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다시 부활한 현자는 죽어가고 있는 자신의 제자였던 이를 노려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원로원 죽였다는 소리를 뒤늦게 들어서 저 꼴이라는 거지?]
{...예... 안타깝게도....}
평소 현자라면 낄낄대며 비웃어댔을 테지만, 어지간히 좌절한 레오를 보니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앤젤라 앙겔루스.]
{예? 갑자기 왜 풀네임으로...}
[왜 은근슬쩍 머리 쓰다듬냐? 이정도면 은근슬쩍도 아니네.]
앤젤라는 작아진 현자의 모습에 흥분하며 계속해서 스킨쉽을 시도했다.
지금은 아예 손에 불이 날 정도로 현자의 머릿결을 몰래, 그리고 빠르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게 사람 말 좀 끝까지 듣지...]
“입 다물어! 그딴 식으로 말하면 누가 끝까지 듣고 싶어해!”
남탓에 가까운 변명이었지만, 레오의 꼴이 너무 볼썽사나워 차마 반론하지 않았다.
“...우선 진정하시고...”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마치 불을 막 발견한 원시인처럼 혼자서 흥분하면서 문명인한테 위협한 기분이라고!”
루미네가 진정시켜려는 말을 일순에 뭉개버리며 레오나르도는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완벽한 요약인데?]
“으아아아!! 아악!! 우와악!!”
거의 유인원 수준의 비명으로 레오는 현자의 영체를 쫒아다니며 주먹을 날렸다.
수치에 몸부림치는 꼴이 우습다 못해 안타깝기까지 보였다.
“왜 안 없어지는 거야?!”
주먹을 통과하는 건 그렇다 쳐도 검은 신성을 다시 사용해도 현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레오를 농락하듯 주먹을 맞아주며 미소를 짓는 현자의 모습은 가히 꼬맹이라 말해도 손색이 없었다.
[내가 같은 수에 당할 만큼 똘추로 보이냐?]
현자는 자신을 다시 형성시켰을 때, 제거하지 못하도록 한 가지 조치를 취해놓았다.
영체의 구성을 레오가 아닌 다른 이에게 연결하여 형태의 소멸을 막는 것.
본래라면 할 수 없는 영역이었지만, 지금은 특별한 예외 요소가 존재했기에 일종의 편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퍼억...!
“구타했으니 만족하십니까?”
[...너...]
문제라면 그 예외 요소가 현자에 대한 협조 의식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그 증거로 아인은 자신 또래로 어려졌음에도 현자의 안면을 구타하는데 일말의 주저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기본으로 영체를 유지해서 더 쉽게 팰 수 있다는 것에 다행이라는 감정마저 보이고 있었다.
“...어... 이 사람, 하는 짓은 이래도 현자라며? 근데 막...”
아인이 자신을 대신해 구타하자, 분노마저 사그라들 정도로 당황한 레오였다.
아무리 깝죽거려도 상대는 마법의 창시자라 불리는 현자, 그런 영웅을 저렇게 엽신여겨도 되는 것인지 레오는 진심으로 의심했다.
“괜찮습니다. 허락받은 안건입니다.”
“...아...그래?”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기절시키고, 현자에게 태연히 폭력을 휘두르는 저 소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말투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 분명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레오는 진심으로 역사가 얼마나 개변되었는지 걱정했다.
“...어쨌든 정리해보자고.”
이내 동방의 호흡법으로 심신을 가다듬은 레오는 냉정을 되찾았다.
“...원로원은 알겠어. 몰락하고 타락하고 생각보다 일찍 뒈졌다는 거잖아.”
말에 격조는 없었지만, 간결한 요약이기는 했다.
오히려 원로원 같은 늙은이에게는 저런 저질스러운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이해하신 겁니까?”
“그 늙다리들 쓰던 무기들까지 보여줬는데, 안 믿으면 그거야말로 병신이지.”
