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레오의 계획은 맨몸으로 뛰어가 고향으로 가는 것이었다.
기차나 마차는 기록도 남고, 시간도 걸린다. 그렇다고 하여 빠른 이동을 자랑하는 워프 게이트도 주목을 너무 받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지름길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고, 레오나르도 정도의 실력자라면 몇백 리 정도는 맨몸으로도 늦지 않게 도달할 수 있었다.
“절 데려가시죠.”
그런 계획에 수정을 가한 이는 아인이었다.
“아깐 쳐웃더니, 이젠 또 무슨 소리인데?”
“전 가성비가 좋습니다.”
자신을 도구처럼 칭찬하며 아인은 작은 상아색 단검을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몸에 단검의 끝을 손에 박아넣었다.
“...너...”
비늘로 뒤덮인 오른팔, 마치 자신이 용화했을 때와 같은 형상에 레오나르도는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방금 뱀과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 이빨을 박힌 생물로 변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비늘은 점차 등쪽에 덮여가며 거대한 날개를 돋아나게 했다. 드래곤과 유사한 형태, 와이번의 날개였다.
“아무리 레이널드 그레이브님이시더라도 비행해 직선 코스로 가는 것보다는 빠르지 않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근거에 레오나르도는 저 아이의 정신연령이 자신보다 높은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너 생각보다 많이 유능하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동행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아까 그 섬광탄이 뭔지 설명하면 데려가주마.”
그 조건에 무표정을 유지하던 아인은 경직된 채로 눈을 피했다.
“...그...그건...”
만약 지금 ‘그건 사실 아버지의 말에서 거짓말 탐지하는 마도구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유언은 그것 뿐인가? 라인하르트 제군들?’
아마 레오나르도는 수치에 그대로 폭주해서 모든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할 것이다.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어.’
방금의 질문과 판별은 평소 아인이라면 하지 않을 돌발행동이었다. 단지 레오나르도가 본인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라 말했기에 고민하지 않은 채 실행했을 뿐.
“...그건... 그러니까...”
“왜 대답 안 하냐? 내가 애라고 봐줄 것 같아?”
레오나르도는 위협의 의미로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마 아인의 부모를 자칭한 기억을 돌아온다면 이보다 끔찍한 흑역사는 따로 없을 것이다.
지이이잉...!
하지마 눈치없게도 레오의 발언에 또다시 목장식은 붉은 빛을 내뿜었다.
“...왜 또 이건 발광할까...!”
[넌 어째 말하는 거 하나하나가 다 흑역사냐?]
그런 레오나르도의 추궁에 딴지를 건 유일한 이는 현자였다.
“그래서 늙은 꼬마 양반은 불만이신가?”
[딱히,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네 기억 되찾게 하고 싶어서 의욕 증진되거든.]
레오나르도 본인은 모르겠지만, 현자 말대로 자신이 하는 말들은 기억을 되찾으면 평생 후회할 행동밖에 없을 것이다.
“...방법은 있나?”
[있어. 내가 책임지고 되돌린다고 약속했거든.]
확신과 지혜가 느껴지는 어투였다.
그 약속을 한 기억을 지닌 본인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잠깐이지만 레오나르도가 현자를 다시 볼 정도로 그의 표정은 진중했다.
{방금 전에도 성검에 닿았을 텐데, 무언가 변화는 없었습니까?}
성녀인 앤젤라도 현자와 마찬가지로 기억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었는지 엄숙한 표정으로 상황에 임했다.
“그랬다면 진작에 마법도 쓰고 말도 곱게 했겠지.”
[까놓고 너 기억 되찾아도 쪽팔려서 숨길 것 같은데?]
{확실히 그건 그럴 것 같군요.}
“댁들 시비 걸려고 말한 거야?”
미래의 초인과 과거의 초인이 시선에 불이 튈 정도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앤젤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곁에 선 루미네만 속이 타는 심정이었다.
“...우선 세 분 다 진정하시...”
“그보다 처음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어.”
늘 그랬다는 듯 레오나르도는 루미네의 말을 잘라먹으며 자신의 할 말을 꿋꿋이 이어갔다.
[뭔데? 시비만 아니면 대답해줄게.]
{무엇이지요? 가능한 선에서 대답해드리겠습니다.}
루미네의 호소가 없어도 애당초 저들은 그리 흥분하지 않았다. 다만 성질머리가 조금 하자가 있고 괴팍해 오해를 많이 살 뿐이었다.
“당신들, 전에 어디서 만났었나?”
가장 적의적이지 않은 질문에 두 영체는 그대로 표정이 굳어졌다. 가장 대답하기 쉬운 물음임에도 저들의 표정엔 작은 균열이 있었다.
다만 너무 짧고 작았기에 서로를 제외한 아무도 그걸 알지 못했다.
[너 얘한테 작업이라도 거냐? 당연히 예전에 만났지. 네가 기억을 잃었을 뿐...]
“그런 거 말고. 뭔가 만난 것 같지는 아닌데... 익숙한단 말이야.”
