를 다했다.
“현재 마탑 내에서 나온 적탑주의 비리 및 연구 자료를 간략히 요약해놓았습니다.”
설명하는 사람들이 학습의 성지인 마탑 출신인 때문일까, 자료들은 이해하기 쉽게 요점만 골라 정리되어있었다.
동시에 자세한 정보를 설명하기 위해 원본까지 조작 없이 복사하여 제시해 놓기까지 했다.
“...꽤나 오랫동안 진행되어있었군. 못 찾는 게 용할 정도로.”
자료의 페이지를 넘기는 글라디오는 그리 내뱉었다. 앞서 미리 손에 넣은 자료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적탑주가 이런 짓을 자행한 지는 적어도 4~5년을 넘기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레오가 마탑을 재학하는 동안에도 이런 짓은 태연하고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는 뜻이었으니.
라인하르트 가주이기 전부터 한 남매의 부모로서 치가 떨리는 건 당연했다.
“...면목 없습니다. 아마 외부 흑마법사와 내부 흑마법사를 한꺼번에 정리한 탓에 적탑주와 이 집단이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은밀히...”
“정작 가장 위험한 인물을 내버려두고?”
경어를 사용하지 않은 질문.
그게 추궁이라는 의도라는 걸 모를 이는 없었다.
“...마탑의 규율에 따라 적탑주 밑에 있던 직속 제자들부터 휘하 마법사들을 탑에 가리지 않고 처벌하고 처형했습니다. 당연한 책임이지만...”
“...책임이라고 하기도 어렵지. 애초에 썩어문들어진 곳을 도려낸 것일 뿐이니까.”
레오나르도의 유아 퇴행과 현자의 등장에 마탑 측들은 약간이지만 망각했는지도 모른다.
라인하르트에게 있어 마탑의 모든 일원들은 죄인이었다.
이미 라인하르트는 마탑에서 개발된 그 렌의 키메라들에게 습격당했고, 레오나르도는 그때 이후부터 끝없는 정신적 피해와 가족에 대한 걱정을 해야 했다.
만악은 마인에게 있을지언정 마탑 측에도 실책은 전혀 작지 않았다.
“...마탑의 부패를 미리 막지도, 예방치도 못한 것 모두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
이번에는 에일린이 대표로 고개까지 조아리며 회의장에서 사죄를 내었다.
템페리우스 가문은 본디 마탑의 부패 방지를 가훈으로 삼고 있는 명문, 그렇기에 대표로 사과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하지만 평소 자신의 모든 행위에 프라이드를 내보인 에일린이 절까지 하며 사죄하자 아리아마저 당황했다.
“이 처사로 라인하르트의 모든 식솔분들의 부아와 분노가 풀리지 않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절을 하며 사과를 올리는 와중에도 에일린은 조금도 자신의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부패한 이들을 제외한 마탑과 템페리우스 가문은 라인하르트 가문에 준 피해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흑막을 처리하지 못한 상황에선 제국의 그 누구도 안전치 못합니다.”
합리적인 사과이자 의사였지만 라인하르트의 일행을 포함한 루미네마저 쉽사리 표정을 풀지 못했다.
고개를 들라 말하기엔 저들의 죄는 실수라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실책이었다.
[우선 그럼 그 실책을 해결할 방법부터 듣고 싶은데, 가능할까?]
이런 경직된 상황을 중재한 용자는 현자였다.
마탑의 대부이자 라인하르트 초대 용사의 동료인 현자만이 이 상황을 중립적으로 조정할 수 있었다.
그 위치에선 마탑도, 라인하르트도 쉽게 반박이나 반항도 할 순 없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깊게 박은 몸을 일으키며 에일린은 초연히 찾아놓은 정보를 설명했다.
“...자료에서 나오다시피 약 5년 동안 적탑주는 레오나르도의 모친, 렌 님의 세포 배양과 복제를 위해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마탑의 든든한 기둥이 되었어야할 적탑주는 그런 장기간 동안 복제 연구와 실행에 전념을 다했다.
그로 인한 보상은 그 존재라 서술된 이에게 지식과 힘의 제공 그리고 자리에 대한 약속을 받은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다.”
영양가가 없는 정보에 크리스는 질책이라도 하듯 면박했다.
집행 기사단을 지휘하는 그녀로서 마도 처형자가 이단 심문관과 마찰을 일으키며 낭비한 시간을 알고 있기에 나온 타박이었다.
“알겠습니다.”
다른 라인하르트 일행의 반응마저 살핀 에일린은 페이지를 몇 장 넘기는 것으로 서론을 생략했다.
에일린 본인도 이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의미한 걸 알고 있었다.
“...중요한 점은 렌 님의 실종 기간과 이 자료에 적힌 기간에 괴리가 길다는 점에 있습니다.”
렌의 실종은 레오가 10세일 때 일어난 사건, 그리고 이 기록이 작성된 첫날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이었으니.
이에 대한 시간의 괴리는 대부분 눈치채고 있었지만 정확한 원인이나 근거는 찾아낼 수 없었다.
지금 전까지는.