레오나르도는 몇 번이고 캐묻고 원로원의 죽음을 부정했다. 사실이라면 자신의 행동이 문자 그대로 바보짓일 테니 어떻게든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공간 망토에서 죽은 원로원에게서 뺏은 무기들을 꺼내서 보여주자, 그제서야 레오는 리오스와 일가들의 말을 신뢰했다.
[괜찮아. 이미 충분히 그래.]
차마 화도 못 내고, 레오는 자신의 미간을 눌러대었다. 하지만 지압을 해도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뒷이야기 해도 되냐?]
“뒷이야기가 있긴 한가?”
[있고 말고. 예를 들어 네 대가리를 돌려놓을 가설 같은 거라던가.]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눈을 빛냈다.
특히나 아리아스필의 눈동자가 강렬할게 집착으로 빛났다.
“어떻게요!? 방법이 있나요?!”
[진정해. 방법은 네 허리춤에 차고 있으니까.]
“...허리춤...”
아리아의 허리춤에 찬 물건 중 가장 눈에 띄이는 장비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렇군요! 성검의 검집! 그거면 확실히 기억을 되돌릴 수도 있겠습니다!”
글라디오가 시선을 둔 곳은 레오나르도가 직접 만든 검집이었다. 마도구로서 검집은 레오나르도가 직접 입력한 기억들이 입력되었고 출력할 수 있었다.
그걸 본다면 분명 기억이...
[아니, 그건 해도 딱히 의미 없을 걸. 흑역사만 늘어나겠지.]
“...예? 어째서...”
현자 자신도 그걸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현 상황에서 얼마나 유의미하지 못할지는 현자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검집의 제작 목적은 1회차의 기억을 저장하기 위해서야. 2회차의 기억은 거의 담지 않았다고.]
물론 개조하는 방향도 고려해봤지만, 후자의 이유로 현자는 그 방식을 추천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을 보여준다고 해도 실제로 기억이 돌아올 확률은 희박해. 이건 기억의 망각이 아니라 소멸에 가까우니까.]
“...어째서...”
[너흰 너희 자신이 미래에서 쓴 일기를 읽는다고 그 일기에 진심으로 이입할 수 있어? 전부 본인 경험 같을 것 같아?]
현자의 논리에는 신빙성이 있었다.
지금 레오는 기억이 소멸이 되어 1회차의 정보만 남은 상태에 가까웠다.
그런 본인에게 미래의 정보를 보여준다고 해도 다시 기억을 되돌릴 기대는 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기억에 괴리감을 느껴서 악화하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그렇다면 어떤 장비를 말씀하는 건지...”
이내 다시 자신의 허리춤을 바라본 아리아의 눈은 날카로워졌다.
생각해보면 이것이 가장 먼저 떠올렸어야 했을 사건의 열쇠였다.
“...성검...”
[그래, 지금은 성검이 가장 의심된단 말이지.]
아리아는 성검을 뽑아들며 날을 얼굴에 비추어보았다. 날에는 자신의 얼굴 뿐만 아니라, 검집에 새겨진 성흔도 순백의 검날에는 비추어보였다.
“하지만 신물인 성검이 기억을...”
[너희들은 못 본 눈치인데, 난 확실히 봤거든.]
현자는 성검에 다가가며 지그시 얼굴을 비추어 바라보았다. 분명 레오가 폭주할 때도 성검의 빛이 검은 신성을 정화했다.
[분명 검은 신성은 불안정하고 지속적으로 폭주했어. 그래서 사용하는 것도 자중시켰지.]
하지만 지금은 보는 것만으로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레오는 일반 신성을 사용하는 성기사보다도 능숙히 어둠의 신성을 이용하고 있었다.
계기는 성검에 박혀 신성을 강제로 주입당한 후였다.
{...하지만 그건 루미네 수사도 하지 않았습니까? 신성으로 중화시키는 것은...}
[아니, 네 후계자도 못한 게 있잖아.]
현자는 분명히 봤다.
아리아가 기절한 레오나르도의 몸에 접촉했을 때, 성검에서는 반응을 보였다.