자신이 괴상한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레오나르도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금 감각을 표현할 수 없었다. 분명 뇌의 기억은 지금을 첫만남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정신의 추억에는 빗물처럼 적셔지는 익숙함이 있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사람의 영혼은 윤회의 고리에 순환할 테니 몇 번이고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포교용 개소리를 듣고 싶데? 나 참... 됐다.”
물어본 레오나르도 쪽에서 민망해졌는지 이내 얼굴을 돌리며 다른 질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럼 이건 다른 질문인데.”
레오는 속으로 이 의문이 유치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도 같잖은 질문이기에 철이 들면 그만둘 정도의 물음이니까.
그럼에도 레오나르도의 열등감에 의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루벤과 아리아스필이 싸우면 누가 이기지?”
“...진지한 표정으로 물을 질문인가요?”
루미네는 순간적으로 레오나르도가 무게를 잡으며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수준의 질문을 던지자 순간적으로 그리 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가! 중요한 거지! 전대와 현대를 비교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어?!”
[저 새끼 분명 ‘회귀빨로 아리아도 이겼는데 지금 내가 루벤보다도 셀까? 우후훗!’ 이런 생각하고 있네.]
“닥쳐! 그런 거 생각한 적 없어!”
레오 본인도 질문을 한 것이 민망했는지 억하심정으로 큰소리를 지르며 수치를 지워내었다.
{...흠, 아마 루벤 용사님께서 질 겁니다.}
의외로 앤젤라는 망설이지 않고 아리아의 승리를 확신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용사와 가까운 성녀의 판단이니 거짓은 섞여있지 않을 것이다.
“오....의외네?”
[저 봐! 저 봐! 광대 승천하려는 거 이 악물고 참고... 크엑...!]
현자의 도발은 레오의 마음에 크게 스크래치를 낼 수 있었지만, 아인의 빠른 처리로 안심할 수 있었다.
{당연하죠. 루벤 님이 자신의 후계자이자 후손을 향해 그렇게 이기는데 집착할 리가 없으니까요.}
“...그런 의미였어? 그보다 그 루벤이라는 작자는 아리아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 같던데?”
아리아스필의 말만을 듣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루벤이 얼마나 아리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알 수 있었다.
{...글쎄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 견해일 뿐이니까요.}
“영양가 없는 견해구만.”
그렇게 능청을 떨며 앤젤라는 인자한 미소를 레오에게 지어주었다. 레오나르도는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이내 발길을 돌렸다.
“어이, 꼬맹이 가자.”
“네? 알겠습니다.”
미묘하게 감정이 풍부해진 아인은 당황해하면서도 먼저 가버린 레오나르도를 종종 걸음으로 쫓을 수밖에 없었다.
***
“...바로 출발합니까?”
간단한 짐과 무기들만을 챙긴 채로 레오나르도는 저택 정문 바깥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출발한다는 언질도 없이 바로 저택 바깥 쪽으로 향했다.
“뜸들일 이유가 어딨어. 빨리 갔다 빨리 오는 게 서로에게 좋지.”
“그건 그렇지만, 간다는 말씀을 하시고 배웅을 받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아인의 말대로 아직 라인하르트 일가는 모두 레오나르도가 아직 본인 방에 있을 거라 생각할 터였다.
말하지 않은 것은 물론, 해가 저물 때 즈음 은신 기술까지 사용하여 바깥으로 나왔으니 눈치채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 괴짜가문들이 편하게 보내주겠어? 너도 협조했잖아.”
그 말대로 아인은 레오나르도의 탈출에 그대로 협력해주었다. 분명 곁에 있어야할 현자가 조용히 사라져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건 그런 의도로 협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평소대로 레오나르도가 현자가 시끄럽다 말했기에 아인은 학습한 대로 영체를 없앴을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야반도주에 조력하기 위해 명령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난 누누이 말하지만 그 우둔한 가문의 부하가 아니야. 게다가 간다는 사실 자체는 말했으니 문제는 없겠지.”
“...문제가 없겠나?”
레오의 억지에 아인 대신 반박한 것은 소녀의 증조부였다.
“...집행기사단장님께서 일개 거렁뱅이한테 어인 행차이신가?”
거대한 덩치를 용케 그늘과 어둠 속에 숨긴 채로 추적해온 마르켄은 자신의 거구를 드러내었다.
“누굴 만나든 빈손으로 가는 건 좋지 않으니 선물이라도 쥐어줘야하지 않겠나?”
그리 말하며 마르켄은 긴 술병을 가볍게 던졌다. 보통이라면 놓쳐 떨어뜨릴 수 있었겠지만 레오의 반사신경은 이를 잡고도 남았다.
고급 와인을 받자 레오나르도는 미묘한 웃음을 보이며 마르켄을 향해 혀를 놀렸다.
“그래도 당신이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예전처럼 얼굴도 안 보고 내쫒을 줄 알았거든.”