“그건 다르게 말하면 렌 님이 실종한 원인 자체가 우연이 아니라고 보는 바입니다. 64페이지에 있는 자료를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일제히 모두 자료를 64쪽으로 자료를 넘겼다. 그러자 잔혹하다 표현될 만큼 자세한 렌의 해부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적탑주의 연구에 원조한 흑마법사의 거처에 발견한 해부도와 설명입니다. 그 내용에선 시신은 죽은 상태임에도 부패하지 않다 저술되어 있더군요.”
“...확실히 그건 장시간 시신을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주죠. 하지만... 그게 레오의 어머니를 납치해 살해했다는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아요.”
게다가 시신을 부패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낼 수 있던 것은 어디까지 렌을 죽였을 때이다.
그 전부터 연관이 있다는 점에선 반박할 수 없었지만 그걸 설명할 근거가 되어주진 못했다.
“...그 전에 현자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질문이지?]
그 대답을 하기 전에 에일린은 현자에게로 시야를 돌렸다.
지금부터 할 대답은 현자의 답변에 따라 판이하게 뒤바뀔 것이다.
에일린과 다른 몇몇 마탑주들은 이 가설과 추측이 진심으로 틀렸기를 바랐다.
“이미 죽은 적탑주에게 그 존재가 빙의되었을 때, 그것은 이미 현자님께 면식이 있는 것처럼 대화를 했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지.]
현자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대화 이후에 레오나르도는 부상으로 2회차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으니까.
“혹시...그 존재는 마왕... 300년 전 마왕과 동일 인물입니까?”
[...]
싸늘하리만치 현자는 뜸을 들였다.
이미 라인하르트 일행은 그 존재라는 걸 마왕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음에도, 현자의 침묵은 길었다.
{현자....}
앤젤라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300년 전 그날, 세 명의 영걸들은 보았다.
[인물(人物)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아.]
만악(萬惡)이 물리적으로 실현된다면 어떤 형상인지를.
그건 생명이라 할 수 없었고 생명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개체라 표현될 수 없었고, 군체라고도 표현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건 모순이었다.
[300년 전 마왕은 악이라는 개념 그 자체니까.]
악이라는 건 모순적이었으니까.
“...악? 악의 말씀이십니까?”
예상의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 나머지 에일린은 확인삼아 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식이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야였기에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무지가 무력함을 통감했다.
[그 존재에겐 자아가 없어. 목적만 있을 뿐이야.]
“...어떤 목적...”
[증식, 스스로를 끝도 없이 부풀리고자 하는 존재였어.]
현자는 지금조차 그 존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생물은 아니었지만 생물로서의 번식 본능처럼 자신을 늘리고자 했다.
[게이트 너머는 마치 마수와 악마를 만들기 위한 자연적 공장과 같아. 생태계라고 할 수도 없어. 인지한 순간 마수는 태어나있으니까.]
게이트의 원천을 제거하고자 루벤과 앤젤라에게서 떨어진 채 현자의 돌을 설치했을 때, 그는 그 사실을 알아버렸다.
[마왕은 그 마경의 의지 그 자체야. 어떻게든 스스로를 늘리고자 하는 순수가 그것을 움직였지.]
그리고 마왕은 짧게나마 확인사살을 날렸다.
[그래서 죽일 수 없어. 개념은 불사나 다름없으니까.]
“...잠시만요...!”
그 말에 이들은 가장 본질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용사, 현자, 성녀는 그 존재를 죽였단 말인가.
설명만으로 신이라고밖에 설명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오히려 그래서 이 세계에선 없앨 수 있었지. 오히려 그렇기에 말이야.]
그 모순에 현자는 역설적으로 대답했다. 모순을 파훼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역설이었다.
[우리에게도 유사한 존재가 있잖아.]
용사 아리아스필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성검이 떨림에 공명하듯 성대가 움직였다.
“...빛의 신...”
빛의 신, 같거나 혹은 그 이상을 달리는 신이라면 소멸시키는 게 가능할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지금도 빛의 신의 힘을...!”
[그게 안 돼. 이미 다시 만났을 때부터 의표가 찔렸어.]
성인의 희망마저 짓이길 만큼 현자의 지혜는 중압스러웠다.
안다는 것은 힘이 되어주지만, 모르는 걸 알아버린 대가로 독이 되어버리니까.
[빛의 신은 군체인 인류를 지킬 뿐, 객체의 인간을 지키진 않아.]
신성모독이었지만 항변할 말은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레오가 살아온 미래가 존재할 리도 만무했으니까.
[그리고 마인도 열받게도 인간의 일종으로 판정받게 되었어.]
그리고 현자는 처음으로 마왕이 의도를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애초에 지성이 없었던 존재이기에 의도를 알아채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죽었을 터인 마왕은 스스로를 인간으로 격하시켰어. 그때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지만... 인간의 악의로 얻은 거야.]
그렇기에 빛의 신은 더는 용사 일행을 직접 도울 수 없다. 현자는 이해버린 것이다.
[인간의 지성을.]
마왕도 지금은 엄연한 인간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표지를 보면서 완결에 대한 고민에 잠기다보니 글을 지우고 다시 쓰고를 계속 반복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외전에는 레오 ts편을 더 쓸지,
아니면 아리아와 레오의 주종역전를 쓸지,
그것도 아니면 아리아 쪽에서 회귀한 외전을 쓸지 고민이 돼서 시간이 더 지체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