약간의 섬광이 전격처럼 움직이며 레오의 몸에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몇 날 며칠을 간호해도 혼수 상태인 인간이 깨어났어. 행운인지 기적인지는 몰라도 학자인 내 눈에는 도저히 우연으로는 안 보인단 말이지.]
학자가 아니더라도 단순한 우연이나 기적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사제인 앤젤라와 루미네조차 현자의 말에 성검의 능력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레오의 기억상실은 예상했던 것과 형태가 달라. 본래라면 영혼의 본질도 바뀌는 게 가설에는 맞지.]
검은 신성의 부작용을 인지한 이들이 예상한 변화는 영혼 자체의 탈태였다.
몸과 동시에 영혼 자체에도 강제적인 변화가 일어나 전혀 다른 인물이 되는 현상을 예상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레오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는 아닐지언정 ‘레오나르도라는 인간’의 본질은 같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난 성검으로 예상하고 있어. 짚이는 건 없냐? 아리아스필.]
“...있어요.”
짚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리아스필은 그 원인을 확실히 알고 있다.
아예 그 원인에게 일갈을 들었으니까.
“...성검에서 조상님을 뵈었어요.”
라인하르트에서 아리아의 항렬에는 조상이라 칭할 수 있는 인물은 한 둘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검이라는 주제 아래 아리아스필이 칭하는 조상이 누구인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조상님이라면... 루벤 라인하르트님... 말씀하는 거니?!”
[...루벤을...?!]
{용사님을 뵈었습니까!?}
300년 전 영걸들 역시 경악하며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
레오만 혼자 아무 말 없이 아리아스필을 째려볼 뿐이었다.
***
용사에 대한 설명은 간결히 요약하고 싶어도 자세히 묘사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 사이 동안 용사에 대한 특징은 명확히 각인되어 있었으니까.
그 내용은 라인하르트의 후손들에게는 충격적일 정도로 반전이 담겨있었다.
“...루벤 님께서 그렇게 분노하셨다고...?”
“...네... 제가 패배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아리아는 지금도 생생히 일갈과 통증을 기억한다.
자신을 돼지 보듯 경멸하는 시선, 죄인을 매도하듯 나온 독설들, 그리고 이어지는 공격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뇌에 새겨져 있었다.
[...그 녀석 정말 루벤이야?]
“...네?”
하지만 정작 이야기를 들은 현자와 앤젤라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옛 전우이자 동료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그들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루벤답지가 않아서 말이야.]
{...확실히 용사님이 할 법한 행동은 아니군요.}
그들은 루벤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었다.
“...초대님 답지 않다는 것은....”
[루벤 같은 순둥이가 그런 식으로 화를 내는 건, 상상이 잘 안 돼서.]
“...수, 순둥이요? 초대 용사님께서...”
크리스는 초대 용사가 순둥이라는 말에 쉽사리 납득할 수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용사 루벤이 자애롭다고는 들었어도 냉혹한 면모가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정확히는 그릇이 넓다는 표현이 맞겠군요.}
“...확실히 초대 용사님이라면 그렇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을 테지만...”
그렇게 되면 아리아의 묘사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래서 나도 이해가 안 되는 거야. 아리아스필이 지어내서 말하는 것 같지도 않단 말이야... 근데 어쩐지 루벤답지는 않아.]
아리아가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는 없었으니까.
아리아스필은 레오에 관한 문제라면 격정적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스스로에 대한 잘못은 빠르게 인정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레오와의 연애를 제외하면) 용사로서 부족한 면모는 없었다.
“뻔하지.”
그 자리에서 입을 연 인물은 조용히 경청하던 레오나르도였다.
{...뻔하다는 건...}
“그 보살 같던 초대 용사님마저 고개를 저을 정도로 한심하다는 거잖아?”
악의적인 조롱, 그나마 풀렸던 기류가 다시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레오나르도는 수치심을 이겨내며 차디찬 적의를 불태웠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그 이상 무례를 저지르는 건 허락할 수 없다.”
마르켄은 그 적의에 정색하며 경고를 날렸다.