레오나르도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크리스의 눈을 찌른 뒤 미련없이 자신을 붙잡지 않았던 마르켄의 표정을.
앙금은 없었다. 그건 엄연한 자신의 책임이니까.
다만 이건 마르켄을 물러나게 할 좋은 패가 될 수 있었다.
“돌아올 사람이니 얼굴을 보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속물적이기도 하셔라. 결국 유능한 인재니까 잘 챙기겠다는 소리잖아? 내가 쓸모없을 때에는 편히 내쳤...”
“죄책감에 억눌려 연기하는 건 관두지 그래. 어색하고 어울리지도 않는군.”
1회차의 일을 이용해 조롱하던 레오나르도는 노장의 조언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사람은 내면적인 비밀이 들켰을 경우, 분노하기보다는 침묵하기 마련이었다.
“노망이 일찍 왔나? 흠... 내가 아는 미래보다는 빠르네.”
“그럴지도 모르지. 여긴 네가 아는 현재도, 미래도 아니니까.”
평소와 달리 마르켄은 레오나르도의 도발과 조롱에도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한 온화함이 그의 목소리를 부드럽게 다듬어주었다.
“...루미네 성인님께 금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여장남자 자식은 지금 회차에선 입이 더 가벼운가보군.”
성인이자 동료를 모욕했음에도 마르켄은 그를 꾸짖을 수 없었다. 금제에 대한 비밀을 전부 알았기에 레오를 쉽게 질책할 수 없었다.
“...나에겐 너를 나무랄 자격은 없다. 이것만큼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르켄이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복수 때문에 스스로를 파괴하지 마라. 그런 걸로는 누구도 행복해하지 않아.”
“...복수?”
그 단어에 살의가 들어찬 시선이 마르켄에 쏘아진다. 바로 옆에 있는 아인마저 본능적으로 몸을 떨만 큼 차가운 살기가 뿜어졌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난 모두를 죽였겠지. 애당초 누구를 위한 복수인지도 모르...”
“...속죄를 위한 복수 아닌가.”
속죄라는 단어에 레오는 경직되어 무의식적으로 살기를 거두었다. 저 노인은 자신의 내면에서 정곡만을 찾아내고 있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서 이번에는 화를 내었다. 정곡을 제대로 찔리자 이번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뭘 안다고 잘난 듯이 떠들지? 너희들은 항상 그래. 아직 상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모를 리가 있겠나.”
마르켄은 손에서 장갑을 벗었다. 흉터 뿐인 그의 주름진 손가락 중 약지는 눈에 띄이게 가늘었다.
그 원인은 약지에 끼워진 낡은 반지에 있었다.
“...내가 왜 가주를 하지 않고 집행기사장을 맡고 있는지 알고 있나?”
라인하르트의 미래를 아는 레오나르도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곳에만 집착했기에 다른 정보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째서 조부인 마르켄이 은퇴하지 않았음에도 아들인 글라디오가 가주직을 맡은 이유조차 모를 정도로.
“나도 내 아내를 잃고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날뛴 적이 있었다. 모든 마인과 흑마법사를 척살하고자 했지.”
그는 가주로서의 책임을 지키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홀로 각종 흑마법과 관련된 조직들을 파괴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에, 복수만이 유일한 속죄가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마르켄은 가주직을 박탈당하고 집행기사단에 소속되어야만 했다.
“...그 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너도 알고 있잖나. 네가 사실 금제를 쓰지 않은 것은 네가 살고...”
쐐애액...!
“갑자기 와선 주책 떨 거면 꺼져.”
레오의 검풍이 마르켄의 주름진 볼을 스쳤다.
“살고 싶다고? 그 생각 자체가 역겨운 거야. 당신들도 마찬가지야.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서 미칠 것 같다고...!”
아인의 목장식은 빛나지 않았다.
“근데... 더 역겨운 건 뭔지 알아?”
레오나르도에겐 광기가 있었다.
“가증스러운 당신들을 볼 때마다 금제가 약해져... 내 몸에 힘이 사라진다고!”
광기가 없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죽는 욕망을 억누른 대가로 받은 힘이 사라지는 감각이 여실해지니까.
“...그러니까 말하지 마. 나 말고 아리아스필한테도.”
레오나르도는 아인을 바라보며 턱짓을 했다. 아인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와이번으로 변함으로서 가릴 수밖에 없었다.
“기간 안에는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방금 대화는 아리아스필에게만큼은 감춰.”
와이번은 쓸쓸히 날아오르며 레오나르도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 애는 그 이상으로 짊어지게 하면 안 돼.”
광기어린 슬픔는 비극을 자아내었다.
신성과 정령을 병행해 마르켄보다 고도의 은신을 사용해 숨은 한 소녀에게도 그 비극은 피해지지 않았다.
‘...레오...’
광기 앞에선 어린 용사에겐 눈물만이 흐를 뿐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삶을 원하면 살아갈 힘은 강제로 사라지고, 죽음을 바라면 살아갈 힘이 억지로 쥐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