자신들의 감정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레오나르도가 이 이상 날뛰는 것은 기억을 되찾은 본인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례? 난 엄연히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말해주는 거야.”
레오나르도는 경고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며 경멸을 멈추지 않았다.
“초대 루벤이 만약 하늘나라에서 내가 본 개판을 똑같이 봤다면 저 정도 매도는 오히려 자비로운 거지.”
방금 전까지의 원로원 살해예고와는 다른 결의 말투.
거짓으로는 보이지 않는 진심어린 혐오로 이루어진 매도였다.
“...그건 말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런 매도는 지금 소통에 도움이...”
“자신이 일구어낸 가문이 멸문됐는데 곱게도 넘어겠습니다. 그렇죠?”
그 한 마디에 라인하르트 전원을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용사라는 년은 마왕을 죽인 걸 끝으로 죽고, 성검마저 분실했죠. 그 덕에 용사의 명맥은 꼬이며 끊기고, 신전은 개판이 됐습니다.”
아리아스필은 순간적으로 루벤과 레오나르도를 겹쳐보았다.
초대 용사와 레오나르도는 같은 실망과 경멸을 내보이고 있었다.
“이쯤 되면 기회를 준 게 대단할 자비 아닌가? 진실을 알려준다는 것만으로도 몹시 아량이 넓은 것 같은데.”
맞는 말임에도 불쾌감이 느껴지는 언변이었다.
가주 글라디오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례에 대한 용서가 없음을 드러내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자네에게 더 나은 대책이 있다는 말인가?”
“아니.”
뻔뻔한 부정이었다.
“내가 왜 생각해야하지? 안다 한들 실행할 이유도 없는데?”
자신은 자랑스러운 용사의 혈족도 아니었으며, 성검에 선택을 받지도 않았고, 하물며 성자와 같이 신에게 축복받지 않았으니까.
“...그게 무슨, 레오 기사님... 당신은...”
“기사는 무슨.”
의무 또한 없었다.
레오나르도는 겉옷에 붙어있는 라인하르트의 문양을 뜯어내었다.
“지금 난 일개 용병일 뿐이야.”
지금의 레오나르도는 그들이 아는 ‘레오나르도’는 아니었다.
“만약 기사라고 생각된다면 지금 사퇴하겠어.”
“...레오나르도 어째서...!”
“진심으로 그걸 물어?”
라인하르트의 문양이 구겨지며 탁자에 내리쳐진다.
“당신들이 날 먼저 내쳤잖아.”
지금의 레오나르도에게는 앙금이 아직 남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오래 전에 끝났어. 우리 어머니가 지옥에서 버선발로 뛰어와 비는 한이 있어도 바꿀 생각 없다.”
...갑작스레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예사롭지 않은 침묵에 레오나르도의 이마에선 영문모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침묵이나 경멸 정도는 각오했다. 각오한 바였으나.
자신이 원로원을 죽이겠다 협박했을 때도 분명 이런 침묵이 흘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기억상실 편을 쓰면서 생각했습니다. 레오가 처음부터 여자였다면 최강의 히로인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장점을 나열하면.
1. 100년 넘는 숙성 처녀(회귀로 젊어짐)
2. 자칭 라이벌이지만 이성으로 인식
3. 라이벌로서 볼 수 있는 츤데레
4. 출신은 비천해도 유능한 인재
5. 올타임 자기혐오이기에 의존, 구원물 가능
6. 메가데레 상태로 맛 변경 가능
7. 맛이 심심할 때 얀데레도 가능
8. 암컷타락 가능
9. 가능
하지만 단점도 큰 편이죠.
1. 남자 아리아는 지금보다 더 변태같다.
2. 그래서 바로 따먹힌다.
3. 근데 작가는 미자여서 떡신을 많이 못 쓴다.
흠, 역시 단점도 무시할 정도로 크군요.
[쓰고 보니 나무위키에 작가 대가리에 뭐가 든 거냐고 쓴 문장에 취소선이 사라질 것 같네요.]